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3 12. 싸울 수 있는 이 =========================
아고르 틸트라의 마법은 어떤 현자도 다다르지 못한 영역을 넘보았다. 아고르는 촉매가 되는 물건이 없어도, 머릿속에 식을 세워서 마법을 일으킬 수 있었다. 나이를 먹지 않는 양 젊어 보였다. 의식도 이십 대에 멈추어 선 듯싶었다. 빌버에서 정을 준 사람이라고는 킬타로스뿐이었다. 킬타로스가 죽은 뒤로는 다시 만난 셈브리온이 되었다. 아고르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 힐가와 두 형제가 함께하던 시절뿐이었다. 벨체터 내란을 끝내려는 까닭도 과거로의 회귀 본능에 지나지 않았다.
빌버의 조직원들이 델페레타에 들어오기 사흘 전, 아고르는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 냈다.
“이 녀석의 첫 번째 먹잇감으로는 네가 딱이라고 생각했지.”
잿빛이 도는 검은색 눈동자에 웃음기가 서렸다. 파랗게 타오르는 거인의 어깨에 아무렇지도 않게 앉은 아고르가 이에샤를 내려다보았다. 이에샤는 기침을 터뜨렸다. 깜빡이는 브링의 막이 이에샤와 엘테르트, 밀레나, 발렌티아를 지켰다. 어지럽게 뒤집힌 땅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킬타로스를 죽인 살인자 계집.”
헛웃음이 나왔다. 마파랑과 더불어 벨체터·레오웰·쟐레의 침략자들에게 목숨을 잃은 에브라힐의 일꾼만 세 자릿수에 달할 터였다. 살인자라고 매도하는 아고르의 모습에서, 이에샤는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막무가내로 감정을 밀어붙이는 꼴이 어렸던 자신과 닮았다.
“그래, 좋다.”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솟아오른 땅이 벽처럼 이에샤와 거인을 에워싼 채였다. 셈브리온은 그 너머에 있는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저놈이 만든 경기장 같군.’ 하고 생각했다.
“첫 번째 먹잇감을 나로 찍었다면, 두 번째 먹잇감을 찾을 일은 없겠구나. 쿼제리안.”
‘쿼제리안’은 이민족을 깔보는 낱말이었다. 제국인이 대륙의 나머지 나라 사람들을 일컫는 멸칭으로, 이에샤는―셈브리온이 있었기에―입에 담아 본 적 없었다. 더러운 말을 쓴 까닭은 지독하게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아고르가 눈썹을 꿈틀했다.
“곧 죽을 제국년이 입만 살아서는.”
“꿇어앉아 목숨 구걸이라도 하길 바라나? 나이 처먹고 염치가 있어야지.”
“……너만 없었으면 이브론은 날 저버리지 않았어.”
이에샤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브론’이란 셈브리온을 가리키리라. 저 젊어 보이는 남자가, 셈브리온이 형제처럼 여기는 자인 줄은 들었다. 이상하리만치 자신에게 적개심을 불태우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맹목적으로 매달린다면 사람은 자랄 수 없었다. 이에샤가 그러했듯이.
“그 거인이랑 비슷한 걸 아까도 만났다. 네놈이 만든 거냐?”
“아, 풀어놓은 실험작이랑 마주쳤나?”
“열여섯 살도 안 된 어린애까지 그것한테 타 죽었지. 난 입으로 널 살인자라고 비난하지 않겠다. 다만,”
새카만 검을 추어올렸다. 아고르의 양미간을 겨누었다.
“델페레타 황실 기사단장으로서 처단해 주지.”
밀레나가 가냘픈 목소리로 “안 돼.” 하고 중얼거렸다. 이에샤는 밀레나의 말속을 알아들었다. 제가 아고르를 이기지 못한다는 뜻이리라. 맞는 말이었다. 버들궁에서 마주친 불의 거인은 브링으로도 상처를 낼 수 없었다. 흙을 뿌리자 몸집이 줄어들었지만, 눈앞의 거인은 5m를 넘어 보였다. 불땀도 거셌다. 맞설 방법 따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질 것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패배를 받아들인 채 싸운다면, 정해진 승부밖에는 낼 수 없었다. 이에샤 앨저는 갓 검을 쥔 여덟 살 무렵부터 브링어에게 맞서 왔다. 불타는 거인쯤 옛날의 셈브리온에 견주면 하찮았다. 자신은 훌륭하게 성년이 되었으니까.
뒤를 돌아보았다. 칼끝을 밑으로 향했다. 가로 베었다. 약하게 쏘아 낸 브링이 바닥에 금을 그었다.
“여기, 이 선을 넘어오지 말아요. 죽고 싶지 않으면!”
“앨저 경! 혼자서는 안 됩니다!”
“밀레나랑 알베라 부인을 부탁해요, 멘델린 경.”
그렇게 외치고 뛰쳐나갔다. 거인을 조종하지는 못해도, 공격이 엘테르트에게 향하지 않도록 이끌 수는 있었다. 푸른 거인은 버들궁의 ‘실험작’처럼 마구잡이로 날뛰지 않았다. 아고르의 받침대 노릇을 할 따름이었다. 아고르가 부리는 것 같았다. 이에샤는 아고르라면 끈질기게 저를 노리리라고 내다보았다. 도발을 하는 수도 있었다.
엘테르트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속이 치밀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 주기는커녕 짐만 되는 자신이 답답했다. 살면서 무력을 갈망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이에샤와 발맞추어 싸우고 싶었다. 도움이 되고 싶었다. 적처럼 마법이라도 배웠더라면! 마법학을 공부해 보라는 소리에 비효율적이라고 물리쳤던 일이 후회되었다.
‘아니야.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다.’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검을 들어야만 싸울 수 있는가? 아니었다. 엘테르트는 번뜩이는 두뇌를 지녔다. 생각하고 고민하여, 약하고 괴로운 사람들을 돌보아 왔다. 작은 독수리는 제국과 제국민을 지키고자 낮게 날았다. 지금 같은 시련을 이겨 내기 위하여.
아고르가 거인의 어깨에서 일어났다. 계단이라도 있는 양 허공을 디뎠다. 성큼성큼 밟으며 올라갔다. 본궁이 보일 법한 높이에서 멈추었다. 다리를 꼬고 앉았다. 거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에샤가 예상한 대로, 이에샤 쪽으로 달려들었다.
‘브링은 안 통해!’
이에샤는 이글거리는 주먹을 굴러서 피했다. 아는 방법부터 써 보기로 했다. 브링을 다리에 모았다. 거인의 등 뒤로 달려 돌아갔다. 거인은 덩치만큼이나 동작도 크고 느렸다. 이에샤가 브링으로 흙벽을 쳤다. 벽 한 겹이 무너지며, 먼지구름이 거인을 덮쳤다. 거인이 주춤하더니 아랑곳하지 않고 팔을 휘둘렀다.
‘이것도 안 먹히는군.’
이에샤는 냉정하게 그만두었다. 공방을 거듭하며 살펴 나가면 약점이 보일 터였다. 틀림없었다. 시간을 끄는 것도 괜찮았다. 셈브리온이 벽을 넘어올지 몰랐다. 셈브리온은 이에샤와 달리 지치지 않았다. 브링이 남은 만큼 이에샤보다 쓸모있었다. 실지로 더 강하기도 했다.
이에샤는 거인이 엘테르트를 등지도록 했다. 어깨 너머로는 넘어가지 않았다. 피할 곳이 모자라도 좋았다. 공격이 엘테르트 쪽에도 미쳐, 사람 셋을 지키며 싸우는 것보다는 나았다. 거인이 무겁게 몸을 휘둘렀다. 이에샤는 뛰어서 달아났다. 브링으로―사람이라면 심장이 자리할―가슴께나 발뒤꿈치를 후려갈겨 보았다. 움직임을 멈출 수는 없었다.
‘어떡하지……!’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거인의 목을 베어 보았다. 불길이 흐트러졌다가, 되돌아왔다.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재차 몸을 솟구쳤다. 정수리부터 가랑이까지 일자로 갈라냈다.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눈앞이 캄캄했으나, 이에샤는 움직이기를 멈추지 않았다.
싸움이 끝날 때, 패자는 싸울 방법이 떨어져서 지는 것이 아니었다. 물러서고 무릎 꿇었기 때문이었다. 방법이 없다면 만들면 되었다.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이에샤의 머릿속은 가라앉아 갔다. 네세라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선례의 선례 같은 건 없어요. 우리가 선례를 만드는 중이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길이에요.」
이번에는 미엘라가 종알거렸다.
「도둑 공부를 한 이유요? 하고 싶었으니까요! 저 같은 하녀 계집애라도 좋아하는 일은 있게 마련이잖아요.」
스란이 한숨을 지었다.
「일을 좋아서 합니까? 해야만 먹고 사니까 하는 거지.」
왜일까? 마지막으로, 시더가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앨저 경이 좀 엄하게 대하셔도 저는 앨저 경이 좋아요. 열심히 사는 사람은 호감이 가는 법이거든요……. 석곡궁에서 보낸 나날은 찬란했다. 백화 기사단은 이에샤의 삶에서 셈브리온만큼이나 소중해졌다. 잃어버릴 수 없었다. 손에서 놓아 버리기 싫었다. 이에샤는 계속, 오랫동안 제국의 명예로운 기사단장이고 싶었다.
그때였다. 엘테르트가 터질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앨저 경! 오른쪽 눈입니다!”
이에샤는 반사적으로 멈칫했다. 거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오른쪽 눈을. 정신없이 뛰어다니느라 몰랐던 열기가 훅 끼쳐 왔다. 아! 짧은 감탄성이 새어 나왔다. 둥그렇게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어렴풋하게 무언가가 반짝였다. 아고르가 벌떡 일어섰다.
“안 돼! 어서 죽여 버려!”
“마법은 인간의 지각(知覺)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앨저 경도 ‘불 붙은 동상’ 얘기 정도는 들어 보셨겠지요!”
유명한 우화였다. 어린아이가 세 살쯤 되면, 잠자리에서 부모가 들려주는. 이에샤 또한 에이릴리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들었었다. 또렷하게 떠오르지는 않았다. 큰 줄거리만이 기억났다. 젊고 아름다운 기사가 나쁜 왕을 물리치고, 민중이 왕의 동상에 불을 붙였지만, 오른쪽 눈알만은 녹지 않고 남았다는 내용.
「왕이 된 기사는 그것을 본보기 삼아 오래오래 평화롭게 나라를 다스렸답니다.」
어느 나라에나 있을 법한, 시시한 이야기였다.
엘테르트의 말속을 알 성싶었다. 마법은 ‘어떠한 모양의 기적을 일으켜 자신에게 이롭게 쓸까.’ 하는 상상으로부터 비롯했다. 마법의 식을 세우려면 지향하는 바가 뚜렷해야만 했다. 평소에 보고 듣는 것에 따라서 마법사마다 만들어 내는 마법이 달랐다. 이에샤는 그러한 지식까지는 몰랐으나, ‘불타는 거인’ 마법의 촉매가 어디에 있을지 정도는 눈치챘다.
흙벽을 밟았다. 사선으로 달려 올라갔다. 반동력을 써서 튀어 올랐다. 거인의 오른쪽 얼굴―눈이 달렸을 만한 곳을 노려보았다. 칼날에 브링을 모았다. 아낌없이, 몽땅. 엘테르트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엘테르트라면 믿을 수 있었다. 이에샤는 힘을 다하여 커다란 기검을 이루어 냈다.
새파란 빛줄기가 거인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동시에 붉은 브링이 아고르를 덮쳤다.
“……어? 왜……?”
아고르는 공중에서 땅을 훑어보았다. 겹겹으로 세운 벽 가운데, 자신과 가까운 벽의 꼭대기에 셈브리온이 섰다. 숨을 고르는 듯했다.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아고르가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이브론.” 하고 웅얼거렸다. 셈브리온의 날카로운 귀는 아고르의 목소리를 잡아냈다. 셈브리온은 울 듯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넌 너무 멀리 갔다, 망할 짜식아.”
거인의 몸뚱이에서 불꽃이 잦아들었다. 촉매를 잃은 마법이 흩어졌다. 무게 중심을 잡지 못한 이에샤에게 금발의 청년이 넘어지고 휘청하며 달려갔다. 셈브리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비리비리해 보이는 꼴이 성에 차지 않았다. 하지만, 뭐……, 성실한 인상은 마음에 들었다.
수레국화궁의 하늘에서부터 암청색이 퍼져 나갔다. 자줏빛과 초록빛의 기류가 사그러들었다. 희누런 별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공기에 밴 악취가 가시기 시작했다. 진짜 밤이 찾아왔다.
============================ 작품 후기 ============================
지난편 후기에서 얘기한 대로 비 때문에 숙소에서 글이나 썼습니다...아 왜 여행 첫날에 비가 오고 그래요...
< 12. 싸울 수 있는 이 > 편이 끝났습니다. 다음 편에서 (되도록 길고 꽉 닫힌)에필로그로 찾아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