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4 E. 이어지는 시간 속에 =========================
백화 평기사 미엘라 올센이 해신교 대사원에 도움을 청하여, 마파랑은 진압되었다. 인공 마파랑에는 강점이 있는 만큼 약점도 있었다. 바깥에서 가하는 힘에 쉽게 휩쓸린다는 것이었다. 에르실반이 마력 오렴을 막아 냈듯이. 달려온 해달신교의 대사제와 고위 사제들의 성력으로, 아고르가 가꾼 인공 마력은 해롭지 않은 성질로 바뀌었다.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제국 기사단장들은 마파랑이 불러일으킨 이상 현상으로부터 성직자들을 지켰다.
일이 끝나고, 미엘라는 ‘아벨테오노의 보검’ 훈장을 받았다. 기사로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었다.
반대가 빗발치기는 했다. 제국 기사단에서는 여기사 따위에게 지나치다며 들고일어났다. 현장에서 뛴 제국 평기사와의 형평성에 어긋난다고도 했다. 몇몇 나이 든 귀족도 나섰다. “계집에게 훈장을 내렸다가는 나라의 기강이 무너집니다!” 하고. 이오르 황제는 딱 잘라 말했다.
“이번 사태에서 그 어떤 남성도 백화보다 큰 공을 세우지 못했다.”
제국 기사단의 자존심을 구기는 소리였다. 빈말도 아니었다. 미엘라가 교단을 끌어들였고, 네세라와 스란이 적의 정체를 파헤쳤다. 기사단장인 이에샤는 브링어 둘을 물리쳤다. 죄인 밀레나 알디온을 끌어내고 마파랑을 일으킨 마법사와 맞서기도 했다. 제국 기사도 날뛰는 외적을 잡아들이느라 애썼지만, 일을 근본적으로 바로잡은 쪽은 백화 기사들이었다. 모두가 업신여겨 온 여자 기사단이 에브라힐, 나아가 수도를 위기에서 구해 냈다.
이오르는 이에샤에게도 상을 내렸다. “바라는 일 한 가지를 무엇이든지, 황제의 이름을 걸고 들어주겠다.” 하고 말한 것이었다. 파격적인 이야기였다. 애버토스의 표정이 볼만했다. 애버토스뿐 아니라 뭇사람이, 여자 기사단장이라면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인 엘테르트를 바라리라 생각했다. 이에샤는 이오르의 앞에 무릎 꿇고 대답했다.
“황공무지합니다. 델피르의 기사로서 지당한 일을 한 바, 겸양하게 사양해야 옳은 줄로 압니다. 하오나 받잡겠습니다, 황제 폐하. 제 소원은…….”
델피르력 754년 2월 25일.
‘에브라힐 마파랑 사태’가 끝나고 한 달이 지났다. 부서진 별궁들을 고치는 일이 한창이었다. 석곡궁은 무사했다. 백화 기사단은 여느 때와 같이 굴러갔다. 일상이 되돌아왔다. 이에샤는 기사단 정복 코트를 갖추어 입었다. 자기 방을 나섰다. 주방에서 알리사가 달려 나왔다. 손에 샌드위치를 든 채였다.
“가시면서 드세요. 아침 거르시면 안 돼요.”
“고마워!”
이에샤는 웃으며 받아 들었다. 셈브리온이 돌아왔어도, 알리사는 잘리지 않았다. 이에샤가 셈브리온에게 집안일일랑 관두고 놀라고 못박은 까닭이었다. 대신 셈브리온은 취미로 알리사에게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에샤에게 맛있는 야식을 만들어 주겠노라고 큰소리쳤다. 두 사람은 조리대 앞에 서서 다친 알리사의 남편을 걱정하거나, 겨울에는 채소 값이 비싸 큰일이라고 투덜거리거나 했다. 이에샤는 부엌에서 움직이는 커다란 사내를 부신 눈으로 보았다. 셈브리온도 이에샤를 향했다. 검은 눈이 반달꼴로 휘었다.
“오늘도 열심히, 알지?”
“응. 다녀올게!”
이에샤는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피올라 거리는 변함없었다. 큰 저택을 사서 떠날 셈인 곳이었지만, 정도 들었다. 뛰어다니는 꼬마들의 웃음소리가 맑았다. 샌드위치를 아귀아귀 먹으며 걸었다. 역마차 정거장을 지나쳤다. 언제나처럼 기다리던 마부가 당황한 낯빛을 띠었다.
이에샤는 피올라 거리를 벗어났다. 큰길로 접어들었다. 오가는 사람마다 눈을 떼지 못하는, 휘황한 육두마차가 보였다. 붉은 휘장에 수놓인 독수리가 멋들어졌다. 차체에 기대섰던 청년이 이에샤를 찾아냈다. 아름다운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뇨. 금방 왔습니다.”
“거짓말 말아요. 코가 빨개요. 당신 추위 타잖아요.”
이에샤는 투덜투덜하며 엘테르트를 흘겼다. 엘테르트는 이에샤를 보기만 해도 좋은지 싱글벙글했다.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이에샤는 익숙해진 멘델린의 마차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으려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엘테르트가 고개를 기웃했다.
“왼쪽 옆머리 삐쳤어요, 엘테르트.”
“아, 이런. 어제 잠자리에서 뒤척였더니.”
“긴장했나 봐요?”
“당신은 괜찮았습니까?”
손빗으로 옆머리를 눌렀다. 마차에 올라탔다. 이에샤는 입을 다물고, 좌석 등받이에 기대었다. 엘테르트가 옆자리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엘테르트의 어깨 쪽으로 기울였다.
“모르겠어요. 내가 괜찮은 건지, 아닌 건지.”
“오늘 새벽, 알디온 부인이 수도를 떠났다고 합니다.”
“…….”
한숨이 입술을 비집었다. 예상대로 밀레나는 극형을 선고받았다. 집행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으나. 알디온 후작 부부는 상황을 참작하여 죽음은 면했다. 하나 모든 재산을 몰수당했다. 고용인이 빠져나간 쓸쓸한 저택에서 보름 전, 오스터 알디온이 목을 매달았다. 그 모습을 본 셀더리는 반쯤 정신을 놓았다고 들었다. 결국은 브로칸의 친정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오스터의 장례조차 치러 주지 않았다.
자기 자신에게 놀랐다. 알디온이 망하는 꼴을 보면 통쾌하리라 여겼는데,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기쁘지도 않았고 허무하지도 않았다. ‘다 끝났구나.’ 하고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마차는 부드럽게 나아갔다. 눈꺼풀을 내렸다. 사실은 이에샤도 잠을 설쳤다. 엘테르트는 이해한다는 듯이 이에샤의 머리를 끌어안고 토닥거렸다.
“……엘테르트.”
“예, 이에샤.”
“미안해요.”
“뭐가 말입니까?”
“그날, 당신을 선택하지 않아서.”
이에샤는 한 달 동안 꺼내지 못한 말을 내었다. 엘테르트가 멈칫했다. 곁눈으로 이에샤를 보았다. 감은 눈이 지친 것 같았다. 이에샤가 이오르에게 엘테르트를 달라 했다면, 멘델린 부부도 막을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이에샤는 그리하지 않았다.
「황공무지합니다. 델피르의 기사로서 지당한 일을 한 바, 겸양하게 사양해야 옳은 줄로 압니다. 하오나 받잡겠습니다, 황제 폐하. 제 소원은, 제 스승에게 관용을 베풀어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셈브리온이 잠깐이나마 빌버에 몸담은 일, 델페레타에 밀입국한 일, 아고르의 흉계를 꿰고도 알리지 않은 일……. 이에샤는 셈브리온의 모든 죄를 덮어 주십사 빌었다. 이오르는 뜻밖이라는 낯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이 마음에 걸려 왔다. 제가 엘테르트였다면 섭섭했으리라.
엘테르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흰 뺨이 이에샤의 정수리에 비벼졌다.
“어떤 선택을 하든지, 당신은 자유롭습니다. 그걸 잊지 마십시오.”
마차가 멈추어 섰다. 밖에서 문이 열렸다. 엘테르트가 일어났다. 발판을 디디고 나갔다. 양팔을 뻗었다. 이에샤는 엘테르트에게 허리를 끌어안겨서 내려섰다. 에스코트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으나, 연인 분위기를 내어 나쁠 것은 없었다.
우거진 숲 속에 포장도로가 났다. 길 끝에는 돌계단이 자리했다. 달신교 대사원은 해신교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둥근 모양새의 석조 건물이 한 채뿐이었다. 이에샤와 엘테르트는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꼭대기에는 정갈한 화단이 가꾸어졌다. 얼굴을 가리지 않은 사제 한 명이 기다렸다. 두 사람은 가슴에 손을 얹고 인사했다. 사제도 마주 예를 차렸다.
사제가 이에샤와 엘테르트를 이끌었다. 대사원 건물로 들어섰다. 이에샤는 돌로 만들었는데도 춥지 않은 복도를 걸으며, 짧게 물어보았다.
“좀 어떤가요?”
“천천히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움찔 놀랐다. 괜찮다고 여겼건만, 긴장했던 모양이었다. 엘테르트가 이에샤의 손을 잡아 주었다.
다다른 곳은 2층의 남향한 방이었다. 상급 사제의 기도실이었으나, 지금은 지내는 사람이 있었다. 사제는 노크를 건너뛰었다. 나무 문을 밀어 열었다. 두어 발자국 물러섰다. 드러난 어귀를 이에샤와 엘테르트가 지나쳤다. 이에샤는 간이침대에 앉아 달신상과 마주 본 밀레나에게 다가갔다.
밀레나는 빛나는 용모를 몽땅 잃어버렸다. 살갗이 송장처럼 거무죽죽하고 거칠거칠해졌다. 눈가는 움푹 팼다. 입술에는 세로금이 빽빽했다. 콧구멍에서 밭은 숨이 새어 나왔다. 이에샤가 밀레나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혐오감은 일지 않았다. 엘테르트는 문가에 서서 자매를 지켜보았다.
“……날 찾았다고 들었어.”
밀레나가 어렴풋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름답지도 생기롭지도 않았지만, 미소가 이루어졌다. 몸은 망가졌어도 평온한 듯싶었다.
“마지막으로 언니를 보고 싶었어. 물론 내 눈은 보이지 않지만.”
“농담할 여유도 있니.”
“그러게 말이야. 나란 애는 이 지경이 됐는데도 우스개가 나온다?”
이에샤는 가라앉은 눈초리로 밀레나를 보았다. 밀레나는 투옥되어야 했지만, 달신교 대사원으로 보내졌다. 한 번 마파랑의 핵이 된 몸이었다. 마력이 흐트러진 황궁에 두어서야 위험했다. 참극을 되풀이할지도 몰랐다. 못마땅해 하는 이가 많았으나 별수 없었다. 지금은 기도실에 갇힌 신세였다.
그리고 죽어 가는 중이었다.
“긴 말 하려는 건 아니야. 그냥 작별 인사라도 하고 싶어서. 이제 내 혈육은 어머니랑 언니뿐인데, 어머니는 날 보러 오시지 못할 테니까.”
“그래. 들어 줄게.”
“고마워.”
밀레나는 이에샤를 바라보려 했다. 눈길이 엉뚱한 곳만 더듬었다. 이에샤는 한숨을 쉬었다. 아고르가 죽고, 밀레나의 세계는 정말로 어둠에 잠겼다. 밀레나가 이에샤와 눈 마주치기를 포기했다. “이에샤 언니.” 하고 불렀다. 이에샤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아차 하고 답했다.
“말해.”
“열심히, 잘 살아. 행복하게.”
“…….”
“내 몫까지.”
밀레나가 문 쪽을 돌아보았다. 생긋이 웃었다. 누가 있는 줄 안다는 것처럼. 엘테르트는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괜스레 고개를 수그렸다.
“볕이 따뜻해서 그런가? 이상하게 졸리네.”
“좀 자.”
“으응. 와 줘서 정말 고마워, 이에샤 언니.”
이에샤는 밀레나를 뒤로했다. 엘테르트와 기도실을 나섰다. 더는 밀레나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 이에샤는 밀레나를 용서하지 못했고, 결코 좋아할 수 없었다. 자매는 화해한 것이 아니었다. 화해할 시간조차 남지 않았다.
단지 이에샤는 밀레나 알디온이라는 사람이 제 삶에 있었고, 제법 큰 의미를 지녔다고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마차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밀레나의 말대로 햇볕이 따사로웠다. 맑은 날이었다. 나뭇잎 틈새를 파고드는 빛줄기가 눈부셨다. 이에샤의 얼굴에 숲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것이 무겁게 느껴져, 머리를 가로저었다. 어째서일까. 가슴이 텅 비어 버린 기분이 들었다. 꽉 잡은 엘테르트의 손만이 충만했다.
“어서 오세요! 앨저 경!”
네세라가 달려들었다. 이에샤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에샤는 놀라지 않았다. 네세라는 상대방이 싫어하는 듯하면 스킨십을 그만두었고, 지금 이에샤는 괜찮았다. 석곡궁, 백화 기사단장 사무실에 미엘라와 스란까지 모인 채였다. 이에샤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왜 다들 여기 있어? 일 안 해?”
“이것 좀 보세요, 앨저 경.”
미엘라가 무언가를 들어 보였다. 싸구려 종이 두 장이었다. 이에샤는 눈을 치켜떴다. 수도 신문이 아니었다. 각각 다이칸과 시어칸의 으뜸 신문사가 펼쳐 낸 것이었다. 헤드라인을 읽어 보았다. 익숙하기 그지없는 이름이 보였다.
“우리 얘기잖아……?”
“네! 백화 기사단이 중심이 되어 수도에서 벌어진 마파랑을 진압했다고 왜곡 없이 적혔어요.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에는 브로칸이랑 닐보칸에도 같은 기사가 나갈걸요?”
“전하께 감사하다고 전해 드려야겠다.”
픽 웃으며 이야기했다.
루시온은 이에샤에게 사사롭게 약속했다. 백화 기사단의 공로가 묻히지 않도록 해 주겠노라고. 이에샤는 큰 기대를 품지 않았다. 황실 사서에 기록 몇 줄 남겠거니 했을 따름이었다. 지방 신문까지 써먹을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1면의 머리기사였다. 제국의 모든 사람이 한 번쯤은 백화 기사단의 이름을 눈에 담으리라.
감사 인사는 미루기로 했다. 요즈음 루시온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리만치 바빴다. 쟐레 왕국에서 해적이 출몰하지 않는 해역의 어업권을 얻어 내고, 레오웰 도시 연합으로부터 막대한 공물을 챙기고, 새로운 왕정을 세우려는 벨체터 귀족파와도 협상이 이어졌다.
모든 일이 잘되어 갔다.
“그리고 앨저 경! 또 한 가지요.”
“또 뭐가 있어?”
미엘라가 헤헤 웃었다. 스란도 부드러운 낯빛을 지었다. 스란은 빠르게 실력이 늘어 갔다. 이제는 이에샤가 정식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델페레타에 두 번째 여자 브링어가 태어날지도 몰랐다.
“땀 범벅이 되어서 옷을 갈아입고 있습니다.”
“……?”
“닐보칸에서 상경한 올데아 백작가의 막내 따님이라더군요. 제가 가볍게 대련해 보니 실력이 제법이었습니다.”
이에샤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 말은.”
“입단 희망자예요!”
입술을 깨물었다. 창피하게,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백화 기사단이 생긴 지 일 년하고도 약 삼 개월째였다. 네세라 다음으로 입단 희망자가 찾아왔다. 검술까지 배운 모양이었다. ‘역시.’ 하고 생각했다. 이에샤가 모르는 곳에서 다른 여자도 검의 길을 걸었다. 아카데미에는 학문을 닦는 여자도 많았다. 기술을 배우고 예술을 펼치는 여자도 있을 터였다. 틀림없었다. 세상에는 그렇게 수많은 여성이 살아갔다.
이에샤는 그 모두를 지키고 싶었다.
사무실 문이 열렸다. 왜건이 들어왔다. 찻잔 다섯 개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쿠키 접시도 놓였다. 안녕하세요, 앨저 경! 시더가 쾌활하게 인사했다.
“다들 드시면서 면접 보세요!”
시더를 따라온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씩씩한 표정의 소녀가 백화 기사단장을 향하여 허리를 굽혔다.
- 혼수는 검 한 자루 (完) -
============================ 작품 후기 ============================
에필로그의 소제목은 드라마 산 ost 제목을 차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