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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162화 (162/164)

00162 12. 싸울 수 있는 이 =========================

이에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계의 촉매―하얀 보석이 정원에 떨어진 채였다―를 부수고 끄집어냈건만, 밀레나는 태평스러웠다. 브링어의 검을 마주하고도 당당했다. 얼굴을 들었다. 이에샤를 쳐다보았다. 이에샤는 눈살을 찌푸렸다. 수레국화궁 현관에서도, 객실에서도 이러했다. 밀레나는 이에샤가 보이는 것처럼 굴었다.

“언니는 날 볼 때면 항상 그렇게 인상을 쓰지.”

“……너, 내가 보여?”

“언니만 보여. 캄캄한 암흑 속에서 언니만이 빛나고 있어.”

이에샤는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밀레나는 우스갯소리를 하거나 비유하는 것이 아니었다. 참말로 저를 보는 중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짐작이 갔다. 검을 거두어들였다. 밀레나가 허튼짓을 하면 찌를 수 있도록 경계하며, 살기를 가라앉혔다.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한테 걸린 마법이 원래 나를 노린 거라서?”

“그렇대. 아고르의 마법이 본 목적지를 찾아가려고 꿈틀거리는 거야. 그럴 때마다 내 몸은 너무 아파.”

“지금도, 아프겠구나.”

“응. 온몸의 관절이 비틀리고 내장은 뒤흔들리는 것만 같아.”

밀레나는 방글방글하며 늘어놓았다. 이에샤는 빈손으로 가슴께를 눌렀다. 기분이 나빴다. 제 불행을 뒤집어쓴 사람을 보자니, 욕지기가 났다. 비로소 밀레나에 대한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밀레나.” 하고 불렀다.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보일 수 있어?”

“귀족 여자라면 대부분 할 수 있는 일이야. 하이힐을 신고 춤을 추면서도 웃고 조잘거려야 하는걸. 언니는 꿈도 못 꾸겠지만.”

“지금은 발만 아픈 게 아니잖아.”

“요령은 똑같아. 그냥 참으면 돼.”

밀레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에샤는 깨달았다. 밀레나의 속마음은 보이는 것처럼 환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비좁고 깊었다. 자기 자신을 갉아먹는 강박 말고는 담을 틈조차 없었다. 밀레나 알디온은 잘 다듬어진 여자였다. 권력을 가진 집단이 이끌어 나가는 세상에서, 가지지 못한 자로서 살아남기에 알맞은.

“그런 게 즐거워?”

“익숙해지면 재밌어. 내 말 한마디에 온갖 사람이 감격하는 꼴을 구경하는 것도.”

“네가 하고 싶은 게 정말로 그런 시시한 일뿐이야?”

밀레나의 낯빛이 굳었다. 이에샤는 대리석처럼 희고, 딱딱하고, 매끄러운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밀레나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언니는 여전히 내 삶이 시시하다고 생각하는구나.”

“그런 게 아니야.”

“언니가 날 비웃을 수 있는 이유는, 언니의 운이 좋았기 때문이야.”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누군가를 찾는 듯이. 밀레나의 눈길은 텅 빈 곳만 더듬다가 이에샤에게로 돌아왔다.

“언니한테는 그 용병 남자가 있었지. 그리고 검술에 재능이 있었어. 덕분에 지금 날 바보 취급할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바보 취급한 적이 없다고…….”

“내가 언니를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었던 건 내 운이 좋았기 때문이야. 운 좋게 아버지가 사랑하는 부인의 딸로 태어나서, 운 좋게 얼굴이 예뻐서, 운 좋게 언니가 스스로 남들을 뿌리쳐 줘서.”

이에샤는 밀레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처음으로 밀레나의 진심을 마주하리라 예상하기는 했다. 이토록 생생하게 들을 줄은 몰랐다. 밀레나라면 저지른 잘못들을 그럴싸하게 포장해, 연민을 이끌어 내리라고 여겼다. 말마따나 이에샤는 이 지경이 되어서도 밀레나를 얕잡아 본 셈이었다.

“그래. 역시, 일부러 날 물 먹여 왔다고.”

“딱 보면 알 수 있는 일을 사람들이 몰라주는 게 답답했지? 어쨌거나 심술이니까, 나한테도 별로 유쾌한 짓은 아니었어. 그렇지만 내가 언니보다 사랑받는다는 실감이 나는 건 좋더라.”

남에게 맞추는 척하며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모사꾼 계집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반대였다. 밀레나는 남을 휘두르면서, 자신을 보아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이였다. 입맛이 썼다. 슬픈 것 같기도 했다.

“우리는 그렇게 운에 따라 이기고 지며 살아왔어. 모두가 그래. 난 운이 좋아서 예뻤고, 운이 나빠서 예쁘다는 이유로 더러운 일들을 겪었고. 다들 그저 운 나쁘게 어머니의 태내에서 여자로 결정돼서, 남자에게 아양 부리며 살아야만 하는 거라고! 그러니 언니 대신 마법에 걸린 걸 원망하지는 않을게.”

“세상이 운만으로 굴러간다고 믿으면 정말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 될 뿐이라는 걸 왜 몰라!”

“누구나 언니처럼 싸울 수 있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건 아니야.”

밀레나가 야멸차게 내뱉었다. 이에샤는 검을 팽개치고, 밀레나의 어깨를 쥐어흔들고 싶어졌다. 제가 그동안 밀레나에게 모질었는지도 몰랐다. 지나치게 미움을 쏟아부었을지도 몰랐다. 하나, 지금 밀레나가 하는 말은 틀렸다. 그만큼은 장담할 수 있었다. 밀레나는 잘못된 생각에 빠진 채였다.

이에샤가 검술의 신에게 사랑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고강한 검술을 지니고도, 알디온 후작 저택의 뒤뜰에서 쓸쓸하게 사그라졌을 수 있었다. 이에샤는 움직였다. 자기 뜻으로. 자기 힘으로. 제국 기사단 입단 시험이라는 무대에 걸어 나갔다.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 백화 기사단장으로서 자리 잡았다. 그 모든 일이 운으로 이루어졌다고?

밀레나의 말도 옳았다. 누구나 싸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생각보다 흔하고 평범할 따름이었다.

“너도 싸울 수 있어.”

“나한테도 입바른 소리를 해 주는 거야? 상냥해졌네, 이에샤 언니.”

“네가 화내고 투쟁한 결과가 이거잖아. 너 때문에 몇 사람이 죽고 다쳤는지 알아?”

밀레나가 “읏.” 하고 대꾸를 삼켰다. 이에샤는 평상시처럼 검을 허리띠에 묶었다. 양손을 들어 보였다. 짙푸른 눈동자가 밀레나를 곧게 향했다.

“잘못된 싸움에 뛰어든 대가를 치뤄.”

“……대가? 어떻게?”

“문초실로 가. 그다음엔 감옥으로. 그다음엔, 형장으로 보내지겠지. 그렇게 끝내. 이딴 마법의 제물 같은 거로 자신을 불사르지 말고, 사람으로서 죽어.”

밀레나가 살아날 길은 없었다. 벨체터 무리가 이겨서 수도가 지옥으로 바뀌더라도 밀레나는 죽을 터였다. 마파랑을 진압하더라도 극형이 기다리리라. 이에샤는 밀레나가 제국 귀족으로서, 제국법의 심판을 받았으면 했다. 그것이 밀레나의 언니로서 베풀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친절이었다.

“오늘 다친 사람들은 운이 나빠서 다친 게 아니야. 네가 죄를 지어서 다친 거지. 세상은 그렇게 굴러가.”

“아니야.”

“네가 잘못 생각했어. 아니, 사실은 깨달았으니까 이런 일을 벌인 거지? 싸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걸. 시키는 대로 휩쓸리기만 해선 아무것도 네 손에 안 남을 테니까!”

“아니야! 아니야!”

“너한테 사과할게.”

밀레나는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내저어 댔다. 이에샤는 눈을 질끈 감았다. 10년 전에 잘못 끼운 단추를, 지금이라도 바로잡고 싶었다.

“우리 엄마한테 바친 꽃을 던져 버려서 미안해.”

밀레나가 우뚝 멈추었다. 이에샤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이에샤는 웃었다. 결계에서 끌려 나왔을 때의 밀레나처럼. 미워서 견딜 수 없는 상대방에게 웃어 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너도 네가 해친 사람들한테 사과하렴.”

빛을 잃고도 아름다운 파란색 눈에서 눈물방울이 넘쳐 났다. 가냘픈 어깨가 떨렸다. 아미가 일그러졌다. 밀레나는 온몸으로 슬픔과 아픔과 괴로움을 내비쳤다.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에샤는 밀레나가 하는 말을 놓치지 않고자 귀를 기울였다. 오늘만은 전하고 싶은 바를 모두 들어 주고 싶었다.

“안 되지, 밀레.”

“뭐?”

“뭘 받아들이고 있는 거야. 어디까지나 화려하게 죽고 싶댔잖아? 세상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남고 싶다며.”

이에샤는 서둘러 검을 끌러 냈다. 서늘한 목소리는 머리 위에서 울렸다. 직감이 외쳤다. 이번 일을 꾸민 마법사가 나타났다고. 고개를 쳐들었다. 공중에서 바닥에 있는 양 드러누운 남자가 보였다. 가만하던 셈브리온이 “아고르!” 하고 외쳤다. 새빨간 브링을 쏘아 보냈다. 그러나 아고르가 한 박자 빨랐다. 딱! 손가락을 튕겼다.

발밑에서 새파란 불길이 치솟았다. 하늘의 별들이 번뜩번뜩했다. 이에샤는 가까스로 검을 쥐었다. 반대쪽 손으로 밀레나의 팔목을 낚아챘다. 엘테르트가 있는 쪽으로 달렸다. 엘테르트는 까무러친 발렌티아를 추슬렀다. 이에샤가 검을 휘둘렀다. 브링이 장막처럼 펼쳐졌다. 동시에 붉은 유성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위가 먼지와 폭음으로 뒤덮였다. 더운 바람이 불었다.

============================ 작품 후기 ============================

작가가 오늘부터 2박 3일간 여행을 갑니다...

하필이면 비가 온다고 하니 숙소에서 글이나 쓰다 돌아올 거 같지만...

아무튼 이틀에서 사흘 정도 업데이트가 없을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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