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마법사 가문
대공이 돌아왔다. 루벨라이트 대공, 아버지. 아버지가 돌아왔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버지가? 무역 건은 어쩌시고?”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칼라일을 집무실로 부르셨다고요!”
내 아버지, 대공 루벨라이트 가넷이 돌아올 이유는 뻔했다. 황후였던 자신의 딸이 돌연 이혼을 선언했는데, 그것도 이혼이라는 전례가 단 한 번도 없는 레이몬드 제국에서. 그런 이유에서라면 갑자기 대공저로 돌아오더라도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칼라일을? 갑자기?
설마 며칠 전에 있었던 소동마저 다 전해들은 건가?
“지금 당장 집무실로 가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안 그래도 해결해야 할 일이 차고 넘치는데. 조심스레 집무실의 문을 두들겼다. 집무실 안은 숨 막힐 정도로 조용했다. 루벨라이트 대공은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고, 칼라일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저번보다는 훨씬 나았다.
“아버지.”
“이혼이라고?”
“아버지, 제 말을 먼저 들어주세요.”
달그락, 대공은 거칠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차갑게 말했다.
“제정신이 있는 게냐? 이혼이라고? 게다가 황궁을 나온 지 이틀 만에 정부를 들여?”
“정부를 들이면 안 됩니까? 황제 폐하께서도 정부를 들였습니다. 그리고 이혼을 못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너는 황후다. 그럼 황후답게 자리를 지켰어야지! 이혼이라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으면….”
수도에서는 페르소나가 내게 이혼을 통보한 것으로 퍼져있었다. 황제의 정부를 시기 질투를 해서, 그에 질린 페르소나가 이혼을 하자고 제안했다는 것. 대공은 그렇게 전해들은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내가 이혼을 제안했다고 말해도 대공이 화를 내지 않을까? 나를 이해해 줄까?
“황후답게요? 황후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로젤리아!”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할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나를 황후답게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사람이니까. 하지만 아버지가 하는 말은 생각했던 것과 그대로 일치했고,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아버지라면 이해할 줄 알았는데. 아주 조금이라도 이해할 줄 알았는데.
“온실 속의 화초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왜 참아야 하죠? 제 사람 하나 지키지 못하는 게 황후입니까? 저는 왜 항상 상냥하고 친절해야 합니까? 아버지가 그 말하는 황후는, 남편의 정부에게까지 상냥해야 하는 건가요? 아뇨. 저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만큼은 그래도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공의 얼굴이 점점 분노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페르소나는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릴리는 이해했다. 그러니 아버지도 이해 해줄 거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물론 아버지의 입장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가넷 가문은 레이몬드 제국이 칭제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황후를 배출한 가문이었다. 게다가 나는 완벽한 황후라고 불렸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내가 이혼을 했으니까…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아버지만큼은….
한참의 침묵 후, 나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
“….”
“아이를 가졌었습니다.”
그 순간 루벨라이트 대공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충격을 받은 건지 의자 팔걸이를 쥔 손이 떨리는 게 보였다.
“황제가 정부를 들인 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저는 그곳에서 정부를 괴롭히려 한다는 헛소문과 수근거림을 당했습니다.”
“….”
“그 황후란 게 별로 대단한 게 없더군요. 황후. 허울뿐인 황후. 그러니 정부뿐만 아니라 저에게도 독을 먹였겠죠.”
“….”
“독 때문에 아이가 죽었습니다. 제 아이, 록사나가요. 그런데요, 아버지. 황제는 제가 임신한 사실도 몰랐습니다. 저도 독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곁에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보시기에 제가 어디가 황후라는 거죠?”
주먹을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칼라일은 어느새 고개를 든 채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걱정스러워하는 눈빛을 칼라일이 아닌 아버지에게서 받고 싶었다.
“그래서 이혼했습니다. 잘못되었습니까, 그게?”
“….”
“저는 소문처럼 시기하지도 않았고, 황제에게 이혼 통보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혼을 선언한 사람은 저니까요.”
나는 조용히 루벨라이트 대공을 응시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내 예상대로 그가 전해들은 것은 이혼과 정부에 관한 것, 그것도 수도에 퍼진 헛소문들이었는지 상당히 심란한 표정이었다.
나는 말없이 칼라일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 미안해요.”
“미안할 필요 없습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대공 각하께서 부르신다길래….”
칼라일은 조심스레 내 손을 쓸어내렸다. 주먹을 꽉 쥔 탓에 살갗 위로 선명한 손톱자국이 찍혀있었다. 게다가 찻잔이 깨지면서 생긴 상처에는 어느새 피딱지가 맺혀있었다. 칼라일은 눈을 크게 뜬 채 자신의 옷소매로 상처를 압박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상처가 아니었다.
“저는 이혼을 무르지 않을 생각입니다. 다시 그 끔찍한 곳으로 돌아가라고 하신다면, 네. 이혼을 무르고 기꺼이 돌아가겠습니다. 하지만 저를 볼 생각은 하지 마셔야 할 겁니다.”
“….”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토해낼 감정도 다 토해냈고, 더 이상의 할 말도 없었다. 이 분위기를 버티기에는 정신적 소모가 너무 컸다. 칼라일의 부축을 받은 채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문이 닫히기 직전, 대공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알아차려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그 순간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솟구쳤다. 대공을 마주할 때는 밉고 원망스러운 감정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어쩐지 안도감이 들어, 집무실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저, 로젤리아님. 괜찮으세요?”
“미안해요. 나 때문에, 아버지께서 혹시 심한 말을 하신 건….”
“아니에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어요.”
칼라일은 내 팔을 조심스럽게 잡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나를 부축했다. 내 팔을 쥔 손이 금방이라도 깨질 유리를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칼라일을 올려다보았다. 정말로 아버지가 아무 말도 안 하셨어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칼라일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저를 정부로 들였다는 소문 때문에 부르신 것 같아요.”
“아, 사과했어야 했는데 못 했네요.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아닙니다. 저도 흐릿하지만 기억이 남아있어요. 저를 구해주시려고 일부러 그렇게 말씀하신 거죠?”
내 사과에 칼라일은 손을 저어가며 괜찮다고 말했다. 칼라일은 나를 방 안까지 부축해주면서 내가 침대에 앉자마자 내게 손을 건넸다.
“괜찮다면 제가 상처를 봐 드려도 될까요?”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내 손에 있는 상처를 조심스레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키가 참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서 보니 키가 참 컸다. 고개를 좀 높이 들어야 할 정도. 페르소나보다 한 뼘 정도 조금 더 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칼라일은 내 손을 살피고 피를 닦아내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혔다.
“칼라일?”
“그렇게 올려다보시면 목이 아프실 겁니다. 제가 무릎을 굽히겠습니다.”
“아,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냥, 키가 많이 큰 것 같아서…기분 나빴나요?”
“그럴 리가요, 제가 속한 헬리오도르 가문 사람들은 모두 평균보다 키가 컸습니다.”
“신기하네요.”
그의 입에서 헬리오도르 가문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말끝을 흐렸다. 헬리오도르 가문이면 샤를로테와 관련이 있을까? 샤를로테의 약혼자 가문이니까 뭔가 연관성이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또다시 그에 대해서 묻자니 괴로워하며 눈물을 떨어트리던 모습이 생각나, 쉽사리 물을 수가 없었다. 헬리오도르 가문 문양으로 추정되는 것에 대해 조사하기를 지시하기도 했지만….
“칼라일. 혹시 사흘 전에 했던 샤를로테의 약혼자라는 말, 그리고 13황녀…그 이야기를 마저 들을 수 있을까요?”
“아….”
“가능하다면 좀 더 자세하게 듣고 싶은데요.”
그래도 듣고 싶었다. 내가 진지한 어투로 부탁하자 칼라일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내가 그 부탁을 하기를 기다린 것처럼 보였다. 칼라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물었다.
“혹시 이곳에 메마른 땅이나, 정원 같은 곳이 있을까요?”
***
가넷 대공저의 저택 뒤에는 넓은 정원이 있었다. 어릴 적에 심은 복사꽃 나무 한 그루와 장미나무는 덤불이 가득해 봄이 되면 정원을 붉게 물들였다. 시종들은 그곳을 흔히 붉은 정원이라고 불렀다. 나는 칼라일을 데리고 정원으로 들어가는 철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정원이 형태를 드러냈다. 잘 관리된 잔디와 아직은 꽃이 필 시기가 아닌 탓에 휑한 가지들과 덤불. 그래도 정원은 나름 훌륭했다.
나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린 채 복사꽃 나무 아래쪽으로 다가갔다.
“복사꽃이군요.”
“맞아요. 지금은 꽃이 피지 않는 시기라 가지밖에 없지만요.”
나무 아래에 깔린 잔디 위에 앉자, 칼라일은 조심스레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칼라일은 바닥의 잔디를 손으로 쓸었다. 풀냄새가 싱그러웠다. 로젤리아는 나무에 몸을 기대며 바람에 흔들리는 수풀들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정원을 스치고 가는 소리, 황후가 되고 나서부터 무척이나 그리웠던 소리였다.
“헬리오도르 가문은 조금 특별했습니다.”
칼라일은 조용히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로젤리아님, 혹시 가넷 가문의 주 가업이 무엇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무역과 정치. 그리고 저희 가문은 레이몬드 제국 칭제 이후 지금껏 대대로 황후를 배출하는 가문이었습니다.”
“저희도 비슷하지만 그대의 가문과는 많이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가요?”
“저희 가문은 남자든 여자든 혼인 적정 시기가 되면 안케도니아 황실과 혼인 서약을 맺습니다.”
“다른 가문과는?”
“오로지 안케도니아 황실만, 서약을 맺습니다. 그래서 그 제국에 있을 때는 황실과 비슷한 대우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유가 있었죠, 오로지 황실과만 서약을 맺은 이유가요.”
칼라일은 빙긋이 웃으며 나무를 툭툭 두들겼다. 그러자 눈앞으로 무언가 살랑거리며 떨어졌다. 치마 위에 꽃잎이 떨어져 있었다. 머리 위로 가벼운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꽃잎이었다. 어디서 꽃잎이? 아직 꽃이 필 시기가 아닌데.
그 순간 잔잔하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그러자 복사꽃 나무가 흔들리면서 풍성한 꽃잎들이 공중으로 흩날리기 시작했다.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던 나무에는 어느샌가 복사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있었다.
“저희 헬리오도르 가문은 마법사 가문입니다.”
“마법사?”
칼라일은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고 펼치더니 커다란 복사꽃 봉오리 하나를 올려놓았다.
“저는 몸이 상당히 약했습니다. 마력이 너무 강해서 몸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죠. 몸이 약하면 마력이 강해도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버겁습니다. 몸에 부담이 가니까요. 그래서 저는 마법사로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한번 마법을 쓰면 쓰러지는 탓에 대부분을 집에서 보냈죠.”
“쓰러진다고요?”
“네. 그래서 사흘 동안 깨어나지 못했던 겁니다.”
사흘…설마 그럼 열이 나고 계속 쓰러져 있던 게 그 때문이었나?
“그래서 가문 사람들은 차라리 저를 빨리 결혼시키자면서…황실에서 가장 계승권이 낮은 제13 황녀와 약혼을 맺었습니다.”
“……그럼 그 13황녀가.”
“네, 맞습니다.”
칼라일은 반지 자국이 흐릿하게 남은 약지 손가락을 매만졌다.
“저는 샤를로테 안케도니아와 약혼을 맺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