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어떻게 네가 나에게.
“모욕이라고…?”
릴리가, 샤를로테에게? 릴리는 지금껏 내 곁에서 떠나지를 않았는데.
“제가 문밖에서 똑똑히 들었습니다! 저에게 멸망한 제국의 황녀라고 한 것을!”
‘멸망한 제국 출신의 황녀, 그 여자! 샤를로테!’
샤를로테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릴리가 했던 말이 겹쳐왔다. 나를 위해 욕해주겠다며 했던 말 중에서 샤를로테의 출신에 대해 욕하는 말이 있었다.
원래 이름은 샤를로테 안케도니아였다. 샤를로테가 황궁에 오게 된 이유는 마차사고 때문이었다. 황궁으로 돌아가는 페르소나의 마차에 부딪히면서 머리를 다쳤다. 마부가 제대로 앞을 보지 않은 탓에 일어난 일이라 황궁으로 데려와 치료를 했다.
처음에는 평민 여성이라고 생각했다. 외향이 특이했지만 단지 옅은 머리카락을 가졌을 뿐이라며 넘겼다. 하지만 페르소나의 정부가 된 날, 샤를로테는 본인이 안케도니아 제국의 1황녀라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안케도니아가 멸망한 제국이라는 등의 말은 꺼내면 안 되는 말이 되었다.
안케도니아 제국은 2년 전 타국에 의해 멸망하고 무너진 제국이었다. 안케도니아 황실은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황실이었다. 멸망한 제국 출신의 황녀는 보통 노예가 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릴리가 말한 ‘멸망한 제국 출신의 황녀’라는 말은 노예가 되었어야 할 패전국의 황족, 그런 식의 욕이었다.
‘그래, 그럴 수 있어.’
충분히 모욕적으로 느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분명 목욕을 하고 나와서 옷을 갈아입을 때 하던 말이었다. 머리를 말리고 환복하는데 적어도 20분은 걸렸다. 그때 한 말인데, 그걸……어떻게 들은 거지? 도대체 언제부터 문 앞에 서있었던 거야?
“이야기를 엿들은 건가?”
“그,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왜 중요하지 않다는 건지 정말 모르겠군. 그래, 네 말대로 내 시녀가 그런 말을 한 건 잘못한 일이 맞다. 내 시녀가 잘못한 일이니, 원한다면 직접 교육을 한 내가 너에게 사과를 하겠다.”
차가운 음성으로 쏘아붙이듯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무례하게 나를 밀치고 내 사람에게 함부로 손을 들어 상처를 입힌 건? 그게 어찌 중요하지 않다는 거지?”
함부로 남을 헐뜯는 건 분명 잘못된 일이었다. 나도 할 말은 없지, 옆에서 말리지 않고 함께 웃었으니까. 하지만 샤를로테 또한 잘못한 건 맞았다. 정부씩이나 되면서 시녀의 잘못을 처벌로 다스린다? 그것도 직접 손을 들어서? 샤를로테의 얼굴은 점점 더 붉어지다 못해 펑, 하고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분이 풀리지 않는 건지 씩씩거리며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어째서 저한테만 그러시는 겁니까?”
“뭘 너에게만 그랬다는 거지?”
“저 시녀는 저의 성과 이름을 욕보였어요! 샤를로테 안케도니아라는 이름을요! 잘못은 저 시녀가 먼저 했잖아요!”
눈물을 펑펑 흘리며 복도가 울리도록 소리쳤다. 그 소란에, 복도 끝에서 기사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한밤중에 도대체 무슨 소란이야. 머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샤를로테님, 일단 돌아가시죠.”
“아뇨, 저는 사과 받을 때까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릴리가 겨우 풀어준 기분이 또다시 저 밑으로 추락했다. 기사들은 샤를로테를 말리려 노력했지만 그녀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계속 나를 노려보았다.
“그래, 샤를로테. 예법 교육을 시작한 지, 몇 달이 지났지?”
“…두, 두 달 정도에요.”
“따로 선생님을 붙인 게 두 달, 내가 처음에 가르친 것이 한 달. 그럼 시간이 꽤 지난 것으로 아는데.”
총 세 달 정도 지났지. 그동안 교사도 많이 바뀌었고.
“예법이란 것이 있지. 레이몬드 제국에서, 황궁에서 본인이 안케도니아 황녀다, 멸망한 제국 출신의 황녀라는 말이 충분히 모욕적인 건 알지만 무엇을 바라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군. 혹시 황녀 대우를 해주기라도 바라는 건가? 하지만 네가 이 황궁에서, 정부가 된 순간 말하지 않았나?”
페르소나의 품에 안긴 채 작은 꽃다발을 끌어안는 샤를로테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필 머리카락처럼 은빛의 보석이 가득 박힌 드레스를 입고 있던 터라 마치 신부처럼 보였다.
“‘저는 폐하의 정부가 될 수 있어서 행복해요’라고.”
마냥 곱게만 느껴졌던 얼굴이 지금은 보기 좋게 일그러져 있었다. 샤를로테는 주먹을 꽉 쥔 채, 제 분노에 못 이겨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케도니아 황실의 이름이 나왔으니 계속 말하지. 안케도니아가 신분제를 중요시하는 제국이라는 말은 들었다. 그 제국의 황녀였던 것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제 이 제국의, 레이몬드 황실의 정부가 되었으면 그에 따른 법도에 맞춰 행동해야지. 아무리 시녀가 잘못하더라도 절대 폭력으로 다스리지 않는다.”
금빛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아까 릴리의 뺨을 쳤던 것처럼 당장이라도 나를 칠 듯했다.
멸망한 제국 출신의 황녀라는 역린을 계속 건드린 탓인지 내 말을 전혀 듣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도저히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차라리 울면서 페르소나에게 뛰어갔으면 했다. 계속 말싸움만 오고갈 것 같았다. 기사들도 갑작스러운 소란에 당황스러워 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릴리의 뺨이 계속 부어오르고 있었다.
기사들이 알아서 방으로 데려다주겠지 하면서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날카로운 외마디 하나가, 등 뒤로 날아와 박혔다.
“황후폐하도 단지 이름만 황후시잖아요?”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기사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덩달아 릴리도 샤를로테를 미친 여자 보듯 바라보았다. 뭔가 잘못 들은 것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이름뿐인 황후라고?
“폐하께서는 그저 일만 하시는 이름뿐인 황후시잖아요. 저는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지만 황후 폐하는 합방 일조차 제대로 챙기지 않으시잖아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충격을 받아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왜 샤를로테와 이렇게 대화하고 있는지,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왜 릴리의 잘못을 왜 대신 사과를 하려 했는지, 그런 생각들이 모조리, 깨끗하게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온몸이 떨렸고, 화가 치솟았다. 분명 잘못은 우리 쪽이 먼저 했다. 그렇기에 샤를로테의 억지스러운 말들과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모두 들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이 말은 철저히 샤를로테의 잘못이었다.
적어도 내 앞에서는 하면 안 되는 말이었다. 다른 사람은 다 말해도, 너만큼은….
“내가 이름뿐인 황후라, 그래. 그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말해볼까?”
릴리가 내 팔을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피가 거꾸로 뒤집혀지는 기분이었다. 그간 눌러왔던 것들이 온몸에 있는 구멍으로 새어나오는 듯했다. 머리가 차갑게 식어갔다. 어차피 이제 이혼을 할 텐데. 굳이 참을 필요가 있을까.
“네가 아직도 황녀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해? 아니, 너는 더 이상 황녀가 아니야.”
“저는 샤를로테 안케도니아입니다. 안케도니아의 제 1황녀라고요!”
“이 황궁에서 모두들 너를 사랑해. 아껴주고, 보살펴주지. 그게 왜일 것 같아? 네가 정부라서 그렇다. 이 황궁에서 과연 누가 너를 샤를로테 안케도니아라고 불러줄까.”
당장이라도 목을 비틀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뒷걸음질을 하던 샤를로테는 등이 벽에 닿자 도망치려 했지만 내 손이 더 빨랐다. 샤를로테의 가느다란 손목을 목 대신 꽉 움켜쥐었다.
“너는 샤를로테 안케도니아가 아니야, 너는 그저 멸망한 제국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노예로 팔려갈 뻔했지만 간신히 도망쳐 내 남편에게 붙은 정부일 뿐이라고.”
“저는!”
“그 입 다물어, 샤를로테.”
움켜쥔 부분이 아까 넘어지면서 부딪힌 부분인지 샤를로테가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을 들은 기사들은 나를 제지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샤를로테의 말은 누가 들어도 충분히 도를 넘은 상태였고, 기사들의 눈에 비친 나는 상대를 찢어죽일 듯한 눈빛을 띄우고 있었다.
“안케도니아는 이제 없어. 네 말대로 나는 황제의 사랑은 하나 못 받고 일만 한다. 하지만 여전히 나를 존경하고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있고, 내 이름과 성이 있어. 로젤리아 가넷. 그것이 내 본명이지. 하지만 너는?”
안색이 창백해지다 못해 이내 새파랗게 변한 샤를로테를 보며, 슬며시 비소를 흘렸다.
“그에 비해 너는 제대로 된 이름 하나로도 못 불리지. 안케도니아도, 레이몬드도 아닌 이름으로 말이야.”
새하얀 손목에 붉은 손자국이 남았다. 손목을 놔주자 샤를로테는 통증 어린 신음을 내뱉었다.
“그래, 나는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너는 레이몬드의 성을 붙이지 못해, 더불어 잘난 네 모국, 이제는 없어진 안케도니아의 성도 붙이지도 못해. 참으로 가엾구나.”
***
“릴리, 받거라.”
“폐하, 이건 이혼 서류 아닌가요?”
“아침이 되면 이걸 곧장 신전에 가져가 주렴. 내 이름을 대면 빠르게 들어갈 수 있을 거야.”
이혼 서류를 손에 쥔 릴리의 눈동자에 죄책감 비슷한 것이 스쳤다.
“폐하, 저 때문에…죄송해요.”
“네가 사과할 것이 아니다. 네 잘못이 아니니 자책하지 말 거라.”
릴리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 오기까지 릴리가 무슨 잘못을 얼마나 크게 했는가. 잘못한 건, 페르소나와 샤를로테였다. 가슴 안쪽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따가웠다. 내가 아끼는 시녀인 릴리가 다쳤고, 이 지경이 되게 만든 페르소나와 샤를로테가 죽도록 원망스러웠다.
시종들이 하는 소문을 들으면, 내가 샤를로테를 괴롭혔다고 말한다.
내가 그녀를 괴롭혔다 말한 건 모두 조언을 준 것들이었다. 한편으로는 싫어했고, 또 황궁에 잘 적응했으면 하는 마음에 일부러 시간을 내어 예법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황제의 정부이니 엄하게 가르쳤다. 아이 같고 철이 없어서 서적을 선물하고 업무를 가르쳤지만 샤를로테는 자꾸만 어려워서 못하겠다며 손을 놓았다. 그래도 나름 인내심을 갖고 샤를로테를 상대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내 행동이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된 거라 말했다.
“황후 폐하, 괜찮으세요?”
“아아, 괜찮다. 너도 놀랐을 텐데…뺨은 괜찮니?”
“네. 긁힌 것 빼고는 괜찮아요.”
샤를로테는 분명 페르소나에게 모든 일을 일러바칠게 분명했다. 릴리에게도 처분이 내려지겠지. 샤를로테가 뺨을 때린 것은 또다시 허공으로 사라지고 험담을 한 릴리만 소문 속에서 둥둥 떠다닐 게 눈에 선했다.
그럼 차라리 릴리를 먼저 내보내고, 황궁에서 나오자는 생각만이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기사들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릴리의 목덜미를 쥐고 복도로 내던졌다. 뺨에 붙었던 거즈가 떨어졌다. 핏방울이 바닥을 적셨다.
“지금 이게 무슨 짓들이냐!”
“황제 폐하께서 지금 당장 릴리 마그렛트를 황궁에서 내쫓으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또다시 샤를로테로 인해 이 모든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내쫓으라니, 그것도 릴리를? 분명 릴리가 나의 전속시녀이자 여동생 같은 존재임을 알 텐데도 그런 명령을 내렸다고? 릴리가 내게 어떤 존재인지를 알면서…!
기사들이 나를 제지했다. 릴리의 팔을 잡고 강제적으로 일으켜 끌고 나가려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꾹꾹 눌러왔던 게 입 밖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멈추거라.”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하지만 몇몇 기사만이 멈출 뿐 나머지는 그대로 무시하고 릴리에게 어서 걸으라며 강압적으로 대하고 있었다.
“멈추라고 하지 않았느냐!”
나를 제지하던 기사 중 한 명이 릴리가 제대로 걷지 않자 검을 빼들었다. 근위대장이 그 기사를 저지하며 검을 집어넣으라 말했다. 하지만 릴리에게 뻗은 검은 기사가 아닌 내 손에 들려있었다. 한발을 바닥에 붙인 채 팔을 휘둘렀다. 릴리의 팔을 잡은 기사 중 한 명의 뺨을 순식간에 베어버렸다.
“내 말이 우스운가?”
내 검에 베인 기사는 자신 뺨을 더듬었다. 칼날이 스쳐지나간 자리에 피가 맺혀 있었다.
나는 검을 꽉 쥔 채 비소를 흘렸다.
“지금 내가 멈추라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