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반으로 찢어진 이혼 서류를 보며, 나는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칼라일이 내 팔을 꽉 붙들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도 구두 굽으로 그의 머리를 내려쳤을 지도 모른다.
나는 침착하게 페르소나가 반으로 찢어버린 이혼 서류를 주워들었다.
정말 열심히 힘들게 작성한 서류였다. 이혼 사유를 쓰는 내내 많은 생각이 오고 간 흔적들이 보였다. 쓰다가 울어버린 탓에 새 종이에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이걸, 내 눈앞에서 반으로 찢어버리다니. 어떻게든 울컥 치솟는 분노를 참으려 애를 썼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때 내 뺨에 칼라일의 손이 닿았다. 그는 두 손으로 천천히 내 뺨을 감쌌다.
“괜찮아요?”
내가 울고 있다고 생각한 건가? 칼라일은 놀란 얼굴로 내 눈가를 쓸어내렸다. 울고 있는 게 아니라 화가 난 것이었다. 내가 힘이 무척 강했다면 나무를 뽑아 페르소나에게 던졌을 게 분명했다.
“괜찮아요.”
“우는 건 아니죠?”
“내가 왜 울겠어요. 전남편 앞에서 우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표정이 울고 있잖아요.”
왜 칼라일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는 건지 모르겠다. 나에게 미안해야 하는 사람은 칼라일이 아니라 페르소나였다. 물론 페르소나는 나에게 미안하지 않고, 오히려 화를 낼 게 뻔했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남의 아내에게 무슨 짓이지?”
남의 아내?
“지금 네가 손대고 있는 여자가 누군지는 알고 이러는 건가? 너 같은 것이 함부로 손댈 여자가 아니다.”
어이가 없어서 페르소나를 쳐다보았다. 남의 아내라는 소리가 나오나? 페르소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나와 칼라일에게 다가와 우리 둘을 떨어트려 놓았다. 내 손목을 꽉 비틀어 쥔 채 칼라일의 어깨를 세게 밀쳐냈다.
칼라일은 어깨가 밀쳐졌음에도 두어 번 눈을 깜빡이기만 할 뿐 여전히 시선은 페르소나가 잡고 있는 내 손목을 향해 있었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칼라일이 완벽한 귀족 예법을 갖춰 인사하자 페르소나는 예상외라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귀족 출신 정부인가?”
여자 정부 중에서는 귀족이 꽤나 많지만, 남자 정부는 귀족 출신인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러니 대부분 노예나, 평민이었다. 페르소나도 당연히 칼라일이 평민이나 노예라고 생각한 것인지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귀족 출신이면 안 되는 이유가 있을까요?”
칼라일은 순진하게 물었고, 나는 조용히 웃음을 터트렸다. 정부의 출신으로 꼬투리 잡으려 했던 건가. 분위기가 점점 심각해졌다. 칼라일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면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있었다. 분위기가 점점 차가워지자, 나는 페르소나와 칼라일 사이로 나섰다.
“제게 볼일이 있어서 오신 거 아니신가요?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내가 황후를 보러 오겠다는데, 문제가 있소?”
“폐하와 저는 이제 이혼할 사이입니다. 호칭을 바꿔주십시오.”
이혼이라는 말에 페르소나는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아침에 모든 얘기가 끝난 줄 알았는데요.”
“누가 끝났다는 거지? 나는 황후와 이혼할 생각이 없소.”
“그래서요?”
이혼을 하지 않겠다면 재판까지 가면 될 일이었다. 설령 이혼 절차를 제대로 밟지 못해 취소된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종이는 넘쳐나고, 잉크도 많다. 이혼 서류는 몇 번이나 작성할 수 있었다.
“저는 황후가 아닙니다. 폐하께서 이혼 서류를 반으로 찢어버리셔도 제 결심이 변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나한테 서운한 게 있다면 차라리 말을 하시오. 왜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가는 거지?”
막무가내? 내가 지금껏 참아온 게 몇 년이고 자유롭게 살아본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막무가내라니?
“그리고 제국에 떠도는 소문이 사실인가?”
“제국에 떠도는 소문이 어디 한두 개입니까?”
“황후가 나와 이혼을 하는 이유는 사실 정부 때문이라는 소문을 들었소. 그대가 이혼 사유라고 적은 것은 다 명분일 뿐이라고.”
페르소나는 나를 차갑게 쏘아붙이다 이내 눈을 크게 뜨고는 작게 탄식을 흘렸다.
신전에 제출하는 이혼 서류인 만큼 거짓 없이 상세하게 이혼 사유를 작성해 제출했다. 그 서류에는 내가 유산을 하고 한동안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는 황궁의의 의사소견서도 함께 부착되어 있었다.
페르소나도 그걸 읽었겠지. 그런데 뭐? 정부 때문에 이혼을 했다고?
내가 말없이 페르소나를 쳐다보자 그의 얼굴이 당황스럽다는 듯 붉어졌다. 페로소나의 눈에 비친 내 얼굴은 내가 보기에도 당혹스러울 정도로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칼라일이 말한 울 것 같은 표정이 이런 거였구나.
“폐하께서 그러셨죠. 조각상 같다고, 한 번도 감정을 제대로 드러내본 적이 없는 차가운 얼음 조각상 같다고 말이죠.”
나는 손으로 뺨을 꾹 누르며 페르소나에게 미소 지었다.
“그래서, 어떠십니까. 그렇게나 보고 싶어 하던 얼굴입니까?”
“나는 그런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니다.”
“그럼 어떤 얼굴을 보길 원하셨죠? 행복해하는 표정을 바라셨습니까? 폐하께서 저를 사랑하셨다면 볼 수 있으셨겠지요.”
사랑했다면, 그래. 사랑했다면 샤를로테를 정부로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를 두더라도 나를 사랑했겠지. 사사건건 샤를로테와 비교하지 않았을 테고.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인가, 지금?”
페르소나는 헛웃음을 뱉어내며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랑했는지 안 했는지는 천천히 알아보면 되겠지.”
그때 정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 열댓 명이 정원으로 들어왔다.
“돌아가지 않겠다면 기사를 이용해서라도 데려가겠소.”
정말 강제로라도 데려갈 생각인 건지, 황궁의 기사들은 허리에 찬 검을 꺼내려 하고 있었다. 기사들을 막아서기에는 가지고 있는 무기가 단검 하나밖에 없었다. 아무리 검술을 배웠다지만 단검으로는 기사 다섯 정도 밖에 못 막을 텐데.
하지만 기사들 중 한 명의 검을 빼앗으려 몸을 한쪽 발을 뒤로 뺀 순간, 땅이 흔들렸다.
갑작스러운 진동과 함께 땅이 갈라졌다. 눈앞으로 커다랗고 두꺼운 식물의 줄기 기둥이 솟아올랐다. 솟아오른 줄기는 빠르게 기사들의 몸을 휘어 감았고, 이내 가시가 돋아나더니 기사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로젤리아님. 제가 되도록 안 나서려고 했는데….”
이건 정말 아니잖아요. 칼라일이 작게 중얼거리자 기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정부로 들인 남자가 귀족 출신에, 마법사라니.”
페르소나는 무서운 기세로 기사들을 공격하는 가시덤불을 보며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웃음을 터트리며 기사들을 압박하고 있는 덤불을 검으로 잘라냈다. 아버지에게 직접 검술을 배웠던 터라 덤불은 페르소나의 검에 손쉽게 잘려나갔다.
“정부의 능력이 참으로 뛰어나오, 황후.”
“그러게 말입니다, 황제 폐하보다 훨씬 좋은 것 같군요.”
페르소나가 덤불을 잘라내는 걸 본 기사들이 자신의 몸을 압박하는 덤불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아무리 마법으로 만들어낸 덤불이라도 저렇게 다 잘라낸다면 다시 나를 황궁으로 데려가야 할 텐데. 이번에 황궁으로 가게 된다면 아예 나가지 못하게 가둬놓을지도 모른다. 페르소나는 그만큼 미친놈이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칼라일은 마법을 쓰면 몸에 무리가 간다고 말했다.
칼라일이 비틀거리며 기사들을 향해 뻗은 손을 떨었다. 덤불은 잘라낼 때마다 다시 자라났지만 마법이 지속될수록 칼라일의 안색은 점점 나빠졌다.
“칼라일, 더 이상 마법을 쓸 필요 없어요.”
“하지만….”
“나는 다시는 황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나 때문에 몸을 혹사시키지 말아요.”
칼라일은 심장 부근을 부여잡은 채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서 있는 것도 간신히 버티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기사들을 압박하던 덤불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 순간 칼라일은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칼라일!”
나는 주저앉은 칼라일을 끌어안은 채 심하게 떨리는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핏줄이 터진 건지 칼라일의 눈은 붉게 충혈 되고 있었다.
페르소나는 나를 심란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내가 칼라일을 끌어안은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기사들에게 지시했다.
“지금 당장 황후를 마차로 데려가라.”
“손을 댄다면 나는 너희들의 목을 베겠다.”
“황제의 명이다. 황후를 마차로 데려가라!”
“황제의 명이라 하더라도 명확한 사유 없이는 그 누구도 함부로 데려갈 수 없으십니다.”
기사들은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다. 황제의 명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했다. 하지만 내가 한 말처럼 레이몬드 제국에서는 명확한 사유 없이는 기사들을 이용해 함부로 체포한다거나 데려갈 수는 없었다.
“저를 데려 가겠다 하신다면 명확한 사유를 가져와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황후의 정부가 황실의 기사단을 마법으로 공격한 점을 사유로 들어 황후와 저 정부를 함께 데려가도록 하지.”
“칼라일이 마법을 쓴 건 폐하께서 가넷 대공저에 연락도 없이 기사들을 데리고 온 점, 먼저 검을 들고 저와 칼라일을 위협하신 점에 대해 설명하셔야 할 것입니다. 칼라일이 마법을 쓴 이유는 저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으니까요.”
나는 기사 중 한 명이 떨어트린 검을 주워들었다.
“그전까지 저는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을 겁니다.”
검을 꽉 쥐었다. 이번만큼은 나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나는 잘못한 게 없었고 최대한 이성을 차리려 하고 있었다. 막무가내로 나서는 건 페르소나였다. 기사들을 이용해 나를 황궁으로 데려가? 누구 마음대로.
그의 말대로 생각해보자면, 황제인 그가 이혼 서류에 사인을 하지 않았으니, 나는 아직 황후라는 소리였다.
샤를로테를 임시 황후 자리에 앉혀두고, 제국민들 앞에서는 샤를로테에게 황후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단둘이 있을 때는 나를 황후라 부르는 그 모순적인 행동을 지적할 생각이었다.
아버지가 제 몸만한 검을 끌고 페르소나의 뒤에서 나타나기 전까지는.
“내 딸이 들인 정부가 마법사였구나.”
“루벨라이트 가넷대공…?”
그래도 7년간 검술을 배웠었다. 수많은 검의 종류를 보았자만 저렇게 커다란 검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저렇게 커다란 검은 본적이 없었다. 베어 죽이는 게 아니라 때려죽이는 용도일지 모른다는 그런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대공, 그대는 지금 무역 협정을 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협정은 잘 끝났고, 원래는 며칠 더 머물 생각이었습니다만 제가 충격적인 소식을 들어서 말이죠. 황후 폐하, 아니. 제 딸아이가…이혼을 했다고 하던데.”
대공은 무척이나 인자하게 웃으며 검을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정확히는 바닥에 칼을 수직으로 꽂아 세워두었다.
“폐하께서 괜찮으시다면 전후 사정을 듣고 싶습니다. 일단은 먼저.”
검이 저렇게 수직으로 땅속에 박힐 수 있나?
갑작스러운 루벨라이트 가넷 대공의 등장에 페르소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제 딸이 왜 검을 들고, 기사들은 왜 제 딸을 위협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들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