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웃고 있지만 웃고 있는 게 아닌
정말로 13황녀였다.
샤를로테는 1황녀가 아니었다. 칼라일이 쓰러져 있는 내내,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잘못 알았다거나, 아니면 내가 잘못 이해한 거라던가. 그럴 줄 알았다. 아니, 그랬어야 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샤를로테를 용서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 바람과 달리, 샤를로테는 13황녀였다.
샤를로테는 모두에게 자신이 1황녀라고 거짓말을 하고, 약혼자도 버젓이 있는 상태에서 결국 임시 황후가 아닌 정식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이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너무 빠르게 뛰어서 터져버릴지도 몰랐다.
겨우 진정시켜놓은 분노가 나를 집어삼키는 듯했다.
나에게는 아끼는 시녀가 있었다. 릴리 말고 친여동생처럼 아낀 열다섯 살의 어린 시녀, 라벨. 라벨이 샤를로테에 의해 쫓겨난 건, 샤를로테가 스스로 1황녀라고 밝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샤를로테의 신분은 철저하게 숨겨졌다. 아는 사람은 황궁에 소속된 사람들뿐이었다. 밖으로 퍼져나가지 않게 페르소나가 직접 관리하고 신경 쓴 덕분에 제국민들에게는 샤를로테의 신분에 관한 이야기가 거의 퍼지지 않았다.
그 당시 시종들 사이에서 샤를로테의 신분이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황녀이면 뭐해, 어차피 패전국의 황녀잖아. 그런 말들이 한창 돌 때쯤, 라벨이 실수로 샤를로테의 드레스에 차를 쏟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샤를로테는 나를 우습게보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라며 시종들이 지금껏 샤를로테에 대해 수근거렸던 일들을 거론했다.
“나는 현재 황제 폐하의 정부다. 하지만 한 제국의 1황녀이기도 했다. 너희가 함부로 수군거릴 만한 사람이 아닌데, 그럼에도 쭉 참아 주었거늘, 은혜도 모르는 것들이….”
라벨이 실수로 차를 쏟은 건 순전히 실수였다. 실수로 일어난 일었다. 다른 시녀들도 그렇게 말했다. 드레스 끝을 밟고 넘어진 거라고.
하지만 샤를로테는 라벨을 본보기 삼아 황실에서 내쫓았다.
손톱을 모두 뽑으라는 끔찍한 명령과 함께.
그런데, 13황녀였다니.
“…이 사실을 또 누가 알고 있나요?”
“없습니다. 이 제국에 와서 저도 처음 얘기한 거니까요.”
“그럼 혹시….”
샤를로테가 13황녀인 것을 페르소나에게 말해줄 수 있나요?
그 말이 바로 턱 아래까지 차올랐다.
샤를로테가 13황녀인 것을 밝히면 적어도 황후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할 수 있었다. 황후의 자리에 앉힌 건 1황녀이고, 정치적으로 지식이 있어서 황후의 업무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겠지. 사랑 때문일 수도 있고. 하지만 13황녀면 사정이 달라졌다. 관리들이 반대의 입장을 강하게 내보낼 것이다.
그리고 1황녀라고 거짓말을 해온 것을 내세우면….
“…혹시, 안케도니아 황실이 왜 마법사 가문과 서약을 맺은 건지, 알려줄 수 있나요?”
하지만 차마 부탁할 수는 없었다.
내 원망을 풀고자 다른 사람을 이용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칼라일은 샤를로테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 중 한 명인데,
어쩌면 같은 상황에 놓은 것일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부탁하겠어.
“아, 반란 때문입니다.”
“마법사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어서?”
“네. 그래서 혼인을 통해 나름의 평화 협정을 맺었던 거죠. 황실은 불안감을 덜고, 저희도 황실에서 영지와 돈을 받고. 헬리오도르 가문은 모습을 드러내기 싫어했기 때문에 상호 관계라고 볼 수 있었죠.”
“그렇군요….”
상호 관계라.
그러고 보니 페르소나도 비슷한 말을 했었던 것 같은데. 샤를로테와 사이좋게 지내도록 노력해보라고.
그때는 내가 이렇게 이혼을 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그때 얼굴 위로 뭔가 그림자 같은 게 드리워졌다. 고개를 돌리니 커다란 손이 보였다. 머리카락이 뭐 묻은 건가 싶었는데 눈앞으로 작은 빛 같은 게 지나갔다. 칼라일의 손끝에서 새하얀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얼굴이 창백해서요, 이러면 좀 낫지 않을까 해서요.”
따뜻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온몸을 감싸는 듯한 따뜻함에 분노는 사라지고 어느새 몽실몽실한 기분만 남았다. 마법을 쓴 건가?
“제가 샤를로테 얘기를 해서, 그러시는 건가요?”
“!”
“샤를로테를 싫어하신다고 했는데….”
그의 목소리에서 미안한 감정이 묻어났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샤를로테 때문에 그런 거지, 그대 때문에 그런 게 아닙니다.”
“샤를로테를 많이 싫어하시는군요.”
“솔직히 말하자면, 많이 그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많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샤를로테에 대한 내 원망이 너무 거대했다.
“샤를로테는 내 남편의 정부였고, 나는 샤를로테로 인해 꽤 힘든 생활을 했습니다. 일단 나는 사랑하는 남편을 빼앗겼고, 비록 내가 먼저 이혼을 제시했지만 뭐가 되었든 이제 황후의 자리는 샤를로테의 것이 되었죠.”
“…남편을 아직 사랑하나요?”
“아내를 집에 두고 당당하게 다른 여자 만나겠다고 하는 놈에게 흥미 따위 없습니다.”
천천히 목 부근을 매만졌다.
페르소나는 나는 서로 약혼반지를 주고받았지만 업무를 할 때마다 불편하니, 다른 장신구로 대체하자고 했었다. 나는 페르소나의 눈 색을 닮은 에메랄드가 장식된 목걸이, 그리고 페르소나는 가넷 브로치를 착용했다. 물론 그 브로치는 보석함에 넣어뒀거나 샤를로테에게 선물했거나 했을 것이다.
‘목걸이는 황후의 방 책상 서랍에 두고 왔지.’
혹시나 쓸데없는 미련이 남을까, 그와 관련된 물건은 하나도 챙겨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로젤리아님.”
“…?”
“저를 정부로 들여 주세요.”
정부로 들여 달라는 게 무슨 뜻이지?
나는 말뜻을 이해하느라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칼라일을 바라보았다. 정부로 들여 달라고? 물론 위장이기는 하지만…이미 정부잖아.
“제가 말하는 정부는 가짜 정부가 아니라 진짜 정부를 의미하는 겁니다.”
“…지금 정말로 내 정부가 되겠다, 그 소리인가요?”
계속 정부로 둘 생각은 없었다. 그도 귀족의 정부 취급을 받는 게 달갑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남자 정부는 이상하게도 남자의 자존심을 무너트리는 짓이다, 이런 말도 많으니까. 그래서 원한다면 상처가 다 낫는 순간 내보내 주려고 했다. 나는 그사이 돈을 주고 정부 행세를 해줄 사람을 구하고.
그런데 정말로 내 정부가 되겠다고?
“…제 정부가 되고 싶다고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찾아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찾아야 할 사람?”
찾아야 할 사람이 샤를로테는 아니고…그럼 누구지?
칼라일은 자신의 목에 걸린 팬던트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혹시 헬리오도르 사람을 찾으려고 그러나? 아무래도 신분도 없이 제국을 돌아다니는 게 힘들어서? 옅은 머리카락 색 때문에 아무래도 눈에 틔겠지. 그런 것 때문에 정부로 들여 달라는 건가.
“찾아야 할 사람이 혹시 헬리오도르 가문 사람이에요?”
“정확히는 제 동생입니다.”
“동생? 아, 그럼 혹시 몸에 생긴 상처도 동생을 찾다가 그렇게 된 건가요?”
복부의 상처를 가리키며 말하자 그의 몸이 눈에 띄게 굳었다.
“…안케도니아 제국에서 레이몬드 제국으로 넘어온 후에 생긴 상처입니다. 동생은 그때 잃어버렸고요.”
팬던트 안에 끼워져 있던 어린 여자 아이의 사진이 동생일까. 칼라일과 무척 닮았던데. 나는 칼라일의 뺨에 있는 상처를 조심스레 손으로 쓸었다. 덜 아문 상처에는 피가 고여 있었다.
“부탁을 그냥 들어달라는 건 아닙니다. 전 황후이신 로젤리아님께서 정부를 두는 것 자체가 큰 위험일 테니까요.”
칼라일의 말이 맞았다. 나에게는 정부를 둔다는 것 자체가 큰 위험이었다. 아주 잠깐 정부를 들였다가 마는 것이면 모를까, 나는 정부를 오래 둘수록 내 약점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그러니 정부로 들여 주신다면, 황제 폐하께 가서 샤를로테가 13황녀이고, 제가 약혼자라는 것을 밝히겠습니다.”
상처를 쓰다듬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말해주겠다고? 그걸?
겨우 진정시켰던 심장이 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정말로 기쁠 텐데. 샤를로테의 일그러진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정부를 들이는 것쯤이야.
하지만 칼라일이 그걸 밝힌다고 해도, 뭐가 달라질까? 페르소나는 내가 아닌 샤를로테를 사랑했다. 그렇기에 관리들의 반발을 받으면서도 샤를로테를 정부로 들이고, 임시지만 황후의 자리에 앉히지 않았나.
그리고 내 욕심 때문에 누군가를 다치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칼라일이 나서준다면 페르소나와 샤를로테를, 적어도 관리들과 제국민들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겠지….
샤를로테는 이제 권력을 쥐었다. 그 영악한 머리라면 칼라일을 죽이기 위해 용병을 구할지도 모르지. 내 원한을 풀고자 타인을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할 수는 없었다.
이건 내 문제였다. 샤를로테와 페르소나, 그리고 나의 문제.
“내가 이미 정부라고 말해버린 탓에, 정확한 외향 묘사는 아니지만 ‘금발에 은빛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로젤리아의 정부로 들어갔다.’라는 말 정도는 떠돌겠죠. 동생을 찾는 데 불편함이 뒤따를 겁니다.”
“!”
“내가 도와줄게요. 샤를로테에 대한 이야기는 동생을 찾은 그 후에 다시 얘기하도록 하죠. 그대를 내 정부로 받아들일게요.”
정부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하자마자 칼라일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확히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곳에 온 뒤로 아파하거나 울거나, 괴로워하거나 어떻게든 미소 지으려 애쓰는 얼굴 밖에 보지 못 했는데 웃는 걸 보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너무 잘생겨서 그런가, 나는 울렁거리는 가슴 안쪽을 꾹 눌렀다. 페르소나도 상당히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런데 칼라일은 그보다 훨씬 잘생긴 외모였다. 사람을 울렁거리게 만들 정도로.
그때 칼라일의 시선이 내 손등에 닿았다.
“…잠시 손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손?”
아, 상처가 벌어졌구나.
벌어진 상처는 보기가 썩 좋지 않았다. 손을 뒤로 숨기려는데 칼라일의 새하얀 손이 내 손에 먼저 닿았다.
그리고 눈을 한번 깜빡인 사이, 상처가 사라졌다. 의사가 하도 깊게 베여서 흉터가 남을지도 모르겠다 말했던 그 상처가 새하얀 빛과 함께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이것도 마법인가? 신기해서 손을 이리저리 살피는데 칼라일이 웃음을 꾹 참고 있는 게 보였다. 그제야 나는 천천히 손을 놓으며 애써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웃지 말아요.”
“….”
“소리를 안 낸다고 해서 웃지 않는 게 아니에요.”
고개를 푹 숙인 채 칼라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를 부들부들 떨어가면서. 이게 그렇게 웃겼나? 어깨를 떨 정도로?
뭔가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아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는 그의 입을 막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거센 바람이 정원 위로 지나갔다. 갑작스러운 바람에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려 크게 휘청거렸다.
나무를 짚으려는데 발끝에 커다란 돌이 걸렸다. 그 덕분에 몸은 앞으로 기울었고 칼라일이 다급하게 일어나 내 팔을 잡았다.
나는 재빨리 머리카락을 고정해두었던 핀을 다시 꽂으려 했지만 없었다. 잔디 위에 떨어진 핀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데 문득 살짝 붉어진 칼라일의 얼굴이 보였다.
“칼라일, 얼굴이 붉어요.”
“네, 네?”
“혹시 다시 열이 오른 건가요?”
그의 눈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나에게 뻗는 손가락도. 칼라일은 천천히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주기 시작했다. 허리를 굽혀 떨어진 머리핀을 주워 다시 내 머리에 꽂는 순간에도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내 머리카락 끝에 입을 맞추는 순간까지도.
“열이 올라서 그런 거라면…차라리 다행이겠네요.”
그의 귀는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열이 오른 게 아니라면 얼굴과 귀는 왜 붉은 거지? 아, 기뻐서 그런 걸까. 동생을 찾아준다고 그래서? 나는 칼라일이 입을 맞춘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릴리가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는 건 특별한 뜻이 있다고 그랬다.
그게 무슨 뜻이었더라, 당신에게…당신에게, 뭐였지?
그때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도에 떠돌고 있는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익숙하다 못해 질릴 정도로 듣기 싫은 목소리.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내 정원에 들어온 페르소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볼일은 아침에 다 끝냈는데.
내 시선은 페르소나의 손에 들린 서류로 향했다.
“아침에 깜빡 잊고 확인하지 않은 게 있어서 내 친히, 직접 확인하러 왔는데. 그게 사실이었군.”
가넷 가문의 인장이 찍힌 서류, 그리고 내 글씨체…이혼 서류?
“황후.”
“….”
“만약 이혼 사유가 정부 때문이라면 나는 사인을 해줄 수 없소. 절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혼 서류는 반으로 찢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