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후폐하의 이혼사유-6화 (6/170)

#6화, 끝까지 이기적인 사람.

나는 남자를 꽈악 끌어안았다. 거짓말인 걸 드러나지 않도록 무표정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정부,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정부였다. 너무 충동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정부라고 말한 덕분인지 기사들이 주춤거리며 검을 내리기 시작했다.

기사들 사이로 주먹을 꽉 쥐고 있는 페르소나와 눈이 마주쳤다. 녹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정부라고? 이 자가?”

“그렇습니다. 제, 정부입니다, 제가 잠시 무엇을 사오라고 부탁했는데, 그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졌군요.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하! 황후. 지금 이 자를 감싸주려는 것이오?”

“제 정부를 정부라고 부르는 게 잘못되었습니까?”

페르소나의 눈에서 의심을 읽어낼 수 있었다. 믿지 않는 게 분명했다.

“확실하지도 않은데 이렇게 다친 사람을 데려가 조사를 하시겠다고요? 조사는 치료를 다 끝낸 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자가 샤를로테를 위협했다고요? 이렇게 다친 상태에서 누군가를 위협하는 게 폐하께서는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사이 피 냄새는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페르소나는 바닥에 뿌려진 붉은 피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대로 치료도 하지 않고 방치해 둔다면 죽는다는 걸 그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도 하나둘 웅성대기 시작했다.

“저러다 저 사람 죽는 거 아니야?”

”누가 의사 좀 불러와 봐.

페르소나는 말없이 손을 들었다. 기사를 물리라는 암묵적인 신호였다. 나는 조용히 안도했다. 릴리는 기사들이 뒤로 물러나자 빠르게 다가와 남자의 상처를 옷으로 꾹 눌렀다.

“로젤리아님. 일단 저택으로 데려가겠습니다.”

“그래, 나는 나중에 따로 돌아가겠다.”

남자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지만 미약하게나마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기사들과 릴리가 남자를 다른 마차에 태울 때까지 긴장을 풀지 않았다. 혹여나 다시 잡으라고 명령할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이번에는 페르소나가 아닌 샤를로테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배를 감싸 쥔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년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년? 지금 나보고 년이라고 한 거야?

어이가 없었다. 페르소나도 눈을 크게 뜬 채 이게 무슨 짓이냐는 눈빛으로 샤를로테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샤를로테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당황하자 더 기고만장한 태도를 보였다.

“제가 있던 자리가 그리도 높은 자리였나 보군요. 자리에서 내려오자마자 ‘년’이라는 소리를 다 듣고.”

“이제 내가 황후인데 너한테 예의도, 존칭도 갖출 필요는 없지. 그렇지 않은가?”

“그럼 그 천박한 말투를 먼저 고쳤어야죠.”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임시 황후로 책봉되었다지만 완전히 이혼을 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리고 저렇게 당당하게 ‘년’이라고 부른다? 그것도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그때, 네 머리카락이 아니라 목을 쳤어야 했는데. 작게 중얼거리듯 말하자 샤를로테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샤를로테는 씩씩거리며 내게 다가와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뺨이라도 내려칠 생각이었던 건지, 그녀의 손이 내 뺨에 닿기 직전, 페르소나가 샤를로테의 팔을 꽉 비틀어 쥐었다.

“폐, 폐하?”

“아무리 너를 임시 황후로 임명했다지만 이렇게 처신도 모르고 날뛰어? 주위를 보는 눈이라는 건 없나? 이게 지금 무슨 짓이냐!”

“폐하, 저년이 먼저!”

“단어 선택을 제대로 못 하겠느냐, 어디서 그런 천박한 단어들만 배워온 거지? 붙여둔 선생님들이 그렇게 가르쳐 준 건가?”

“어, 어찌 그런 말씀을…….”

페르소나는 샤를로테의 말을 마저 다 듣지 않은 채 거칠게 팔을 놓았다. 그녀의 새하얀 피부 위로 손 모양의 붉은 자국이 생겨났다. 샤를로테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마치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처럼 보였다.

샤를로테의 고운 얼굴을 구겼다. 이 상황이 모두 나 때문이라는 것처럼, 나를 원망하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억울하고 분할까?

여기서 가장 억울해야 하는 건 샤를로테가 아닌 나 같은데.

“제게 사과하세요, 황후 폐하.”

“뭐? 내가 왜 네게 사과를 해야 하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시겠습니까? 윗사람이라고 아랫사람에게 함부로 ‘년’이라는 모욕적인 호칭을 사용하시다니요. 폐하께서는 예법을 다시 익히셔야겠습니다. 어서 사과하세요.”

“사과 못하시겠다면 저도 똑같이 되돌려드리겠습니다. 이 천박한 년.”

샤를로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페르소나의 눈치를 보느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나는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쥔 채 분노로 번들거리는 금빛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년이라고 부르는 건 단지 내 기분이 나쁘고 안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황후의 입에서 ‘년’이라니. 봐, 주변 사람들이 벌써 힐끗거리고 너에 대해 수군거리잖아. 충고라도 줄까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페르소나도 이 상황이 달갑지 않은 듯했다.

남자를 태운 마차가 저택으로 향하자, 나도 몸을 돌렸다.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더 이상의 가쉽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폐, 폐하, 저렇게 보내실 건가요?”

“…붙잡아야 할 이유도 없다. 이 일은 명백하게 네 잘못이니까.”

“하지만 먼저 거짓말을 한 건 저 여자에요! 폐하 앞에서 표정도 안 바뀌고 거짓말을 했다고요!”

내가 아까 그 남자를 정부라고 한 걸 말하는 건가?

“네 정부의 이름이 뭐지?”

“제가 그걸 왜 말씀드려야 하죠?”

“뭐야, 대답 못 하는 거야? 보세요, 폐하! 자신의 정부라면서 정부의 이름이 '칼라일 헬리오도르'라고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칼라일 헬리오도르? 이 남자의 이름이 칼라일인가?

나는 무표정을 쭉 유지한 채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샤를로테의 얼굴을 본 순간 화가 끓었다. 그 오만한 얼굴을 짓밟아주고 싶었다. 저 남자도 너로 인해 저렇게 심하게 다친 거겠지. 네 비웃음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네가 또 다른 누군가를 다치게 했다고.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 이 남자가 내 정부라고.

“죄송하지만, 황후 폐하.”

저 남자의 이름도, 무엇 하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저는 정부의 풀네임을 말한 적이 없는데, 황후폐하께서는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시죠?”

샤를로테의 얼굴이 아주 천천히, 새파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길 위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샤를로테에게 몰려들었다. 샤를로테는 좀 더 세게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어깨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샤를로테는 떨며 배를 감싸 쥐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이 한 말실수를 어떻게 되돌려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샤를로테, 저 자를 알고 있나?”

“아, 그게…그, 아까 저 자가 저를 칼로 찌르려고 했을 때! 그때 자신의 이름이 칼라일 헬리오도르라고 밝혔습니다! 그래서 알고 있는 거에요!”

샤를로테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샤를로테는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는 건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대충 수습하려고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어내려는 모습이 우스웠다.

나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려야 했다. 의도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렇군요. 칼라일이 황후 폐하를 찌르려 했고, 이름을 밝혔다는 말이죠? 폐하께 검을 겨누면서 ‘나는 칼라일 헬리오도르다, 너를 찌를 것이다!’ 이렇게 말했나요?”

“….”

“뭐,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제 정부 칼라일은 남을 함부로 찌르거나 위협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칼라일의 몸이 다 나은 뒤에 제대로 조사에 참여하도록 하겠습니다.”

샤를로테가 크게 비틀거리자, 황실의 기사들이 그녀를 부축했다. 창백한 안색이 다른 사람 눈에는 가련해보일지 몰라도 나는 아니었다. 페르소나도 당연히 샤를로테를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눴으면 하는데.”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샤를로테를 끌어안는 대신 내 팔을 잡았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저는 폐하와 나눌 말이 없습니다.”

“아주 잠깐이면 된다. 그래도 안 되겠나?”

“이야기를 나눌 장소도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따로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합니다.”

“할 일? 정부한테 가는 거? 가서 간호라도 해주려는 건가?”

페르소나의 얼굴은 점점 화가 난 사람처럼 변했다. 내 팔을 움켜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뿌리친다고 해서 쉽게 놓아줄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내가 타고 온 마차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페르소나는 잡고 있던 내 팔을 놓아주었다.

“새 마차와 마부를 구해 샤를로테를 먼저 황궁으로 보내거라.”

“그럼 폐하께서는 나중에 오시는 겁니까?”

“나는 업무를 다 끝내고 돌아가도록 하겠다.”

황궁에서는 그렇게 서로 그렇게 좋아죽더니, 페르소나 몰래 비소를 흘리며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문이 닫히자마자 지독한 침묵이 나와 페르소나를 감쌌다. 그의 얼굴은 착잡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그의 입이 열릴 때까지 가만히 앉아있었다. 결국 긴 침묵을 가르고 먼저 입을 연 건 페르소나였다.

“에스펠라 고아원.”

“네? 그 장기 후원제도를 받고 있는 고아원 말씀이십니까?”

“오늘 샤를로테와 수도로 나온 건 그 고아원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네, 잘하셨습니다. 오늘 황후 폐하와 함께 수도에 나온 이유가 그 때문이셨군요.”

“…그대는 ‘황후’라는 단어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는 건가?”

부채에 달린 깃털을 만지던 손이 우뚝 멈췄다.

황후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다니? 부채를 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황후가 되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걸 포기해 왔는데 그런 소리를 해?

“저는 의미를 두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저는 폐하와 함께 이끌어나갈 제국을 꿈꿨고, 그 누구보다 완벽한 황후가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면서 샤를로테에게는 그리도 쉽게 황후라는 호칭을 붙이는 건가?”

“폐하께서 샤를로테가 완벽한 황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뭐?”

“제가 황후 폐하께 붙인 호칭은 폐하의 사랑을 받는 황후를 의미한 것일 뿐, 제국민을 보듬어주고 생각하는 그런 황후를 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무슨 얘기를 하려나 싶었다. 물론 좋게 끝낼 얘기가 아니라고 짐작하기는 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기껏 불러내서 하는 말이 저런 거라니.

“하실 말씀이 그게 다라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황후.”

“로젤리아라고 부르세요, 폐하.”

“황후, 내가…잘못했소. 그러니 이제 그만하고 돌아오시오.”

짜증스러움이 가득 담긴 어투였다. 이번에는 내 팔을 잡은 손을 차갑게 뿌리쳤다. 내가 뿌리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꽤나 놀란 눈치였다.

“싫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제가 돌아오시길 원했다면 샤를로테를 황후의 자리에 두지 않았을 겁니다.”

갑자기 공석이 되어버린 황후 자리, 그 자리에 샤를로테를 앉힌 것은 그녀가 안케도니아의 1황녀였기 때문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페르소나에게는 다른 형제자매는 없었다. 즉 황후의 자리를 대신할 만한 황족이 없었다. 다른 귀족의 영애를 들이자니 선별 방식도 복잡했고 황후의 교육도 최소 5년이었다.

하지만 샤를로테는 1황녀였다.

멸망한 안케도니아의 황실은 유독 남아선호가 강한 제국이었던 탓에 황녀는 정치에 관한 직책을 일절 맡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공식 선상이나 외교적인 일에도 황녀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 적도, 얼굴을 비춘 적도 없었다.

하지만 1황녀는 황태자와 비슷한 교육을 받았다. 혹시나 하는 상황, 전쟁. 여러 가지 사유로 인해 황위 계승권을 가진 자가 사망할시, 1황녀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러니 나를 제외하고 정치 이론을 익힌 여성은 샤를로테 한 명뿐이었을 테니까. 게다가 정부였고. 이해한다. 하지만 페르소나가 순수하게 그런 이유로 샤를로테를 임시 황후로 둔 걸까?

“폐하께서 정말 제가 돌아오기를 원했다면, 그 자리를 그대로 남겨두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셨죠. 보란 듯이 샤를로테를 임시 황후의 자리에 두었습니다. 그런데도 돌아오라고요? 처음부터 끝까지 이기적이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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