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루레드 신문소
내가 뿌리친 그의 손이 허공에 머물렀다.
한때 그 손을 잡고 평생 함께 걸어가리라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나만 했었던 걸까. 심장이 욱신거렸다. 페르소나는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가 내린 후에야 나는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편하게 쉴 수 있었다.
페르소나가 잡았던 손목 부분을 천천히 쓸었다. 돌아오라고 하면 미안하다고 돌아올 줄 알았던 건가. 기분이 나빠 먼지가 묻은 것처럼 탁탁 털어내는데 호위기사 시벨이 마차 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폐하, 저택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루레드 신문소로 모실까요?”
기껏 차려입었던 새하얀 드레스에는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머리도 조금 헝클어있었다. 겉옷을 입는다고 하더라도 드레스가 헝클어진 건 그대로 보일 텐데. 나는 손수건을 꺼내 피를 닦아내다가 시벨에게 넌지시 물었다.
“너도 들었겠지, 황후 폐하께서 나에게 ‘년’이라는 모욕적인 호칭을 사용한 것을.”
“…네. 들었습니다.”
“내일 아침에 황후 폐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까, 아니면 여전히 나에 대한 이야기가 기사가 나올까?”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시벨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덤덤하게 말했다.
“폐하, 아니. 로젤리아님의 정부에 관한 이야기가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올 것 같습니다.”
직설적인 그의 대답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시벨의 말이 맞았다. 분명 내가 샤를로테에게 모욕적인 말을 들은 건 나오지 않고, 내 정부가 된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제국민들 사이에 뿌려질 가능성이 컸다.
이혼한 황후, 이혼한 지 며칠만한 정부를 들인…그런 기사가 나오게 놔둘 수는 없었다.
내가 먼저 막아야 했다.
“네 말이 맞다. 저택 말고 루레드 신문소로 가자.”
***
덜컹이는 마차 속, 페르소나는 말없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젤리아가 내 손을 쳐냈다. 쓰레기 치우듯 뿌리쳤다. 아주 잠깐이라도 망설이는 태도를 보일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니었다. 매번 나를 따스하게 내려다보던 붉은색 눈동자가 날카로웠다. 서늘한 붉은빛에 심장이 욱신거렸다.
이혼을 선언하고 돌아서던 로젤리아, 처음에는 그저 장난인 줄 알았다. 잠시 마음이 변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샤를로테를 앉혀둔 거였다. 물론 로젤리아의 말대로 일부러 보란 듯이 샤를로테를 앉혀둔 것도 있었다.
하지만 황후의 자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그녀니까, 자존심 강한 로젤리아였으니까,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부라고?
로젤리아에게 정부가 생겼다고?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젤리아는 계속해서 그 놈의 편을 들고, 정부라고 말했다. 정말 정부일까? 주변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당당하게 정부라고 하는 걸 보면, 정말 정부인 것 같은데….
이혼을 선언하자마자 정부를 들인다는 게 말이나 되는 건가?
“폐하. 에스펠라 고아원에 도착했습니다.”
“…그래. 곧 내리도록 하겠다.”
마차 밖으로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 너머로 기사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아이들도 몇 명 보였다. 아이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페르소나는 고아원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을 보자마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페르소나는 마차에서 내려 고아원을 찬찬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후원을 받은 덕분인지 시설이나 아이들이 입고 있는 옷, 나오는 식사나 간식의 질이 한층 좋아졌다.
그때 아이들이 다섯 명 정도가 우르르 몰려와 페르소나의 주위를 둘러쌌다. 에스펠라 고아원은 종종 몇 번 둘러보러 왔기 때문에 아이들 중 몇 명은 페르소나를 알아보기도 했다. 고아원에 소속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라는 말은 까먹지 않게 가르친 지,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면서도 언제나 ‘폐하!’라는 칭호를 꼬박꼬박 사용했다.
기사들이 아이들을 떨어트리려 했지만 페르소나는 오히려 아이들 중 가장 어린 아이 한명을 안아들었다.
후원을 하기 전에는 하나같이 빼빼 말라있었는데 이제는 하나같이 포동포동하게 변했다.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폐하, 레이는 오늘 무릎 콩, 했는데 울지 않고 씩씩하게 일어났어요!”
“루이는 오늘 채소 안 남기고 다 먹었어요!”
“폐하, 저도 안아주세요!”
페르소나의 등장에 고아원은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아이들이 점점 페르소나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때 품에 안겨있던 아이는 페르소나를 빤히 바라보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폐하, 황후 폐하는요? 황후 폐하는 같이 안 오셨어요?”
아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은 이혼이 무슨 뜻인지, 황제와 황후 간의 이혼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알지 못했다. 페르소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뭐라고 설명해줘야 할지도 의문이었고 또다시 로젤리아가 떠올랐다. 로젤리아가 스스로 자신의 정부라 칭하던 그놈도.
인상이 자꾸 찌푸려지는 탓에 억지로 웃는 낯을 지어보였다.
***
신문소로 들어가는 내내 시벨을 비롯한 다른 기사들은 계속 내 눈치를 보았다. 그 반응을 통해 아침에 나온 그 적나라하고 자극적인 기사를 읽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걱정되느냐?”
“솔직히 말하자면 걱정됩니다.”
“어째서?”
“이곳으로 오는 내내 얼마나 많은 시선들이 오고갔는지, 로젤리아님께서는 모르십니다.”
“너희가 내게 바치는 충성과 걱정은 언제나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뿐이란다. 나는 괜찮아. 괜찮을 수밖에 없지.”
참으로 고마우면서도 걱정이 많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혼을 앞둔 전 황후라고 해서 숨거나 따가운 시선들을 피할 생각은 없었다. 조용히 저택에서 머물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끔찍하고 잔인한 악행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소문처럼 샤를로테를 악독하게 괴롭힌 것도 아니었다. 내가 다른 이들을 의식할 필요는 없었다.
신문소에 들어서자마자 모든 기자들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가 빠르게 흩어졌다. 루레드 신문소는 온갖 자극적인 것들을 기사로 찍어내는 곳이었다. 릴리가 화가 나 모조리 불태워버린 그 신문도 루레드 신문소에서 찍어낸 것이었다.
때마침 신문소의 책임자로 보이는 남자가 신문소로 들어오다 나를 보고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화, 황후 폐하, 아니. 어….”
“기사는 잘 읽었습니다. 정말 재밌게 잘 쓰셨더군요.”
얼어붙은 채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기사들에게 신호하자 시벨이 천천히 검을 꺼내기 시작했다. 칼날이 날카롭게 빛나자, 남자는 뒷걸음질 치며 급하게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그저 승인을 내린 거라고, 승인 내리기 전 검열을 하는 총책임자는 따로 있다고. 보통 책임자는 신문소를 통찰하는 일을 할 뿐이라고. 남자가 가리킨 곳에는 꽤나 익숙한 얼굴은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루레드 남작?’
나를 보고도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은 루레드 남작이었다.
매 파티나, 무도회 때마다 보았던 남작이었다.
문득 이혼하기 전 샤를로테의 생일파티가 떠올랐다. 필요이상으로 성대하게 열었던 파티에서 보았던 남작의 여식 루비 루레드 영애가 머릿속을 스쳤다.
그녀는 데뷔탕트를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영애들과 빠르게 친분을 쌓았고, 그녀가 사교계에서 들려주던 이야기는 모든 이들의 흥미를 끌어당겼다.
루비 영애가 이야기로 사람을 홀리는 기술은 모두 그녀의 아버지인 루레드 남작에게 배운 것이었다. 정보를 수집하고, 그 정보로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당기며 돈을 받고 팔기까지가 루레드 가문의 가업이자 무기였다.
‘그 무기를 나한테 향했다는 것은….’
“아, 이게 누구십니까. 황후 폐하 아니십니까! 아, 이제는 전 황후신가? 아이고, 아니지. 아니지. 아직은 황후인건가? 현재 자리가 임시로 정해진 것이니!”
명백한 조롱이었다.
시벨과 기사들은 하나같이 내가 신호를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빼들 것 같은 기세로 남작을 노려보았지만, 굳이 그럴 필요 없었다.
“전 황후라, 지금 제게 전 황후라고 하신 건가요?”
“곧 전 황후가 될 거 아니십니까? 아닌가요? 그 신분도 모르는 정부에게 자리를 뺏기게 생겼으니! 아하하! ”
배를 부여잡고 웃는 모습이 우스웠다. 나도 모르게 피식, 가벼운 웃음을 내뱉었다. 그러자 루레드 남작은 자신이 비웃으려던 상대에게 도리어 비웃음 받았다는 사실에 얼굴을 구겨진 종이처럼 일그러트리기 시작했다.
우스웠다.
루레드 남작이 저렇게 나오는 이유는 하나였다.
가넷 가문에서도 루레드 가문에게서 정보를 제공받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갑의 위치는 언제나 가넷 가문이었다. 가넷 가문의 작위가 더 높은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내가 황후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이제 황후가 아닌 이혼한 전 황후가 되자, 뒷배가 사라졌다고 생각한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보통 이혼한 여성은 가문에서 내쳐지거나, 쓸모없는 취급을 받으니…그런 모욕적인 기사를 마음껏 퍼낸 것도 그 때문인 게 분명했다.
“역시나. 밑바닥에서부터 아등바등 올라온 것들은 천성부터가 천박하구나.”
“뭐, 뭐라고? 이 년이, 지금…!”
“하, 년이라. 오늘따라 모욕스러운 말을 많이 듣는군.”
제국 내에서 이혼한 여성이 가문에서 내쳐지거나 버려지는 건 아주 흔한 일었다. 사교계에서도 버려지고, 가령 심한 경우는 성을 빼앗긴 채 쫓겨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가문에서 버려지지도, 내쳐지지도 않았다. 설령 그렇더라도 나는 여전히 대공가의 여식이었다.
“참으로 신기하네. 아무리 내가 이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네 놈보다 더 신분이 높을 텐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꾸 이러는 걸까….”
내가 한숨을 쉬자 기사들의 검이 곧바로 루레드 남작을 목을 향했다. 칼날에는 살갗 사이로 피가 맺혀있었다. 기사들은 어서 명령을 내리라는 표정으로, 살기어린 눈동자로 루레드 남작을 노려보았다.
남작은 그제야 자신이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인지, 여유롭던 얼굴이 점점 공포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제, 제게 이러시면 안 될 텐데요?”
“내게 안 되는 일이 있을 것 같나?”
“제가, 정부의 시, 신분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걸 퍼트린다면 명예에 금이 갈 텐데요, 상관없으십니까?”
끝까지 발악이라니. 내가 그걸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멍청했다. 너무 멍청해서 가엾을 정도였다.
내가 남작에게 다가가 기사들은 여전히 검을 겨눈 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루레드 남작은 승리의 웃음을 짓고 있었다. 협박이 통했다는 기고만장한 표정이 일그러질 것을 생각하니 아주 잠깐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를로테는 멸망한 제국의 황녀지.”
나는 남작의 귓가에 속삭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
“내게 협박이 통할 거라고 생각했나? 샤를로테의 신분이 왜 제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까, 황실 쪽에서 먼저 막은 거라는 생각이 안 들었나보지? 그걸 퍼트리면 분명 나도 타격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너는 어떻게 될까?
“그, 그걸…일부러 말하지 않았다고?”
“그래. 너무 멍청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군. 그러니 내가 친히, 너만 모르는 사실을 알려주겠다.”
‘너만 모르는 사실’이라는 말에 루레드 남작은 눈을 부릅떴다. 정보로 먹고 살아온 사람에게 모르는 사실이란 치명적이었으니까.
“귀족들이 정말 네 정보가 유용하다고 생각했을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지금껏 꽃처럼 지내서 뭘 모르나본데, 당장 오늘만 해도 귀족 서넛이 내게서 정보를 사갔습니다!”
“무슨 정보? 어떤 백작의 사생아? 후작부인의 하렘? 자작의 불륜?”
남작은 여전히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