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1 12. 싸울 수 있는 이 =========================
셈브리온은 밀레나가 운이 나빠, 이에샤를 향한 마법에 걸려들었다고 에둘렀다. 하나 이에샤는 결과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밀레나가 달라진 일도, 몸을 망친 일도, 맹인이 된 일도 저 때문이었다. 진실을 알고 이에샤는 밀레나의 소름 끼치는 변화를 돌이키며, 안도했다. 그러한 자신이 놀라웠다. 혐오스러웠다. 밀레나가 불쌍해서? 아니었다. 상대가 밀레나라도 연민이나 미안함보다 ‘내가 아니라 다행이다.’ 하는 생각부터 들어서였다. 엘테르트라면 자리를 박차고, 밀레나를 살피러 갔으리라.
이에샤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쪽은 공적인 부분이었다. 황궁을 쑥대밭으로 만든 데에 일조했다는. 이에샤는 제가 밀레나의 선택을 부추긴 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알디온 저택에 갔을 때, 조금만 상냥하게 굴었다면. 바라는 말을 해 주었다면. 밀레나는 벨체터의 마법사에게 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다 무슨 소용이야.’
물은 엎질러졌다. 밀레나는 극형을 받아도 모자랄 죄를 지었다. 알디온 후작 부부도 용서받지 못하리라. 친아버지가 큰일을 겪을지 모른다 생각하면서도, 이에샤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별수 없었다. 밀레나를 찾아내, 마파랑을 끝내는 일만이 긴요했다. 자기 손으로 피가 섞인 동생을 죽이게 될지라도.
씁쓸하기는 했다. 밀레나가 머지않은 죽음을 앞당기면서까지, 사건을 벌일 만큼 절망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밟혔다. 이에샤가 속없다고 비웃어 온 일들―좋은 집안에 시집가는 데 목을 맨다든가, 남자에 기대어 인정받으려고 한다든가―이 밀레나에게는 중했던 것이었다. 밀레나는 밀레나대로 치열하게 산 모양이었다. 일찍 깨달았다면 이에샤는 밀레나를 지금만큼 미워하지는 않았을지도 몰랐다.
얼마 전까지 이에샤는 어렸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또래보다 설었다. 남의 괴로움을 이해하기에는 턱없었다. 백화 기사단장이 되어, 수많은 여자를 만나며 깨달았다. 여성이 쓰는 굴레를. 예전에 만난 노부인, 헤리카 벨제아를 떠올렸다. 남편에게 삶을 송두리째 맡긴 점이 에이릴리와 닮았다고 느꼈었다. 생각해 보면 밀레나도 마찬가지였다.
친자 감정 시약이 든 병은 헤놀, 벨타르테오와 싸우며 깨져 버렸다. 어차피 밀레나가 결계에 들어갔다면 부질없었겠으나. 붓꽃궁이 정답인 줄 확신하지는 못했다. 감만이 외쳤다. 이곳이라고. 이곳에 밀레나의 결계로 이어지는 길이 있을 터였다.
“세비, 당신 결계를 뚫고 들어가는 방법 같은 건 모르지?”
“알면 묻지 마…….”
“정말 쓸모가 없네.”
셈브리온은 억울해졌다. 기분 탓일까? 이에샤가 쌀쌀맞아진 것 같았다. 옛날이라면 “내 세비가 그런 거 좀 모를 수도 있지! 왜 기가 죽고 그래!” 하고 외쳤을 녀석이었다. 이에샤 자신은 깨닫지 못한 듯싶었다. 셈브리온으로서는 낯설기 그지없었다. 모르는 사이에 이에샤가 훌쩍 자라, 품을 떠난 기분이었다. 하나 서운해할 때가 아니었다.
“나 옛날에 결계 관련 책을 읽었어. 거기에 외부에서 결계를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적혀 있었어. 촉매를 없애야 한다고.”
“촉매랑 핵은 다른 거야?”
“음, 촉매는 결계 바깥. 핵은 결계 안.”
“아하. 이해했다.”
이에샤는 아랫입술을 물고 생각에 잠겼다. 촉매는 결계를 이루었고, 핵은 결계를 지탱했다. 어느 쪽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다. 결계가 붓꽃궁에 자리 잡았다면, 만들 때 쓰인 촉매가 있을 터였다. 별궁 전체를 뒤집고 때려부수기는 어려웠다.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도 구조물 같은 건 아닐 거야. 오래된 듯 보이는 물건도 아니야. 지금 이 지경이 됐더라도 평소 에브라힐이 그렇게 호락호락 뚫리지는 않아. 결계는 예전부터 준비했을 테니 새로 생긴 듯한 물건이 촉매일 가능성이 높겠지. 하지만 정원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가 핵일 수도 있는데, 정확하게 찾아낼 가능성이라고 해 봐야…….’
“응? 나비?”
셈브리온이 중얼거렸다. 이에샤는 꼬리를 물던 상념을 잘랐다. 셈브리온을 돌아보았다. 눈길이 닿는 곳을 좇았다.
“저건?”
얼떨떨한 일이었다. 마력의 나비는 마파랑을 일으키는 데 쏟아부은 줄 알았건만, 한 마리가 남았다. 나비가 팔랑팔랑 날갯짓했다. 이에샤와 셈브리온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이에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했다. 붓꽃궁에 날아다니던 나비들은 하얗고 반투명한 몸뚱이를 지녔다. 눈앞의 나비는 금색으로 빛났다.
문득 생각했다.
‘레이디 엘로나.’
멘델린 공작가의 문장은 독수리였다. 황실의 것은 사자였고. 하지만 선황제의 맏딸이자 제국인의 사랑을 받았던 엘로나 알타로샤 공주 하면, 사람들은 나비를 떠올렸다. 호수에서 뱃놀이를 즐기다가 잠들었더니, 나비 한 마리가 엘로나의 옆머리에 앉은 적이 있었으므로. 결혼 전의 일화였다.
이에샤는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따라가자.”
“저걸?”
“부르고 있어.”
셈브리온이 어리둥절한 낯을 했다. 부른다니. 밀레나를 일컫는 것일까? 아니리라. 이에샤는 기쁜 듯이 웃었다. 발긋하게 달아오른 뺨이 어여뻤다. 짙푸른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벅차는 마음을 누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셈브리온은 얼이 빠졌다. 제 허리에 매달리며 놀던 잿빛 머리카락 꼬마가, 연모에 젖어 든 표정을 지은 채였다.
“내 남자는 내가 구해야지.”
“…….”
“그리고,”
이에샤는 숨을 들이마셨다. 얼굴에 굳은 빛이 떠올랐다. 셈브리온은 나비가 날아가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자신은 이에샤를 지키면 그만이었다. 이에샤도 움직였다. 나비가 나풀거리며 정원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이에샤는 토해 내듯이, 끊었던 말을 맺었다.
“내 동생의 이야기는 내가 들어 줘야 하고.”
밀레나는 탁상에 팔꿈치를 댔다. 손바닥으로 턱을 괴었다. 멍한 모습이었다. 따분해 보이기도 했고, 지쳐 보이기도 했다. 발렌티아는 깨어날 낌새가 없었다. 결계로 끌려오며 충격이 컸던 모양이었다. 밀레나는 엘테르트에게 자리를 권하지 않았다. 의자가 두 개뿐이었으므로. 엘테르트는 바닥에―무릎을 세우고 종아리를 엇간 자세로―주저앉았다. 집게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조마조마했다.
밀레나가 하품했다. 엘테르트를 홱 돌아보았다. 몸가짐새가 전에 없이 변덕스러웠다.
“지금쯤 에브라힐은 어찌 됐을까요? 엘테르트 님.”
“모릅니다.”
“화나셨어요?”
“말 붙이려 하지 마십시오. 부역자와 대화하기는 역겨우니까.”
부역자라……. 저에게 붙기에는 거창한 낱말이었다. 화풀이를 했을 따름이었다. 홀로 스러지기 억울해서, 퉁명스러운 이복 언니 때문에 볼품없어진 제가 불쌍해서, 그동안 쌓인 울화가 많아서. 밀레나는 자신이 저지른 짓을 정확하게 알았다. 이제는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포장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엘테르트는 땅바닥에 앉은 채로도 아름다웠다. 흰 꽃잎이 소복한 가운데 시름에 잠긴 청년. 정취가 제법이었다. 밀레나는 엘테르트의 껍데기를 좋아했다. 엘테르트가 단춧구멍만 한 눈에 주먹코를 지녔어도, ‘멘델린 소공작’은 매력적이었으리라. 하지만 겉모습이 아름다웠기에 탐났다. 그러한 스스로를 부정해 왔다. 남자의 얼굴 따위에 홀리는 여자란 음탕하고, 칠칠치 못하다고 믿었다. 돌이키면 바보스럽기 그지없었다.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엘테르트 님 같은 남자가 왜 이에샤 언니처럼 괴팍한 여자를 좋아할까.”
“앨저 경을 욕보이지 마십시오.”
“지금 생각해 보면, 괴팍하고 신선해서 마음이 끌리셨을까요?”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던 엘테르트가, 밀레나를 바라보았다. 쏘아본 것이 아니었다. 잔잔하게 가라앉은 눈빛을 띠었다. 밀레나는 작은 새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참말로 궁금했다. 이에샤는 독특했기에 엘테르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저는 널리고 깔린 아가씨여서 안 되었을까?
엘테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몇 달 동안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한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설마, 겨우 그만큼으로?”
“그 밖에 뭐가 필요합니까? 앨저 경이 유별난 건 사실이지만, 그 유별함이 나한테 좋게 다가올 수는 없었습니다. 검이니 기사니 하는 건 질색이라.”
다른 여자와 동고동락했다면 그녀를 사랑했을지도 몰랐다. 어찌되었든 엘테르트 곁에 있었던 사람은 이에샤였다. 일에 파묻히는 모습을 지켜보며, 씩씩하고 끈질긴 면모에 반했다. 이에샤가 뭇 여성과 달라서가 아니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여성 중 이에샤만이 엘테르트 가까이에 있었을 뿐이었다.
품에서 따뜻한 느낌이 피어올랐다. 엘테르트는 엘로나가 열두 번째 생일 선물로 준 아티팩트를 떠올렸다. 새겨진 마법의 이름은 ‘마음이 머무르는 장소’. 애버토스가 밤중에 엘로나를 불러내기 위하여 주문한 마법이었다. 셔츠 안쪽의 목걸이가 달아올랐다는 것은…….
한순간, 세상이 조각났다. 밀레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돌풍이 불었다. 새하얀 꽃잎이 어지럽게 나부꼈다. 그것들은 땅에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서 사그라져 갔다. 테이블과 의자도 사라졌다. 발렌티아의 몸이 무너졌다. 엘테르트는 담담한 낯으로 이야기했다.
“그러니 내가 앨저 경을 사랑한 건 지극히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말은 내 앞에서만 해요!”
새카만 검을 든 여인이 밀레나와 엘테르트가 있던 세계에 뛰어들었다. 차림새가 너덜너덜한 채였다. 이에샤는 밀레나에게 돌진했다. 밀레나는 목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춘 칼끝을 내려다보았다. 눈동자에서 초점이 가셨다. 후각만으로 비릿한 쇳내를 느끼며,
웃었다.
“죽지 않고 여기까지 왔구나. 역시 언니는 굉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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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보이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