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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폐하의 이혼사유-8화 (8/170)

#8화, 칼라일 헬리오도르

대공저로 돌아왔을 때는 의사가 이미 남자의 치료를 끝마친 상태였다.

피 묻은 드레스를 보고 비명을 지르는 시녀를 위해 씻고 옷을 먼저 갈아입었다. 유명 의상실에서 맞춘 흰색 드레스는 이미 붉게 물들어있었다. 시녀들은 어디서 칼싸움이라도 하고 온 것이냐고 물었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릴리는 내 머리카락을 정성껏 빗어주며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늘여놓기 시작했다.

“의사가 말하길 복부뿐만 아니라 전신에 칼자국과 상처가 많다고 했어요. 전신에 있는 상처는 생긴 지 이틀 정도 되어있었고, 복부에 있는 상처는 찔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고 했어요. 단검에 아주 깊숙이 찔린 것 같다고 하던데요.”

“잠깐, 온몸에 상처가 있었다고? 이틀 정도 된 상처가?”

“네. 살아있는 게 신기하다고 했어요.”

그런 몸 상태에서 샤를로테를 찌르려 위협했다고?

칼라일이라는 남자의 상태가 나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심각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역시 샤를로테가 거짓말을 한 게 맞았다.

“깨어나기는 했어? 그, 칼라일 헬리오도르라는 사람.”

“네, 아까 깨어나기는 했어요.”

대화를 나눠봐야겠다는 생각에 귀빈들을 위해 준비한 방으로 이동했다. 릴리에게 따로 남자가 머물 방을 준비하라고 일러두려던 순간 방문 근처에 한가득 몰려있는 하녀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방문 틈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왜 저렇게 몰려있지?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문제가 있기는 있죠.”

“무슨 문제?”

“그, 좀.”

“?”

“잘생겼어요. 좀 많이, 어…좀 놀랄 정도로요.”

남자에게 관심이라고는 전혀 없던 릴리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정말 잘생겼다는 건데, 하녀들을 물리고 방으로 들어가자 새하얀 침대에 누워있는 칼라일이 보였다. 시트 위에 길게 늘어뜨린 금빛 머리카락이 창문 틈새로 들어온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침대에 가까이 다가가니 정말 릴리의 말대로 놀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가 보였다.

“깨어났다고 하지 않았나?”

“다시 잠들었나 본데요. 깨어났을 때 좀 힘겨워하며 깨어나기는 했어요. 몇 번 정신을 잃기도 반복했고요.”

“그래?”

나는 목에 든 멍과 살짝 풀어진 셔츠 사이로 보이는 상처들을 보며 침대 끝에 조심히 앉았다. 입술이 말라붙어 있었다. 식은땀이 이마 위로 흐르고 있었다. 나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주다가 손톱이 반쯤 뜯어진 손을 조심히 쓸었다.

내 드레스 자락을 잡고 도와 달라 부탁하던 그 상황이 머릿속으로 다시 스쳤다.

샤를로테가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그러고 보니 칼라일을 보는 샤를로테의 눈이 공포로 가득했다. 그건 확실했다. 그리고 칼라일이 기사들에 의해 체포되기 바로 직전 지었던 그 웃음을 다시 생각해보면, 비웃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샤를로테는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아.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당황스러워하고 뭔가 어수선해 보였지. 뭔가 죄지은 사람 마냥….’

게다가 샤를로테는 칼라일이라는 이름과, 성도 알고 있었다.

“로젤리아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

“왜…이 남자를 정부라고 한 거예요? 정부 아니잖아요.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갑자기 정부라니….”

릴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칼라일을 마차에 태워 보낼 때 릴리의 얼굴이 유난히도 경직되어 있었다. 그게 내가 한 거짓말 때문이었구나.

“왜 그런 거짓말을 하신 거예요?”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황제 폐하께서 이 사람을 체포해가려고 할 때, 샤를로테가 웃고 있었다.”

“네? 웃고 있었다고요?”

“그리고 네가 떠난 후에 샤를로테가 내게 이렇게 말했단다. ‘자기 정부라면서 저 남자의 이름이 칼라일 헬리오도르인 건 모르잖아요,’라고.”

내 말을 심각한 얼굴로 듣던 릴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샤를로테는 이 남자 이름은 칼라일인 걸 어떻게 알았데요?”

“그러니까. 내 말이 그거란다. 그리고 이것도 순전히 감이지만, 이 남자, 칼라일이 이렇게 다친 게 어쩐지 샤를로테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그래서 그런 거짓말을 한 거란다.”

순전히 동정심이었다. 동정심 때문에 한 충동적인 행동이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만약 그대로 체포되게 두었다면 내 마음이 더 찜찜했을 테니까.

“로젤리아님이 하시는 선택은 언제나 이성적이시니까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아요. 다만 제 걱정은 안 쓰는 방을 깨끗하게 치우고 침대를 들여놔야 한다는 점이에요. 가뜩이나 신문소 매매 때문에 지금 당장 처리해야 할 서류도 많은데 그걸 언제 다 치우고 새로 꾸며요!”

“화내지 말고, 릴리. 케이크 사줄 테니까.”

“케이크에 홍차까지 사주셔야 해요. 말 나온 김에 서류 가져올게요.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릴리가 씩씩 서류를 가지러 가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침대가 크게 출렁였다. 몸이 잠시 휘청거렸다. 뒤를 돌아보니 칼라일이 한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일어났군요, 몸은 어때요, 좀 괜찮은…가…요…?”

잇새 사이로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처가 아물지 않았으니 일어나지 말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손가락 틈 사이로 마주친 형형한 은빛 눈동자에 숨을 삼켰다. 마주친 눈동자는 어쩐지 냉기가 흘러나오는 다이아몬드 같았다. 하지만 이내 냉기는 녹아 사라지듯 없어졌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변했다.

차갑게 노려보던 눈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따뜻한 은빛만이 남았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칼라일은 빠르게 예법을 갖추며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제, 제국의 달,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곧바로 예법을 갖추는 걸 보니 평민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손짓이나 그의 말투에서 귀족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겨왔다. 적어도 평민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노예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렇다면 정말 귀족인가? 귀족은 무슨 이유로 그렇게 심하게 다치고 이상한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던 거지? 보통 귀족은 돌아다닐 때 호위 기사들을 데리고 가는 경우가 대부분일 텐데.

“저는 황후 폐하가 아닙니다. 예를 거둬주시죠.”

“네? 하지만 아까 기사들이...제가 잘못 들은 건가요?”

기사들이 나를 황후 폐하라고 부르던 것을 들은 건가. 나는 살짝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을 정정했다.

“황후 폐하가 맞기는 맞습니다. 정확하게는 전 황후 폐하이지만요.”

“아. 제가 실례를 범 했군요, 죄송합니 윽….”

상처가 아픈 건지 칼라일은 복부를 손으로 꾹 누르며 몸을 숙였다. 얼굴이 통증으로 얼룩져 있었다. 칼라일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몸 상태가 안 좋다더니, 내 생각보다 훨씬 안 좋은 것 같았다.

의사가 두고 간 진통제에 손을 뻗는데 문득 칼라일에게서 샤를로테가 자주 쓰는 향수 향이 느껴졌다. 싱그러운 민트 향기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나는 진통제가 담긴 약병을 그의 손에 쥐어주며 조용히 말했다.

“배에 있는 상처, 왜 생겼는지 말해줄 수 있나요? 의사는 단검에 깊이 찔린 상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온몸에 멍과 생채기가 많다고 했고요. 어쩌다 다친 건가요?”

“….”

“혹시 함께 온 일행과 떨어졌나요? 그래서 사고를 당했고?”

칼라일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흔들렸다.

하지만 곧 시선을 살짝 내린 채 울지도, 웃지도 않는 표정을 지었다.

낯빛이 더 안 좋아졌다.

“제대로 말해줘야 합니다. 칼라일, 당신은 몸이 다 낫자마자 황실에서 조사를 받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네, 조사, 라니요? 무슨 조사를 말씀하시는 건지….”

“혹시 현재 임시 황후인 샤를로테 황후 폐하를 위협했나요?”

칼라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어디서 왔는지 그런 것들을 정확하게 말해줘야 합니다.”

“…제가 샤를로테를 위협했다고요?”

“일단 폐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샤를로테의 이름을 부르는 게 꽤나 익숙한 듯 보였다.

“위협….”

“….”

“위협이라니….”

샤를로테의 이야기가 나온 이상 가장 궁금했던 내용을 물을 생각이었다. 샤를로테와 무슨 관계이길래, 그녀가 그렇게 당황스러워하고 제대로 대처조차 못 했는지. 그의 입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건 고통스러워하는 신음뿐이었다. 약병이 든 약들이 침대 위로 쏟아졌다.

칼라일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져 갔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원망으로 인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위협이라고…누가, 위협을 했는데….”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심장 부근을 꾹 눌렀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샤를로테 때문인가? 내가 샤를로테의 이야기를 꺼내서? 뭔가 괴로운 기억에 의해 짓눌린 것처럼 보였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입니다. 일단 쉬고 나중에….”

“정말 샤를로테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제가 위협을 했다고요?”

칼라일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내게 되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샤를로테에 대한 원망이 한가득 묻어있었다. 내가 대답 대신 침묵을 유지하자 칼라일은 아까보다 훨씬 더 괴로워하는 어투로 물었다.

“그리고…샤를로테가 정말 황후의 자리에 올랐습니까?”

“비록 지금은 임시 황후지만, 곧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겠죠.”

“하….”

그 순간 실소를 터트리는 칼라일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 두 방울 흐르던 눈물은 점점 많아졌다.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 때문인지 심장이 욱신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칼라일을 계속 동정하고 있던 탓인지 울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샤를로테와의 관계를 묻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놀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황후 시절, 샤를로테로 인해 생긴 소문들이 너무 괴로워 홀로 이불을 끌어안은 채 울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숨 쉬어요.”

“….”

“날 봐요, 진정하고. 진정하기 어렵다는 건 알겠지만, 일단 숨을 고르게 쉬어요.”

나도 모르게 울고 있는 그의 눈가를 쓸었다.

그때 그의 시선이 내 손가락에 닿았다. 정확히는 그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내 손으로. 그리고 다시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대가 샤를로테 황후를 위협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사받는 것을 도와줄게요. 그러니 일단 진정해요.”

숨소리가 점점 고르게 변했다. 칼라일은 힘겹게 숨을 내쉬며 내 손을 감싸 쥐었다. 살갗 위로 느껴지는 온기에 놀라 손을 빼려고 했지만, 그의 손이 너무 떨리고 있었다. 경직된 몸에 힘을 풀고, 칼라일이 진정할 때까지 손을 빼지 않았다.

“진정했나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가 붉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물어보세요.”

“저를 왜…도와주신 거죠?”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목소리였다. 하긴, 샤를로테의 말만 듣는다면 칼라일은 제국의 황후를 위협했고, 온몸에 출처가 불분명한 상처가 있는, 도와주더라도 꺼림직 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긴 했다.

“보통 몸에 그런 상처가 가득한 상황에서 누구를 위협하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죠.”

“!”

“그리고 나는 샤를로테를 싫어해요. 궁금한 게 풀렸다면 손을 놔줄 수 있나요?”

칼라일은 내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건지 귀 끝을 살짝 붉히며 내 손을 놔주었다.

“묻고 싶은 게 더 있지만 상태가 호전될 때까지는 뒤로 미뤄두도록 하죠. 편하게 쉬어요.”

그가 내 손을 잡았을 때 살갗 위로 느껴지는 온기가 어쩐지 뜨겁게 느껴졌다. 미열이 있는 건가. 나는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사가 해열제도 함께 처방해 줬을지 떠올리며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고 했다.

“저, 저는.”

“?”

“안케도니아 제국에서 왔습니다.”

그가 다시 내 팔목을 잡았다. 아프지 않게 지그시 누르듯 힘을 주면서.

안케도니아 제국에서 왔다는 것은, 샤를로테와 같은 제국 출신일 텐데.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대답 없이 칼라일을 바라보았다. 계속 말하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저는….”

“….”

“샤를로테, 안케도니아 제국 제13 황녀의 약혼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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