#13화, 가넷 가문의 차기 가주
가넷 가문은 레이몬드 제국이 칭제를 하는데 큰 공을 세운 가문이었다.
루드베릴 가넷이 공작자리를 이어받을 당시에는 레이몬드 제국은 아주 작은 왕국이었다.
루드베릴의 아버지이자 재상이었던 레논 가넷은 왕국 내에서 가장 언변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타국들과의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협상용 도구로 이용당했다. 강제적으로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레논의 모습에 가넷 가문은 강한 반발은 내밀었지만 그때마다 왕국을 위해서라는 말만 되돌아왔다.
타국으로 내몰려진 레논 가넷은 타국과의 전쟁 도중 협상을 주도하다 사망한 채 시신으로 돌아왔다. 이때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오고 왕국을 제국으로, 황실에 막대한 권력을 쥐어준 이가 바로 루드베릴 가넷이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받고 분노한 루드베릴은 그 후 각종 비리와 포악함으로 유명했던 기사단장을 힘으로 찍어내려 강제적으로 자리를 빼앗았고, 직접 전쟁에 참가했다.
놀라운 전투력과 리더쉽으로 장장 2년 만에 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는 연이어 다른 전쟁에서도 승리를 가져왔다.
얼떨결에 루드베릴 가넷으로 인해 높은 군사력을 가지게 된 왕국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레이몬드 제국으로 칭제를 하게 된다. 이때 루드베릴 가넷은 전쟁에서 돌아와 몇 가지 조건을 내세우며 1대 황제에게 이렇게 말한다.
‘제 도움으로 칭제를 하였으니 그에 따른 보상을 받아가겠습니다. 먼저 대공의 작위를 내려주시고, 이 제국의 항구를 저희 가문의 소유라는 서류를 주세요. 그리고 거듭 강조하지만 제 능력으로 인해 높은 군사력과 칭제를 하게 되었으니, 다시는 우리 가문 사람들에게 손을 대지 말아주십시오.’
그 후 루드베릴은 기사단장 자리에서 물러난다. 하지만 2대 황제가 가넷 가의 세력을 찍어 누르기 위해 모함을 하며 가문을 멸하려 하자, 가넷 가문은 거의 반란급의 반발을 내보이며 레이몬드 황실에게 가문의 힘을 다시 한번 보여주게 된다.
그 후, 3대 황제는 가넷 가와의 갈등을 줄이기 위해 가넷 가의 영애들을 황후로 들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페르소나가 지금 3대 황제가 이뤄낸 업적 중 하나를 없애려 들고 있었다.
“대공, 그대의 딸이 이혼을 선언했다는 소식을 들었소?”
“들었습니다. 폐하께서 신분도 모르는 정부를 들인 것과 제 손주손녀 될 뻔한 아이가 독으로 죽었다는 것도요.”
아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페르소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나에 대한 죄책감은 없고 아이에 대한 죄책감은 있다는 건가.
“…지금껏 황실에는 이혼이라는 글자가 없었소, 그런데 내가 황제가 되었을 때 이런 일이 벌어졌소. 황실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나는 그대의 딸을 데려가야겠소.”
“죄송하지만 폐하,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대공!”
대공은 인자하게 웃으며 분노에 차 소리치는 페르소나를 지나쳐 내게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황제를 향한 살기와 독기가 서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공은 바닥으로 꽂아두었던 검을 뽑아 내 손에 쥐어주었다. 나는 손에 들린 커다란 검과 대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지? 이걸로 페르소나를 때리기라도 하라는 건가?
“로젤리아, 내일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하렴. 검술도 다시 시작하고.”
“아버지?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공부를 다시 시작하라니.”
공부? 검술?
이혼을 했으니까, 당연히 집 밖이나 사교계에 참석하지 말하고 할 줄 알았다. 물론 몰래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지만……공부와 검술을 다시 시작하라니?
“대공, 검술이라니. 황후는 지금 당장 황실로…….”
“폐하, 폐하는 제국의 법도도 모르는 무식자였습니까?”
대공은 한껏 가라앉은 눈으로 페르소나를 응시했다. 벌레만도 못한 것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대공, 무례를 봐주는 것도 정도 것이오.”
“무례라고요? 지금 봐주는 게 누군지 모르겠습니까? 폐하는 가넷 가문의 후계자를 무례하게 데려가려고 하고 계십니다.”
“후계자라고?”
페르소나와 나는 잠시 멍한 얼굴로 대공을 응시했다.
후계자, 후계자라니? 내가?
“아버지, 정말로 제가 가넷 가문의 후계자입니까?”
나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렸다.
가넷 가의 후계자. 즉, 황실이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자리였다. 2대 황제 사건이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상, 그 자리는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자리였다. 이것은 가넷 가와 황실의 암묵적인 룰이기도 했다.
“대공, 지금 무슨 권한으로 그녀를 대공으로 세우겠다는 말이지? 그녀는 아직 황후다. 아무리 이혼을 선언했더라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대공이다. 대공의 자리.
어릴 적 교육을 받으면서 대공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가문을 이끌어나가는 가주라는 게, 얼마나 멋있어 보이던지. 하지만 나는 황후가 되어야 했고, 황후가 되었을 때는 앞으로도 절대 갖지 못할 자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황후의 자리에서 내려와도, 당연히 가넷 가의 영애로만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대공의 후계자 자리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저는 이혼을 물릴 생각 없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지금 저를 후계자라 칭하셨습니다.”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천천히 페르소나에게 다가갔다. 그의 코앞까지 다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는 이혼 재판 전까지 후계자로서의 교육을 받고, 그 자리에 합당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황후, 끝까지! 나는 절대 이혼서류에 사인을 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시지요, 하지만 폐하께서 사인을 하시지 않는다고 한들, 저는 이제 로젤리아 가넷입니다. 가넷 대공이 될 것이고, 폐하를 보필하고 인내하고 참아내는 그런 황후의 자리에는 죽어도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페르소나는 한껏 일그러진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현 가넷 가문의 가주인 루벨라이트 대공이 나를 자신의 후계자로 두겠다고 선언한 이상 그는 나에게 함부로 대하거나 강압적으로 굴 수는 없었다.
방금처럼 억지로 데려가려 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가넷의 가문은 레이몬드 황실을 세웠고, 황제 자리 대신 대공의 자리를 택한 것이니까.
‘2대 황제 때의 참사를 다시 불러오지는 못할 거야.’
황실의 군사력은 여전히 가넷 가에서 지탱하고 있고, 주요 무역은 루벨라이트 대공이 맡아 하고 있었다. 페르소나는 전 대 황제들과 다르게 멍청하지 않았다. 이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다. 선택에 따라 반발을 일으킬지, 아니면 다시 평화를 유지할지. 페르소나는 그 답을 알고 있었다.
“……돌아가도록 하지.”
페르소나는 나를 노려보며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가넷 가문과의 갈등만큼은 피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겠지. 나는 조용히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고 있던 것인지,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때 칼라일이 내 허리를 감싸 안아 쓰러지지 않도록 부축했다.
“괜찮아요?”
“제가 할 말 같은데요. 괜찮아요?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충분히 도와줬어요. 아까는 고마웠어요. 몸은 어때요?”
뒤늦게 묻자 칼라일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강한 마법을 썼잖아요.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네, 괜찮아졌어요.”
“정말로?”
칼라일은 걱정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정말 괜찮아요. 봐요.'라고 말하더니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다시 땅 위로 얇은 덤불 하나가 솟아오르더니 순식간에 페르소나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쳤다.
“!”
쿠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페르소나는 앞으로 넘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모두가 정적에 휩싸였다. 기사는 당황한 눈빛으로, 페르소나는 살의 가득한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그의 뒷머리를 후려친 덤불은 이미 가루가 되어 사라져있었다. 칼라일은 가련한 모습으로 내 품 안에 안긴 채 작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마법으로 황제의 대가리를 후려쳤다고는 믿을 수 없는 그런 연약한 모습으로.
***
“이게 뭐에요, 폐하?”
샤를로테가 금빛 눈동자를 깜빡이며 페르소나를 응시했다. 새하얀 대리석 책상에 놓인 것은 각종 서류들과 두꺼운 책 여러 권이었다. 페르소나는 이게 뭐냐고 묻는 샤를로테를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이게 뭐냐니? 샤를로테의 앞에 놓인 건 그녀가 정부로 들어오고 나서부터 교사를 시켜 가르친 과목들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업무와 결재 서류였다.
“기본 역사. 정치학. 사회학. 무역과 수출. 그리고 마력학까지.”
샤를로테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 정도 시간이면 이미 몇 번씩이나 공부하고 복습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걸 바탕으로 결재를 하게 될 텐데. 네가 처리해야 할 서류를 설명해주겠다.”
“결재 서류요?”
“황궁 내 각 분야별로 지급될 급여. 세금은 보좌관이 올려주는 보고서를 확인하고 결재를 하면 된다. 매달 황궁으로 들여오는 식재료와 기타 물품의 대금.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정치 부분인데….”
“저, 잠깐만요 폐하.”
책상을 가득 채운 서류의 양을 보며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샤를로테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서류들을 가리켰다.
“…제가 아직 공부를 다 끝마치지 못했어요.”
“시간은 넉넉히 준 것 같은데. 몇 달씩이나 주지 않았나?”
“그, 너무 어려워서 그랬어요.”
페르소나는 말없이 이마를 짚었다. 속이 답답했다. 당장 황후가 해줘야 할 일은 산더미인데 기본적인 지식이 전혀 학습되어 있지 않았다. 적어도 무역과 수출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공부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조차 되어있지 않았다.
“도대체 무얼 공부한 것이냐, 샤를로테.”
“하지만 폐하, 너무 어렵기도 하고 공부를 하려고 해도 매번 교사들이 바뀌는 통에….”
“교사가 바뀌어?”
그때 옆에 있던 보좌관이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샤를로테님을 담당하던 교사가 샤를로테님에게 푹 빠지는 탓에 며칠 간격으로 계속 새 교사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황후가 했던 말이 사실이었군,”
교사가 샤를로테에게 빠져 제대로 교육하지 못해 바꾸었다는 말이 진짜였을 줄이야. 그저 모함하려고 지어낸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폐하. 황후는 접니다. 왜 자꾸 그 여자를 황후라고 부르시는 거죠?”
“정확히는 임시 황후지. 황후 교육이 전혀 되어있지 않은 황후.”
“임시 황후라니요?”
“그럼 네가 곧바로 정식 황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샤를로테는 말없이 어깨를 파르르 떨며 입술을 꾹 물었다. 당장이라도 울 듯한 표정이었다. 페르소나는 또다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책들과 서류를 툭툭, 두들겼다. 예전에는 저 울먹이는 모습이 참으로 사랑스럽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어째서 이렇게 짜증만 나는 것인지. 대공을 상대하고 온 뒤라 그런 건가.
“이틀의 시간을 주겠소. 제대로 끝내놓으시오.”
“폐하, 이틀이라니!”
“안케도니아 제국은 1황녀에게 정치 교육을 시킨다고 들었는데, 그럼 이미 어느 정도 지식이 있을 테고, 사실상 이틀도 충분하지 않나?”
페르소나는 안색이 급격하게 나빠진 샤를로테를 달래주지 않고 기사들과 함께 방을 빠져나갔다. 자꾸만 울컥하고 치솟는 짜증과 분노 때문에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 탓에 샤를로테의 얼굴이 공포에 질려 있음을 페르소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
페르소나는 침대 위에 몸을 엎으며 아주 작게 로젤리아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집무실에 도착한 페르소나는 주변의 기사를 모조리 물렸다. 혼자 있고 싶었다. 옆에 있어줬으면 하는 사람은 수석비서나, 샤를로테도 아닌 로젤리아 하나뿐이었다.
로젤리아. 나의 황후. 붉은 머리카락에, 황후의 왕관이 잘 어울리는 내 아내.
로젤리아를 생각하는 페르소나의 입가에는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말없이 결혼반지를 매만지며 정원에서 보았던 로젤리아를 떠올렸다.
아름다웠다. 이름 그대로 붉은 장미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곧 로젤리아에게 기대 숨을 고르던 그 마법사, 칼라일이라던 정부를 떠올렸다. 가련한 모습, 연약한 모습. 도대체 그런 약한 놈을 정부로 들인 건지. 강한 놈으로 들이던가. 좀 더 든든하고 그런 놈. 아니지, 마법사라서 들인 건가? 애초에 그런 취향이었어? 연약한 남자?
그놈을 안는 로젤리아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로젤리아.”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째서인지 로젤리아가 보고 싶었다. 제멋대로 이혼 선언을 하고 나가버린 그 여자가.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눈앞으로 아른거렸다. 페르소나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로젤리아, 그 이름을 여러 번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