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후폐하의 이혼사유-2화 (2/170)

#2화, 전례 없는 이혼.

내 이름 뒤에 붙은 가넷이라는 가문은 레이몬드 황실 다음으로 가는 공신력 있는 가문이었다. 레이몬드 황실이 세워졌을 때부터 황후는 모두 가넷 가문의 영애로 임명되어왔다. 그렇기에 선대 황제와 황후들 중 관계가 별로 좋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우리 둘은 정략결혼이었지만 서로를 사랑했다.

그러니 그가 나와 함께, 평생을 갈 거라고 믿었다. 비록 일하느라 바빠서 함께 식사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어간다고 해도 황제와 황후의 연이 아닌 서로 사랑하는 부부의 연이 끝까지 연결되어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나의 착각이었다.

샤를로테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는 그를 보며 나는 무슨 뭘 했더라…그래, 묵묵히 내 할 일을 했지. 황후니까.

곧장 방으로 돌아왔다. 내 이름을 부르는 페르소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듣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없었다. 근위기사들에게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고는 침대에 몸을 눕혔다.

“…록사나, 나의 아가.”

몸을 웅크린 채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뱃속에는 아무것도 없을 게 분명한데 자꾸만 뭔가가 뱃속을 차는 기분이었다. 신경이 끊어지는 느낌에 심호흡을 하며 몸을 뒤척였다. 베개 밑에서 아이의 옷을 꺼냈다. 만들다만 아이의 옷. 두 손안에 들어오는 아이의 옷 한 벌. 직접 디자이너에게 찾아가 만든 옷이었다. 나중에 태어날 아이가, 이 옷을 입고 자신의 앞에서 뛰어노는 것을 꿈꾸며 말이다.

“아이에게 입히려고 만든 옷인데, 필요 없게 되었네….”

아이를 잃은 걸 알았을 때 울고 또 울었다. 그러나 황후는 함부로 소리 내어 울면 안 되는 탓에 이불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울었다. 소리를 지르지 못했다. 잇새로 새어나온 소리는 이불 밖으로 퍼져나가지 못했다. 그때 하염없이 울었던 탓인가 지금은 울음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슬퍼도 참고 억울해도 참았던 탓인 걸까. 아니면 더 이상 쏟아낼 눈물이 없어서 그런 걸까.

아이의 옷을 소중하게 감싸 천에 감쌌다. 그리고 침대 옆에 놓아둔 작은 가방을 열어 아이의 옷을 조심스레 넣어두었다.

이 작은 가방 한 개. 이게 몇 달 간 이혼을 준비하면서 정리해둔 마지막 짐이었다.

홀로 이혼을 오래 준비한 것치고는 가져갈 물건이 거의 없었다. 황후의 자리에 즉위하고 8년간 내내 일만 해서 그런가, 취미로 쌓아둔 물건 같은 것은 없었다. 뭔가 그림이라던가, 화려한 장신구나 보석, 드레스. 그런 것도 없었다. 애초에 그런 물건들에 관심도 없었다지만 정작 이렇게 짐을 챙기고 보니 가져갈 건 별로 없었다.

“황후 폐하.”

그때 문 너머로 들려오는 시녀의 목소리에 재빨리 가방을 덮고 침대 밑으로 밀어 넣었다. 가라앉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눈가가 빨개졌으면 어쩌지, 손가락으로 눈가 근처를 꾹꾹 눌렀다. 그나저나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일러두었는데, 뭐지? 근위기사가 막지 않은 건가, 아니면 기사들이 함부로 막지 못할 정도의 인물이 나를 찾아왔다는 건가.

“아무도 들이지 말라 했을 텐데.”

“샤를로테님께서 오셨습니다.”

헛웃음을 내뱉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은 당연히 샤를로테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분명 식사가 끝난 뒤 나를 찾아올 테니까.

최근 시종들과 기사들 사이에서 나와 샤를로테 중 어느 편에 설지 고민한다는 말이 돌던데, 그게 사실이었던 걸까. 그 순간 문득 궁금해졌다. 근위기사들은 샤를로테를 막았을까, 아니면 샤를로테의 편으로 돌아선 내 시녀들 중 한명이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고 있을까.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인 자는 한 달 전 나를 모시다가 돌연 샤를로테를 모시겠다며 가버린 라델 부인이었다. 내가 직접 문을 열 줄은 몰랐던 건지, 나를 마주하자마자 어깨를 움츠러트렸다. 어깨 너머로 울먹거리고 있는 샤를로테가 보였다.

“…그리 서있지 말고 일단 들어 오거라. 너는 나가 있고.”

“저는 샤를로테님의 전속시녀입니다.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 계속 샤를로테님에 붙어있으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그럼 황후인 내 말에 말대답을 해가며 방에 들어오겠다, 말겠다 말대답 하는 것도, 폐하의 명이었나?”

“아, 아니, 그건….”

“그런데 지금 내게 이리도 고개를 빳빳하게 들며 내 말을 반박하는 건가?”

한껏 날카로워진 음성에 부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떨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갔던 샤를로테가 새파랗게 질린 채 내 팔을 움켜쥐듯 잡았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기사들에게 후작부인을 데리고 나가라는 명을 내리자, 기사들은 그제야 후작부인을 밖으로 데리고 갔다.

뒤로 돌자 두 손을 꼭 모른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샤를로테가 보였다.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샤를로테는 정말 가련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울먹이는 모습조차 한 순간 사랑스럽다고 느낄 정도로 예쁘고 고왔다.

“황후 폐하!”

“지금은 머리가 아프니, 하고픈 말만 짧게 하거라.”

“왜, 왜 말씀해주시지 않으신 거예요, 아이를 가지셨다면서….”

샤를로테의 입에서 내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럼 내가 친근하게 굴며 아이를 가졌다, 상냥하게 말해줄 거라 생각했다는 건가?

“내가 황제 폐하께서도 알지 못하는 사실을 너에게 말할 이유가 없는 듯한데.”

“그래도 저에게만큼은 말씀해주실 수 있으셨잖아요!”

“내가 왜?”

샤를로테는 눈물을 글썽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더니 나에게 다가와 내 손을 꽉 움켜잡았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돌발적인 그녀의 행동에 두 손이 붙잡힌 채로 가만히 서있었다. 뭐하자는 거지? 샤를로테는 내 손을 몇 번이고 천천히 쓰다듬더니 이내 동정이 담신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아이를 잃은 고통은 말도 못할 정도로 괴롭다고 하던데….”

“뭐?”

“그러니 평소에도 의연한 태도를 보이시던 폐하가 이렇게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시는 거겠죠.”

“…뭐라고?”

“그래서 그간 그렇게 사납게 구신 거죠? 아이가 잃은 고통이 너무 괴로우셔서, 식사시간에 그런 말을 하신 거죠?”

샤를로테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사납게 군것과 식사시간에 있었던 일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생각했다. 아이를 잃은 고통, 내 태도, 식사시간. 그 세 가지가 머릿속에서 맞물린 순간, 귓가 근처에 무언가 뚝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아이를 잃은 고통이 너무 커서, 이혼이라는 말을 내뱉었다고 생각한 것이냐,”

“평소의 황후 폐하와 너무 다르셔서,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해가 됩니다, 뱃속에 아이를 품었고, 그걸 잃는다는 게 얼마나 괴로우셨을지, 아파하셨을지.”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말없이 내 손을 감쌌다. 정말 부드러운 손길이었지만 그렇게 기분 나쁘고 소름끼치는 것도 없었다.

내가 이혼을 다짐한 건 아이를 잃었기 때문이 맞았다. 아이도 잃고, 평생 갈 것이라 믿었던 남편도 잃고, 내가 아껴준 시녀들이 모두 떠나니 그랬다. 이제는 남은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왜 이 자리에 남아있어야 할지, 더 이상 이 자리에 머물고 싶지 않아서 한 말이었다.

“이혼이라니요. 아무리 황제 폐하께 서운하다고 하더라도 이혼은 함부로 하실 말이 아니에요!”

그렇게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 내린 결정이, 뭐? 서운해서?

“그래, 아이를 잃은 고통이 컸지. 그렇기에 폐하께 건넨 이혼이라는 말이나, 너에게 한 이 행동 모두 다 진심이었다.”

“네?”

단순히 아이를 잃은 고통으로 불쑥 튀어나온 그런 망언 같은 게 아니었다. 내 고통을 함부로 재단하는 것도 모자라 내가 한 모든 행동이 서운함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었다. 그런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괴로웠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행동을 한 건, 황후여서였다. 황후니까, 황후로서의 자리를 지켜야 하니까. 그래서 무덤덤하게 말한 척을 한 것뿐이었다.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짓는 샤를로테를 뒤로 하고 의자에 몸을 걸쳤다.

“할 말이 다 끝났다면 어서 나가라.”

“폐하, 저는 단지 위로를 해드리려고 한 것뿐이에요.”

“나가라고. 이제는 내 명을 거역하겠다 나서는 건가.”

거듭 축객령을 내리자 샤를로테는 기어코 울음을 터트렸다. 서럽게 울며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아이처럼 울었다. 그때 샤를로테의 머리에 꽂혀있던 장미 모양 장신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경도가 약한 보석이었던 건지 유리가 깨지듯 산산조각이 났다. 페르소나가 선물했던 보석 장신구가 깨지자 샤를로테는 더 서럽게 울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깨진 보석을 주워 모았다.

그리고 정말 거짓말처럼 페르소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말, 이런 상황을 기다렸다는 듯이.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잠시 상황 파악을 하려는 듯 나와 샤를로테를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이 상황은 아무리 봐도 황후인 내가 정부인 샤를로테를 괴롭힌 상황이었다.

“황후.”

“무슨 말을 듣든 제 말은 믿지 않을 듯싶으니 굳이 해명하지는 않겠습니다.”

그의 단호한 목소리를 잘라내고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기?”

“제가 무슨 말을 하든 폐하께서는 제가 샤를로테를 괴롭혔다고 판단하시겠지요.”

“…일단 샤를로테를 방으로 데려가라.”

샤를로테를 직접 일으켜준 페르소나는 기사들을 시켜 샤를로테를 데리고 나가도록 지시했다. 그가 샤를로테를 정부로 데려온 이후 처음으로 고마운 순간이었다. 물론 그와 말이 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옆에서 계속 훌쩍거리며 있을 샤를로테를 보는 것보다야 나았다.

방에 단둘이 남게 되자 페르소나는 옷깃부분을 살짝 풀며 의자에 앉았다. 뭔가 하고픈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정작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없었지만 내가 입을 열 때까지 방을 나가지 않을 생각인지 나를 올려다보며 자신의 옆에 놓인 의자에 눈짓을 했다.

“무슨 일인데. 누구의 편도 들지 않을 테니까, 말해봐.”

“별 거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제 잘못은 아니었습니다. 때마침 폐하가 들어왔을 뿐입니다,”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자, 페르소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내가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거라 생각할까, 내가 서운해서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려나.

“샤를로테가 운 건 폐하께서 선물한 장미모양 머리 장신구가 바닥으로 떨어진 것 때문입니다.”

“장신구?”

“루비가 달린 머리 장신구 말입니다.”

“아아….”

생각했던 것보다 별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페르소나는 방으로 찾아온 것에 다른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혼을 제시한 것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아무 말 없이 앉아만 있자 페르소나의 얼굴은 점점 심각해졌다. 하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내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던 그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미안하다고….

사과할 줄은 몰랐다. 역정을 내면 모를까. 눈을 크게 뜨자, 페르소나는 천천히 내 손을 감싸왔다. 몇 달 만에 잡은 손이다. 가만히 손을 내려다보는데 죄책감이 서린 목소리가 귓가를 덮어왔다.

“아이를 가진 줄 몰랐소, 다른 할 말이 없지. 내 잘못이야. 내가 정말 미안해.”

“….”

“내가 그대를 잘 보듬어줘야 했는데, 아무것도 몰랐다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많이…아팠지?”

“….”

“내가 그동안 너무 무신경했어. 아이를 가진 것조차 몰랐다니. 정말 내가 너무 미안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예상과 다른 그의 말에 어쩐지 심장이 울렁였다. 내 손을 쓰다듬는 손길이 따뜻해서 아주 잠깐, 그를 향해 또다시 마음이, 기울 뻔했다.

그래, 기울 뻔했다.

“황후인 그대가 그런 격양된 태도와 말도 안 되는 말을 내뱉은 걸 보면 꽤나 괴롭고 오래 분노를 삭혀왔다는 소리겠지.”

뒤이어 따라온 말에, 미약하게나 그를 향해 뛰었던 심장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