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황후가 아닌 로젤리아 가넷으로.
눈앞에 놓인 음식이 이렇게 역겹게 느껴진 적이 있었나.
눈앞에는 맛있는 양념이 잔뜩 발린 고기와 과일이 놓여있었다. 알맞게 구워진 고기를 보며 천천히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음식을 나르던 시종들의 몸이 우뚝, 굳었다.
냉기가 도는 이 상황에서 화기애애한 건 페르소나와 그의 정부, 샤를로테 뿐이었다. 가만히 그 둘을 바라보았다. 시종들의 옆에 버젓이 서있는 데도 자기들만의 세상에 온 것 마냥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직접 음식을 먹여주는 그와 또 좋다고 새처럼 받아먹는 샤를로테를 볼 때마다 없는 식욕이 더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황제의 위엄은 어디에 있는지. 내려놓았던 나이프를 다시 들어 접시를 내려쳤다.
턱을 괸 채 샤를로테를 바라보던 페르소나는 그제야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정말 무미건조한 녹색빛 눈동자였다. 따뜻하고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은 없었다. 샤를로테는 어깨를 살짝 움츠러트린 채 나를 떨고 있는 토끼마냥 바라보았다.
토끼같이 떠는 샤를로테, 또 그런 샤를로테를 감싸는 페르소나. 하나같이 눈꼴시려 보기 싫었다.
그렇지만 인상을 찌푸리거나 애써 구겼던 얼굴을 피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저 모습을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까. 오히려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폐하. 이제 그만 샤를로테를 황후로 들이시죠.”
느릿하게 시선을 올리자 ‘또 시작이냐’라고 말하는 듯한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게 무슨 소리오, 황후.”
“말 그대로입니다, 폐하. 정부를 황후로 들이시라, 이 뜻입니다.”
내 말을 단순히 신경을 긁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페르소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느릿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제는 대놓고 그러는 건가.”
“뭐가 말씀이십니까.”
“샤를로테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그랬지. 그렇게나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소?”
“불편한 기색이라….”
“그래도 평소에는 뒤에서 그러더니, 이제는 아예 당사자의 앞에서 비아냥대기로 마음먹은 건가?”
그 말에 입꼬리에 살짝 경련을 일어났다. 평소에, 뭐? 뒤에서 그랬다고? 내가 뭘 했는지, 지금껏 샤를로테에게 했던 내 행동들을 떠올렸다. 그녀가 마음에 안 들기는 했다. 그래서 내가…샤를로테를 괴롭히기라도 했나? 그녀를 험담하기라도 했나. 오히려 그 반대였지.
“직접 드레스를 골라 선물하고, 아름다운 장신구를 골라 선물해주며. 좋은 차가 선물로 들어와 함께 나눠마시던 게, 폐하의 눈에는 불편한 기색으로 보였나 봅니다.”
“황후가 말한 그 ‘좋은’ 차에 독이 들어 샤를로테가 쓰러졌던 것은 기억하지 못하나 봅니다?”
“마치 샤를로테만 독을 먹었다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신경 쓰지 않으셨겠지만 그때 저도 함께 독을 마셨습니다.”
머릿속으로 몇 달 전 샤를로테가 독을 먹고 쓰러졌던 사건을 떠올렸다.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맞받아치자 페르소나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그래, 그의 말이 맞다. 내가 샤를로테와 함께 나눠마신 차에 독이 들어있었다. 샤를로테는 그걸 마시고 쓰러졌고, 나 또한 함께 쓰러졌다. 그런데 그걸 내 탓으로 돌리는 건가, 샤를로테가 독을 먹고 쓰러진 것을? 내가 건넨 차에 독이 들어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독을 탄 건 샤를로테의 전속 시녀였죠. 스스로 자백을 했고 말이죠.”
“그렇지. 하지만 샤를로테에게 언제나 날카로운 태도를 보이던 황후가, 갑자기 함께 차를 마신 것도 이상하고, 때마침 시녀가 독을 탄 것도 이상하지만 말이야.”
그의 말에는 가시가 숨겨져 있었다. 나를 철저하게 조롱하는 말투에 똑같이 그를 조롱했다.
“아아, 그래서 독을 탄 범인이 잡혔는데도 제가 독을 타게끔 시켰다는 소문이 돌았군요.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간간히 들려오던데, 폐하께서 이렇게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는 태도를 보여서 말이죠.”
“황후, 말은 가려하시오.”
“제 말이 뭐 틀렸습니까?”
마주앉은 자리 사이로 차가운 침묵이 돌았다. 단어 하나하나가 칼날 같았다. 칼날을 서로에게 던지며 주고받는 기분이었다.
샤를로테와 내가 독을 먹은 그 사건은 샤를로테의 전속 시녀가 자신이 한 짓이라며 자백을 했다. 그 시녀가 샤를로테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걸 많은 시종들이 목격했다. 모두가 샤를로테에게 독을 먹인 범인이 누군지를 보았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건 그 시녀가 아닌 나였다. 내가 샤를로테를 시기했고, 시녀에게 독을 먹이게끔 사주했다는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 오고 갔다.
그때 들은 소문을 생각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한동안 눈치를 보던 샤를로테가 불안한 눈빛으로 페르소나의 옷깃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냉랭했던 페르소나의 눈빛이 순식간에 햇살처럼 따뜻하게 물들었다.
“폐하…황후 폐하도 그때 독을 마시고 쓰러졌습니다. 아시잖아요. 만약 황후 폐하께서 독을 타도록 지시하셨다면, 자신의 잔에는 독을 타지 않으셨을 거예요.”
샤를로테는 눈물을 글썽였다. 저런 말을 하는 의도가 무엇일까, 나를 도와주려 한 말인가. 아니면 이 상황을 더 악화시키기 위한 말인가. 무엇이 되었든 지금 이 상황에서 내 편은 없었다. 시녀와 시종들은 처연하게 우는 샤를로테를 동정하고 있었다. 이제 이 식사시간이 끝나면 또 다른 소문이 나를 가시덤불처럼 뒤덮을 게 뻔했다.
“참으로 어이없는 상황입니다. 함께 독을 먹었는데, 누구는 이리도 걱정 받고, 누구는 허무맹랑한 소문에 휘둘리고.”
“황후는 독을 먹었음에도 금방 일어나지 않았소. 그래놓고 샤를로테의 방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지.”
“찾아가지 않은 게 아니라, 못 간 겁니다.”
문득 나는 내 손이 배 위에 올려 있다는 걸 알았다. 기분이 상했다는 걸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이미 갈기갈기 찢겨져 버린 자존심을 겨우 붙잡고 있느라 미처 알지 못했다. 목 언저리로 뜨거운 뭔가가 울컥, 하고 올라왔다. 제가 왜 샤를로테에게 가지 않았냐고 물으셨죠, 폐하.
“그 어떤 황후가 정부의 방에 찾아간답니까. 그리고 찾아갔더라도, 폐하께서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셨을 것 아닙니까, 제가 쓰러져 있는 내내 샤를로테의 옆에 계셨다지요. 그리고 시녀가 자백하기 전, 독을 먹인 범인으로 저를 의심하셨고요.”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 그 차는 황후와 샤를로테 단둘이 마신 차였으니까. 그리고 사람을 보내 샤를로테의 상태를 물을 수도 있었지.”
“그럼 폐하도 한번 물어보지 그러셨어요. 제 상태를요. 왜 샤를로테에게 사람도 보내지 않고, 찾아가지도 않았는지. 왜 의심하고 있는 걸 알면서 해명을 하지 않았는지.”
평이한 어조 속, 배 부근을 꽉 움켜쥐었다.
”폐하. 이 뱃속에, 손가락만한 생명이 자라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애써 참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몇 달간 준비해온 말을 이렇게 직접 입 밖으로 토해내니 심장이 처참하게 찢겨나가는 기분이었다.
황궁의는 그렇게 말했다. 딱 손가락 크기였을 거라고. 생식기능 하나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그런 크기의 아기였을 거라고. 나는 몰랐다. 아이를 가진 줄을 알지 못했다. 매월 내 건강을 체크하던 황궁의에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페르소나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를 꿈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그에게 직접 임신 소식을 알리기로 마음먹은 날, 독을 먹고 쓰러졌다.
“화, 황후 폐하! 아, 아이라니…?”
샤를로테는 벌떡 일어나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샤를로테 뿐만이 아니라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지금 아이를 가졌다고, 말하는 건가?”
“정확히는 가졌었다고 말하는 거죠. 임신했었습니다. 폐하의 아이였지요.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아이지만요.”
페르소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그래도 자기 아이라니까 충격은 받은 건지 아까까지만 해도 잘만 놀리던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래 봤자 나보다 더 충격이었을까. 나는 뱃속에 아이를 품고 있었고, 잃기까지 했다. 내 잘못이 아닌 일로 지금까지 내내 소문에 시달렸다. 왜 그렇게 충격받은 표정이냐고 소리 지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샤를로테에게 다가갔다. 아름다운 호박색을 닮은 금빛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아름다운 은색의 머리카락, 그 머리카락과 잘 어울리는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영롱한 색을 띄우는 레이스가 달린 연한 초록빛의 드레스. 손가락으로 천천히 샤를로테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샤를로테는 날이 갈수록 주변 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아 더욱 아름다워져 있었다.
“도저히 폐하를 만날 수가 없어서…그래서 일부로 식사시간 때 말씀드린 거였는데 단순한 장난으로 들리셨나봅니다. 샤를로테를 황후로 들이라는 말이 그저 폐하의 신경을 긁기 위한 말이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입니다.”
“…화, 황후 폐하?”
“전부 잃었는데, 제가 왜 이 자리에 남아있어야 합니까. 아이를 가진 것도, 잃은 것도 몰랐던 폐하의 곁에 더 남아있고 싶지는 않습니다.”
샤를로테의 창백하게 질린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살갗이 떨리는 게 보였다. 손끝으로 따뜻한 온기가 흘러들어왔다. 당장이라도 뺨을 내려쳐 쥐어뜯고 싶었다. 아이를 잃은 걸 알았을 때 홀로 베개를 끌어안은 채 울던 나처럼. 이 깨끗한 눈동자에 눈물이 흘러내리는 걸 보고 싶었다.
페르소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팔을 낚아채지 않았다면 나는 샤를로테의 뺨을 내려쳤을 지도 모른다. 시종들 앞에서 이성을 잃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끝까지 내가 아닌 그녀를 챙기는 그에게 분노하며 페르소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손을 뿌리치기 위해 팔을 휘둘렀다.
몰랐다 하더라도 친자식이었다. 너의 뒤를 이었을지 모를 아이라고. 그런데 끝까지 내가 아닌 샤를로테를 챙겨?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황후? 샤를로테를 황후라고 들이라고? 나에게 이혼이라도 제안하는 건가?”
뿌리치려 할수록 내 손목을 더 꽉 붙들어 맸다. 그의 압력에 손이 떨렸다. 아팠다. 그러나 내가 지금껏 받아온 상처에 비하면 아픈 축에 끼지도 않았다. 오히려 다른 손으로 그의 팔목을 꽉 잡고는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정말 이럴 때만 잘 맞는 군요. 이제야 알아차리신 겁니까, 저는 폐하께 지금 이혼을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황후가 황제에게 이혼을 말하는 날이 얼마나 있을까, 아마 없겠지. 하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그와 이혼을 할 것이다.
아이를 잃은 순간부터 다짐한 것이었다. 나는 황궁에 떠돌던 소문과는 달리 샤를로테를 돌봐 주려 했고, 몇 번이고 선물을 보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이렇게나 비참하다.
“샤를로테를 황후로 만들어주십시오, 그리고….”
똑바로 마주한 페르소나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쳤다. 그는 끝까지 내가 말도 안 되는 심통을 부리고 있는 거라 생각하고 있을까. 문득 그런 의문이 떠올랐지만 이내 나는 말없이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올렸다.
“저와 이혼해주십시오.”
뭐가 되었든 이제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저는 이제 그만 로젤리아 가넷으로 돌아가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