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정말 잘 맞는 두 사람.
정말 둘이 잘 만났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쩜 말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이렇게나 똑같은지. 치가 떨릴 정도였다. 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그의 손을 쓰레기 치우듯 털어냈다. 식사 시간이 아닌 좀 더 공적인 자리에서 말했어야 했었나.
“말도 안 되는 말이라. 그래도 폐하와 함께 일 해온 지 8년인데, 아직도 절 모르십니까?”
“…아이를 잃은 충격이 너무 컸나 보군. 아직도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순간의 감정에 휩쓸리지 마시오, 황후. 지금 황후가 하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 알고는 있소?”
“충격 따위가 아닙니다. 폐하. 저는 아이를 잃은 순간부터 이 말을 준비해왔거든요.”
아이를 잃은 날로부터 못해도 네 달 정도. 자그마치 네 달을 준비했다. 시녀인 릴리를 시켜 대공저에 내 물건을 하나 둘 옮겨두고, 그에게 이혼을 말하자마자 곧바로 황궁을 빠져나오기 위해 연락만 넣으면 곧바로 나를 데리러 올 마부와 마차까지 준비했다. 심지어 이미 내 사인이 적혀있는 이혼 서류까지.
그 서류는 책상 안쪽에 있었다. 이렇게 모든 준비를 끝냈는데 순간의 감정에 휩쓸리지 말라니? 그가 내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흘려들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
“황궁의를 따로 붙여주겠소. 정신적 치료도 받아보고, 유산으로 망가진 몸도 치료하도록 하시오.”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두고 돌아섰다. 정신 쪽으로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한 건지 그가 나가자마자 몇 분 만에 황실에서 가장 실력이 있다고 불리는 황궁의가 침실로 찾아왔다. 돌아가라 해도 돌아가지 않았다.
그날 밤, 나를 따라다니는 근위기사의 수가 늘어났다.
페르소나를 찾아갔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따로 찾아가겠다’라는 말 뿐이었다.
만나려고 해도 만날 수가 없었다.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
내가 치료를 거부하자 황궁의는 거의 무릎을 꿇을 것처럼 행동했다. 치료 받기를 권했다.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할 때마다 페르소나가 호통이라도 치는 것인지 내 건강을 체크하는 궁의들의 뒷모습이 꽤 불쌍해보였다.
하지만 치료는 됐고, 그저 황제에게 보낼 이혼서류와 밖에 나가서 어떻게 지내야 할지를 홀로 조용히 생각하고 싶었다. 겨우 시녀들과 기사들을 물리고 릴리만이 곁에 남았을 때, 그나마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릴리.”
“….”
“릴리, 아까 표정 참 대단했어. 기사들이 그렇게 겁을 먹은 건 처음 봤단다.”
릴리 마가렛트는 황후로 즉위하기 전부터 곁에 두었던 전속시녀였다. 내가 아이를 가지고, 또 잃고, 이혼을 준비하는 내내 내 옆을 지키던 유일한 사람이자, 나를 대신해 페르소나의 욕을 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릴리는 나와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서류 정리나, 산책이나, 일을 할 때나, 차를 마실 때나 등등. 심지어 목욕할 때조차도 릴리는 다른 하녀들을 모두 물리고 직접 내 목욕수발을 들겠다며 자처했다, 바로 지금처럼.
“릴리, 그래도 대답은 해주겠니?”
“…네, 황후 폐하.”
하루 종일 페르소나를 찾아가랴, 식사시간 때 있었던 일들에 관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느라, 기사들을 물리느라 몸이 피곤했다. 말린 장미가 가득 뿌려진 물에 몸을 눕히고 있던 로젤리아는 눈을 감은 채 조심스레 릴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까만 머리카락이 부드러웠다. 원래는 이렇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아이처럼 웃었는데……오늘따라 유독 울상이었다.
“황후 폐하.”
“응?”
“제가 내내 생각해 봤는데요….”
“무엇을?”
“진짜…황제폐하만큼 쓰레기인 남자는 없을 거예요.”
릴리가 소곤거리면서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들어본 적 없는 욕설에 나도 모르게 주위를 살폈다. 목욕실은 침실 안에 있던 터라 나와 릴리를 제외하고는 들을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릴리는 정말 주위를 살피게 만들 정도로 거친 욕을 내뱉고 있었다. 하루 종일 우울하고 화나 보이던 이유가 속으로 페르소나의 욕 하고 있어서였나.
“그냥 이혼 서류를 냅다 던져버리고 나와요.”
“그럴까?”
“네!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그날 이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으셨다면서요! 이혼하자는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시고. 황후 폐하를 정신적 이상이 있는 사람 취급하시다니. 미안하지 않으신 게 틀림없어요. 정말 미안했다면 와서 무릎이라도 꿇었겠죠.”
“릴리, 일단 진정하고.”
“그래서 제가 이혼은 회의시간에 말하자고 말씀드렸잖아요! 식사시간 때 밝히는 건 너무 약했어요.”
“이혼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라는 걸 알잖니. 가문에게 갈 피해도 생각해야지. 이미 소문에 시달리고 시달렸어. 공과 사도 구분 못하는 황후라는 소리, 듣고 싶지 않아.”
목 바로 위까지 물에 몸을 담그자 릴리는 젖은 수건을 두 손에 꽉 움켜쥔 채 빼액, 하고 소리를 질렀다.
“진짜, 진짜…볼 게 얼굴밖에 없는 놈!”
“매번 이렇게 나대신 욕을 해주니까 너무 좋구나.”
“저는 황후폐하의 전속시녀잖아요. 황후폐하의 일을 도와드리는 게 제 일에요. 그리고….”
말끝을 흐리며 얼굴을 붉혀가며 소리를 지르던 릴리는 울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내 눈치를 보던 릴리는 내 몸에 붙은 장미 꽃잎을 하나씩 떼어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는 황후폐하가 아이를 가졌을 때, 잃었을 때의 모습을 모두 봐왔으니까요. 이렇게 무덤덤하게 있지만, 슬프시잖아요. 당장이라도 이 황궁을 나가고 싶으시잖아요. 폐하를 모셔온 지 십몇 년입니다. 제가 그걸 모를까요.”
보송보송한 수건을 펼쳐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냈다. 릴리의 말이 맞았다. 사실은 당장이라도 이혼 서류를 페르소나의 얼굴에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황후이자 영향력 있는 대공가의 여식이었다. 내 행동은 내가 그간 쌓아올린 황후의 이미지에 큰 흠집을 내지만, 그와 동시에 지금껏 황후를 배출시킨 가넷 가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만약 나만 피해를 보았다면, 회의실을 박차고 들어가 그에게 이혼 서류를 던졌겠지. 집무실에 있는 걸 뻔히 알면서 발걸음을 돌리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향해 수군거리는 이들을 벌했을 것이며, 짐을 싸들고 황궁을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내 행동으로 인해 내 가문과 나를 따라다니는 릴리마저 욕을 먹고 있으니까.
답답하지만 티를 내지 못했다. 작은 감정의 표출조차 내게는 흠이 되어 돌아올 테니.
“그래서 제가 대신 욕해드리는 거예요…남편 구실 못하는 황제랑, 멸망한 제국 출신의 황녀, 그 여자! 샤를로테!”
심각한 얼굴로 외치던 릴리는 이내 물에 젖은 강아지처럼 두 발을 동동 굴렸다. 그래도 릴리가 옆에 있어줘서 겨우 버티고 있었다. 릴리마저 옆에 없었다면 정말 정신에 이상이 생겼을 지도 모르지.
“그렇네. 내가 릴리의 의도를 몰라주었구나. 고마워서 어쩌지?”
“그럼 소원 들어주세요!”
“소원? 그래, 무슨 소원을 들어줄까?”
희미하게 웃어보이자, 릴리는 하루 종일 굳어 있던 얼굴을 풀고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방긋, 거리며 웃었다. 그런 릴리의 모습에 마음이 한결 풀리는 듯한 시원한 느낌을 받았다.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말에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욕실에서 나와 갑갑한 드레스를 벗고 입기 편한 드레스로 갈아입기를 마치자 릴리는 조심스레 내 한쪽 팔을 끌어안았다.
주변을 살피는 듯하더니 조심스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는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웃었다.
“저랑 산책 가주시면 안 되나요? 황실 정원에 가득 피었는데……황후 폐하랑 같이 보려고 일부러 안 갔단 말이에요.”
“그게 소원이니? 나는 갖고 싶은 것을 물은 건데.”
“황후 폐하와 보내는 둘만의 시간! 그게 제 소원이에요!”
등불을 손에 꼭 쥐는 모습이 귀여웠다. 소원이 나와 함께 밤산책을 가는 거라니. 누가 보면 예의 없다며 지적할 일이었지만 꼭 꼬리 흔드는 강아지 같아서 마냥 귀엽기만 했다. 릴리는 폴짝폴짝 뛰며 문을 활짝 열었다. 근위기사들과 하녀들을 모두 물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눈앞에 스치는 은빛 머리카락에 발걸음을 멈췄다.
문 앞에 샤를로테가 서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눈앞에 보이질 않았다.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고 하던데. 언제부터 서 있었던 거지?
릴리를 내 등 뒤로 숨기며 차가운 눈길로 샤를로테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밤중에 타인의 방을 찾아올 때는 미리 사용인을 보내 안부를 묻는 게 예의였다.
예법 공부를 시작한지가 언젠데 아직도 이런 실수를 하는 거지?
“무슨 일이죠, 이 늦은 밤에.”
“….”
“이렇게 늦은 밤에 왜 찾아온 거냐고 물었습니다.”
엄한 목소리로 되묻는데도 샤를로테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듣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샤를로테의 시선 끝에는 릴리가 있었다. 릴리는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급기야 이를 악문 채 릴리를 노려보던 샤를로테의 눈가가 새빨갛게 변했다. 당장이라도 울 사람처럼 군 얼굴이 마구 일그러졌다.
“…릴리. 여기 있으렴.”
일단 샤를로테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릴리를 방에 두고 나올 생각이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샤를로테는 릴리에게 화가 난 상태였다. 철없고 마냥 어린 행동만 하던 그녀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피우면 괜히 시끄러워졌다.
한숨을 쉬며 일단 샤를로테를 진정시키려는데, 순식간에 은빛 머리카락이 내 뺨을 스쳤다. 샤를로테는 이를 악 물더니 내 어깨를 세게 밀쳐냈다. 정확히는 어깨를 밀치고 릴리에게 달려들었다.
샤를로테의 작은 손은 릴리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뺨을 내리쳤다.
짝!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고개가 돌아간 릴리는 멍하니 뺨을 붙잡았다.
“겨우 시녀 따위가!”
겨우, 시녀. 그 두 단어에 시야가 새하얗게 변했다. 정확히는 릴리의 붉어진 뺨만이 보였다. 겨우 시녀라고 말했다. 릴리는 내가 아끼는, 이 황궁에서 가장 아끼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에게 시녀니 뭐니 뺨을 때리다니. 등 뒤로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내 손은 어느 샌가 샤를로테의 어깨에 올라가 있었다.
샤를로테가 릴리의 뺨을 때린 것처럼, 이것도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의 어깨를 잡고 세게 바닥으로 밀쳤다.
“아악!”
내 힘에 샤를로테는 바닥으로 나뒹굴듯 쓰러졌다.
“…어디 내 사람에게 함부로 입을 놀려.”
릴리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샤를로테의 팔목 위로 시퍼런 멍과 함께 붉은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릴리의 고개가 돌아간 순간,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숨을 몰아쉬며 가만히 샤를로테를 내려다보았다.
나에게 뺨을 맞은 게 충격이었던 것인지 텅 빈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바닥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입술을 달싹이며 자신의 뺨을 감싼 채 훌쩍였다. 그런 샤를로테를 뒤로 하고 릴리에게 다가갔다. 릴리의 뺨은 시뻘겋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어떻게…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 있으세요!”
릴리를 부축하려는데 샤를로테가 버럭, 외쳤다. 눈물이 고여 있던 눈이 어느새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쥔 채 이를 뿌득 갈았다. 그렇게 고았던 얼굴이 저렇게 망가질 수 있구나.
“네가 한 행동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건가? 감히 내 시녀를 때리고, ‘겨우’ 말을 붙이다니.”
“어차피 시녀잖아요. 잘못한 행동을 했고, 저는 처벌을 한 것뿐이에요!”
“처벌이라고? 상대를 모욕하면서 뺨을 때리는 행위가 처벌이라는 건가?”
아무리 윗사람이라 해도 지켜야 할 도리가 있고, 예법이 있었다. 릴리는 백작 가의 영애였다. 낮은 신분도 아닌데 ‘겨우’라는 단어를 들으며 뺨을 맞을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그리고 시녀니까, 맞아도 된다는 건가? 애초에 릴리가 뭘 잘못했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릴리와 나는 방금까지 목욕실에 있다가 나왔다. 그리고 문을 여니 샤를로테가 있었다. 릴리가 잘못을 저지를 만한 상황 자체가 없었다.
“릴리가 뭘 잘못했다는 거지?”
그러자 샤를로테가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 시녀가 먼저 저에게 모욕을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