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후폐하의 이혼사유-9화 (9/170)

#9화, 샤를로테의 약혼자

안케도니아 제국에서 왔다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약혼자라니?

지금껏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얼굴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이 남자가, 샤를로테의 약혼자라고…?

약혼자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아니, 애초에 약혼자가 맞는 건가?

만약 약혼자가 맞다면, 샤를로테는 왜 그런 반응을 보인 거지?

약혼자라면서, 왜 위협을 했다는 거짓말을 한 걸까. 왜 페르소나에게 사랑한다면서 달라붙었지? 약혼자가 이렇게 버젓이 있는데? 결국 그녀는 임시 황후지만 어찌되었든 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그럼 약혼자는?

순식간에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그런 침묵이 방을 가득 메웠다.

그 순간 샤를로테가 왜 그렇게까지 당황하고 말도 안 되는 말들을 내뱉었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약혼자니까 당황한 거구나. 기껏 황후의 자리에 올랐는데, 약혼자가 있으니까. 칼라일이 ‘제가 샤를로테의 약혼자입니다’라고 말하면 안 되는 거니까. 그리고….

“지금.”

“….”

“샤를로테가 안케도니아 제국의 13황녀라고…했나요?”

그건 잘못 들었겠지. 샤를로테는 스스로가 안케도니아 제국의 1황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라고? 13황녀라니?

“샤를로테는 1황녀입니다. 본인 입으로 1황녀라고 말했어요. 샤를로테가 13황녀일 리가 없습니다.”

“샤를로테는 13황녀가 맞습니다.”

샤를로테가 1황녀가 아니면 뭐지? 1황녀라면서 정부인 동시에 황녀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그녀가 13황녀라고?

그러고 보니 왜 1황녀라는 걸 바로 믿었지? 그래도 제국의 황녀인데, 한번쯤 사실을 의심해 볼 수 있지 않았나? 나는 왜 그때 바로 믿었지? 그래, 샤를로테가 1황녀인 것을 밝히고 나서 이틀을 내리 앓았던 것 때문에 그랬다.

“…그대가 정말 샤를로테의 약혼자가 맞습니까?”

“사진, 사진을…가지고 있습니다.”

“사진?”

그는 목에 걸고 있는 은색 팬던트를 내게 건넸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팬던트 안에는 작은 사진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칼라일과 똑같이 생긴 어린 여자아이의 사진과... 샤를로테의 사진. 샤를로테의 옆에는 칼라일이 함께 찍혀있었다.

나는 말없이 팬던트를 꽉 쥐었다.

“왜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해주는 건가요?”

왜 나한테 이런 사실을 먼저 말해준 거지? 물론 샤를로테의 관계를 물으려고 한 건 맞았다. 하지만 몸이 아프니까 나중에 물을 생각이었지만, 보통 이런 사실을 남에게 함부로 말해주나? 내가 샤를로테를 싫어한다고 말해서? 내가 목숨을 구해줘서?

칼라일이 망설이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뭔가를 얘기하고 싶은 게 있는 것처럼 보여서 그의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제가….”

그리고 그 순간 칼라일의 몸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빠르게 다가가 쓰러진 칼라일을 부축하는데 깜짝 놀랄 정도의 뜨거운 열이 느껴졌다. 열이 높아졌다. 황급히 칼라일을 눕히고 이마에 손을 댔다. 뜨거웠다. 미열이 아니었다.

“칼라일. 칼라일, 내 말 들려요?”

몸이 불덩이였다. 자세히 보니 얼굴이 붉었다. 멍이 잔뜩 있던 탓에 상처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열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로젤리아님. 서류를 가져왔어요. 이거 오늘 전부 결제해주셔야….”

릴리는 품 안 가득 서류를 들고 오다 숨이 힘겹게 내쉬는 칼라일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남자 갑자기 왜이래요? 열이 심한데요.”

“나도 모르겠어.”

나는 침대 위에 흩어진 약을 모아 칼라일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 샤를로테에 대한 이야기 때문에 정신이 팔려 미처 그의 상태를 살피지 못했다. 정신을 잃은 건지 약을 삼키지 못했다. 약 한 알을 종이 위에서 잘게 가루 형태로 빻은 다음에 물에 섞었다.

약을 섞은 물을 먹이자마자 효능이 바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십분 정도 지나자 호흡이 점차 안정되었다.

“로젤리아님, 괜찮으세요?”

“아…괜찮단다.”

“괜찮다고 하기에는 얼굴이 너무 창백하신데요.”

나는 얼굴을 더듬으며 칼라일이 내게 건넸던 펜던트를 다시 집어 들었다.

내 얼굴이 창백한 건 칼라일이 해준 이야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그 말이 사실인지 잘 모르겠다. 만약 그 말이 정말이라면…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샤를로테는 1황녀라면서 지금껏 자존심을 내세웠고, 안케도니아 제국을 입에 담은 내 사람들을 내쫓았는데.

‘아무리 정부라지만 그래도 역시 1황녀라서 그런가, 뭔가가 다르네. 안 그래? 황후 폐하께서 저렇게 시기하시는데도 꾹 참고 웃는 얼굴로 대하시잖아?’

주먹을 너무 꽉 쥔 탓에 손톱이 살갗으로 파고들었다. 1황녀가 아니라면, 이렇게 버젓이 약혼자가 있는 너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로젤리아님.”

“….”

“로젤리아님!”

“아. 미안하구나. 잠시 뭐 좀 생각하느라….”

릴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보았다. 나는 애써 미소 지었다. 칼라일이 말한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나 혼자서 알아보면 되는 일이었다.

팬던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데 문득 펜던트 위에 그려진 문양이 보였다. 칼라일 헬리오도르라고 했지, 그럼 이건 헬리오도르 가문의 문양인가?

나는 펜을 들고 그 문양을 종이 위에 똑같이 따라 그렸다.

“릴리, 혹시 이 문양에 대해서 조사해줄 수 있니?”

“네? 조사야 할 수는 있지만…이게 뭔데요?”

“알아오면 그때 얘기해주마.”

칼라일이 쓰러져서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듣지 못했다. 나한테 샤를로테에 대한 얘기를 해준 이유가 뭘까.

대충 둘러댈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약혼자인 것을 밝히고, 샤를로테가 13황녀라는 것까지 밝혔다면 무슨 이유가 있을 텐데.

팬던트를 그의 옆에 두었다.

칼라일은 그 뒤로 사흘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앓았다.

***

“조사는 하지 않기로 했소. 기사도 걱정하지 마시오. 황후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손을 쓸테니.”

나는 말없이 찻잔을 들며 꽤나 불만스러워 보이는 페르소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칼라일이 샤를로테를 위협했다는 것은 샤를로테의 착각으로, 조용히 덮기로 했다. 페르소나는 내가 제출한 의사소견서를 책상 위에 던지듯 올려두었다. 온몸에 상처가 가득하고, 복부에 검에 찔린 상처가 있는 사람이 샤를로테를 공격할리 없다. 나는 그렇게 주장했고, 페르소나는 마지못해 내 주장을 받아들였다,

“보통 이런 일에 잘 안 나서지 않았나?”

“네?”

“왜 이렇게 열정적으로 그놈의 무죄를 밝혀내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군. 정부라서 그런 건가?”

“무죄를 밝혀내려는 게 아니라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려 애쓰는 겁니다.”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반박해오자 페르소나는 책상을 쾅 내려쳤다. 내려놓았던 찻잔이 흔들리다 책상 위로 엎어졌다. 찻잔 안의 차가 책상 위로 쏟아져 향긋한 차향이 코밑을 간지럽혔다.

“왜 그렇게 화가 나셨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소매를 걷고 쏟아진 찻잔을 다시 세웠다.

“볼 일이 다 끝났으니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어딜 가겠다는 거지?”

“집으로요.”

“그 정부 옆으로?”

“제가 정부의 옆으로 가든, 어딜 가든 폐하께서 무슨 상관이신지 모르겠네요.”

페르소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점점 더 험악하게 변했다. 가려고 해도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집무실을 나서자마자 기사들을 시켜 다시 앉게 만들겠다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혼하자마자 정부? 그건 좀 심한 거 아니오?”

“갑자기 정부를 들이신 폐하도 심하셨다는 생각은 안 드세요?”

“그건…!”

“이혼한다고 나간 지 이틀 만에 정부를 들인 저나, 폐하나.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아, 비슷한 건 아니군요. 그래도 저는 이혼을 앞둔 상태에서 들였지만 폐하께서는 본처가 버젓이 있으면서도 정부를 들이셨으면서….”

“그만. 그 입 좀 다무시오, 제발!”

페르소나는 내 말을 잘라내고는 버럭 소리쳤다. 화가 난 건지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입 좀 다물라고? 사실 소리 지르고 싶은 걸 겨우 버티고 있었다. 혀를 꽉 물어가며 어떻게든 입꼬리를 올리려 애를 쓰는데. 뭐? 입 좀 다물라고? 안 그래도 샤를로테 때문에 기분이 좋지도 않은데….

들고 있던 찻잔을 세게 내려놓았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찻잔이 깨졌다. 유리 조각이 뺨을 스치고 손가락을 스쳤다. 조각이 스치고 간 자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페르소나는 다급하게 내 손을 감싸 쥐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는 눈빛으로 내 손을 꽉 쥔 채 손수건으로 상처를 압박했다. 그래도 꽤나 깊게 베인 건지 핏방울이 책상 위로 툭툭 떨어졌다. 이윽고 뺨에서도 피가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페르소나의 손을 쳐냈다.

내 손을 감싼 손수건이, 내가 준 것이 아닌 샤를로테의 것이었다.

물론 내가 선물해준다는 것을 사용해달라는 건 아니었지만 기분이 나빴다. 분명 서로 사랑을 속삭이며 주고받았을 그 손수건으로 내 손을 감싸고 걱정한다는 게.

나는 상처를 꾹 누르며 차가운 목소리로 통보하듯 말했다.

“신관들이 이혼 서류에 사인을 해주셔야 이혼 재판을 준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오래 끄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폐하께서도 저를 사랑하지도 않고, 저도 더 이상 폐하에게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서류에 사인을 해주세요.”

***

아침부터 페르소나를 상대하니 피곤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페르소나와 샤를로테를 함께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샤를로테까지 상대했다면, 아마 칼라일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을 테고, 그럼 화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페르소나 앞에서 감정을 잘 절제한 것은 아니지만…나는 여전히 피가 흐르는 손을 더 압박하며 릴리가 아닌 다른 시녀를 불렀다.

릴리가 본다면 역시 자신도 따라가야 했었다면서 걱정을 할 테니까.

나는 침대 위에 앉아 손을 감싸고 있던 손수건을 천천히 떼어냈다. 상처가 생각보다 많이 심했다. 깊게 베였던 탓에 손수건을 떼자마자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때 저 멀리서 릴리가 뛰어왔다. 분명 릴리 말고 다른 시녀를 불렀는데?

나는 손을 뒤로 감추었다. 손가락이 욱신거렸지만 겨우 참았다.

“로젤리아님, 큰일 났어요…!”

릴리는 숨을 몰아쉬며 집무실 쪽을 가리켰다.

“릴리, 진정하렴. 무슨 일 있니?”

“네…그, 칼라일이….”

“칼라일이? 칼라일이 깨어났어요?”

사흘 간 누워만 있더니 드디어 깨어난 건가?

그런데 깨어난 게 왜?

설마 깨어났는데 신체 어딘가가 망가졌거나, 기억을 잃기라도 한 건가?

“지금 대공 각하께서 칼라일을 집무실로 부르셨어요.”

“대공 각하? 각하께서는 지금 타국으로 무역 협정을 위해 타국으로 가셨잖아.”

대공 각하, 아버지. 그 순간 서늘한 감각이 등 뒤로 흘러내렸다.

“아버지께서 돌아오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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