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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160화 (160/164)

00160 12. 싸울 수 있는 이 =========================

“뭐야, 저건?”

“앵지! 마법이!”

오시르가 팔을 거두어들였다. 반대쪽 손으로 반지를 감싸 쥐었다. 고리가 불타는 듯이 뜨거웠다. 아티팩트가 망가졌을 때 나타나는 반응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오시르는 아고르의 마법을 이어받은, 뛰어난 마법사였다. 일을 그르치기는 처음이었다.

“마법이 깨졌어. 저건 아마 혼혈일 거야. 아니, 혼혈이라도 이 정도 거부 반응은 이상한데.”

“무슨 소리야?”

“위험해. 이건…….”

말을 잇기도 전이었다. 머리를 부여잡았던 스란이, 떨어뜨린 롱소드를 주워 들었다. 움직임이 번개 같았다. 기합을 내질렀다. 랭기디아와 오시르 쪽으로 달려들어 왔다.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랭기디아는 피해 내지 못했다. 단검을 쳐들었다.

랭기디아의 검은 공격을 막자마자, 종잇장처럼 잘려 나갔다. 눈을 부릅떴다. 터무니없었다.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부류뿐이었다. 평범한 롱소드에서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뒤엉킨 빛이 뿜어져 나왔다.

“브링이라니!”

눈 깜짝할 사이였다. 스란이 랭기디아의 심장을 찔렀다. 랭기디아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근육으로 덮였지만 날씬한 몸이 허물어졌다. 주검이 바닥을 굴렀다. 오시르는 스란과 랭기디아를 번갈아 보았다. 어느 쪽의 눈동자도 검었다. 어느 쪽도 눈빛이 흐리멍덩했다. 스란은 반쯤 넋을 놓은 채였다.

랭기디아가 눈을 감지 못한 것이 신경 쓰였다. 오시르는 랭기디아를 좋아했다. 빌버에서 여자와 어린아이는 약자였다. 랭기디아는 오시르가 어른들에게 업심당할 때마다, 자기 일처럼 뒷받침해 주었다. 입담도 몸가짐도 거칠었으나, “언젠가 벨체터에도 황금이 흐를 거야!” 하며 웃던 동료였다.

한숨을 지었다. 델페레타 침략 따위에는 관심 없었다. 굶어죽게 생긴 부랑아를 아고르가 거두어 주었고, 살아남고자 마법을 배웠다. 아고르가 바랐기에 빌버를 도왔을 따름이었다. 기실은 살고 싶다는 마음조차 옅었다. 오시르의 아버지는 왕실과 귀족파의 싸움에 휘말렸다. 어머니는 벼랑에서 몸을 던졌다. 두 죽음을 지켜본 오시르는 세상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조금 망가지기는 했지만―저희가 망가뜨렸지만―제국 땅에서 눈감는 것도 좋으리라. 벨체터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죽여.”

“…….”

“죽여 줘.”

스란은 불쌍하리만치 여윈 남자아이를 바라보았다. 메마른 낯에, 누군가가 떠올랐다. 아이는 참말로 죽고 싶어 했다. 벨체터 난민을 사랑했다가, 결혼해 주자마자 버림받았던 스란의 어머니처럼. 세상에 배신당하고 배신당하여 모든 기쁨을 잊어버린 얼굴이었다. 오시르의 나이는 스란이 집을 뛰쳐나왔을 무렵과 엇비슷했다. 스란은 스르르 팔을 내렸다.

“어린애를, 죽일 순 없어. 적국의 마법사, 라도.”

숨이 찼다. 말소리가 끊어졌다. 랭기디아를 해치운 뒤부터 온몸이 매맞은 것처럼 아팠다. 처음 브링을 써서인지, 원래 브링이 체력을 갉아먹는 힘인지 알 수 없었다. 이에샤나 기사단장들이 멀쩡하던 것을 떠올리면 제가 이상한지도 몰랐다. 무릎이 꺾어졌다. 스란은 무너지듯이 주저앉았다.

“……가…….”

“갈 곳 같은 건 없어. 그냥 죽여 줘.”

“몰라. 네가 알아서 죽든지, 살든지…….”

그렇게 말하고, 옆쪽으로 넘어졌다. 바닥에 드러누웠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오시르는 멍하니 스란을 내려다보았다. 지금이라면 랭기디아의 원수를 갚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오시르에게 복수 따위는 무의미했다. 살기도 귀찮은 마당이었다. 남 생각할 힘이 남았을 리가 없었다.

허리에 찬 주머니를 끌렀다.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유리병과 볼품없는 돌멩이였다. 포션이 든 병은 스란의 곁에 내려놓았다. 아고르의 작품처럼 효과가 좋지는 못하겠으나, 도움은 될 터였다. 이동 마법이 담긴 돌멩이를 그러쥐었다. 델페레타의 북쪽 국경으로 가게 된 아티팩트였다. 하지만 마파랑 속에서 썼다가는 어디로 떨어질지 헤아릴 수 없었다.

아티팩트를 발동시켰다. 멀리서 “스란 경!” 하고 부르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왔다.

“브링어의 제자한테서 가끔 보이는 일이네.”

체사로가 말문을 떼었다.

네세라는 들것에 누운 스란을 살펴보았다. 체사로가 네세라에게도 쉬라고, 발목을 염려해 주었지만 듣지 않았다. 스란의 낯빛은 잔잔했다. 핏기도 돌아왔다. 적이 흘리고 간 포션 덕분이었다. 독일지도 모른다고 경게했으나, 엘먼이 괜찮노라 했다. 황실 마법부에서 만든 포션은 부상자를 돌보느라 바닥났다. 쓸 수밖에 없었다.

적 가운데 마법사 소년은 놓친 모양이었다. 스란이 깨어나야 어찌 된 영문인지 알 터였다. 네세라로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스란이 살아서 감사할 따름이었다.

“평상시 수련하면서 접한 스승의 브링이 몸에 찌꺼기처럼 남았다가 우연히 자기 브링과 섞여서 터져 나오는 거지. 그럼 한순간이지만 브링을 쓸 수 있네.”

숙련된 무인이라면 몸에 브링이 쌓였기 마련이었다. 그것을 끌어낼 수 있는 자가 브링어였다. 네세라는 달아나다가, 스란의 브링이 내는 빛을 보았다. 빨강과 파랑이 뒤섞인 채였다. 돌이키면 푸른색은 이에샤의 브링과 닮았다.

“브링어가 된 건 아닐세. 하지만 그런 일을 겪은 자는 나중에 브링어가 될 가능성이 높아. 한 번 경지에 닿아 본 감각이 있느냐, 없느냐는 큰 차이가 나거든.”

“여자는 브링어가 못 된다고 누가 그랬는지. 눈앞에서 비웃어 주고 싶네요.”

야멸차게 투덜거렸다. 체사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네세라의 말대로였다. 이에샤 말고 여성 브링어가 없었던 까닭은, 무예를 닦는 여성이 드물기 때문에 지나지 않았다. 스란마저 경지의 문을 두드렸다. 여자가 브링을 쓰지 못한다는 소리는 바보스럽기 그지없었다.

조금 전, 서쪽 대피소로부터 이실리아가 들어왔다는 전갈을 받았다. 네세라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백화 기사단이 책임을 뒤집어쓸 일은 없을 성싶었다. 체사로는 스란과 네세를 치하했다. 덕분에 마파랑이 인위적인 것이라는 확신과 적의 정체를 얻었다. 큰 공로였다.

“벨체터란 말이지…….”

“에버렛 경?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아닐세. 너무 뜻밖의 상대라서 놀랐을 뿐이네.”

한숨을 쉬었다. 벨체터라는 이름에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셈브리온 데힐이 얽히지는 않았을까, 걱정되었다. 사랑하는 제자를 남겨 두고 떠난 일이 마음에 걸렸다. 체사로는 셈브리온에게 맞서고 싶지 않았다. 친우이자 동경하는 대상이어서가 아니었다. 두려웠다. 셈브리온이 나선다면 델페레타에는 이길 수 있는 브링어가 없었다.

체사로가 시름에 겨워할 무렵, 셈브리온과 이에샤는 남동쪽으로 달렸다. 마법부가 쓰는 별궁―붓꽃궁이 있는 방향이었다.

‘결계로 도망쳤단 말이지.’

이에샤는 찬찬하게 따져 보았다. 에브라힐 궁전 남쪽의 마력은, 다섯 건의 마력 오염 사태로 흐트러졌다. 엘먼과 마르셀이 입을 모았다. 한두 해 안에 남쪽에서부터 마파랑이 터질지도 모른다고. 셈브리온은 인공 마파랑에 어마어마한 마력이 든다고 했다. 남 에브라힐과 가까우면서 황실 마법사들이 마력을 모아 두는 곳. 밀레나는 붓꽃궁에 숨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자신은 없었다. 이에샤는 엘테르트나 라제카, 미엘라처럼 똑똑하지 못했다. 눈치가 재빠를 뿐이었다. 논리적으로 행동하는 데는 서툴렀다. 다른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밀레나의 결계가 붓꽃궁에 있으리라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

“세비.”

“왜?”

“내 애인이 밀레나랑 같이 있었어.”

“…….”

“죽었을까?”

셈브리온은 대답을 삼갔다. 마파랑의 진원지에 있던 사람이 살았을까. 희망을 가지기 어려운 물음이었다. 이에샤에게 슬픔을 안겨 주기도 껄끄러웠다. 이에샤는 덤덤해 보였으나, 셈브리온은 속마음에 깔린 불안감을 읽었다.

“결계로 도망쳤다는 건 어떤 식이지? 난 일이 터지자마자 결계에 빠졌을 때, 붙어 있던 동료랑 함께였어.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면 그 사람도 밀레나랑 같은 결계로 가지는 않았을까?”

“글쎄. 이-샤는 끌려간 거였고, 아가씨는 자기 스스로 길을 열어 들어간 거니까.”

“역시 그런가.”

이에샤는 한숨을 삼켰다. 포기하기는 일렀다. 저도, 셈브리온도 마법에 까막눈이었다.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었다. 어림짐작할 따름이었다. 엘테르트는 괜찮을지도 몰랐다. 주검이라도 찾기 전까지는 꺾이지 않으리라. 이를 악물었다. 달음박질에 박차를 가했다.

붓꽃궁이 나타났다. 이에샤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마력의 나비가 날아다녀, 멀리서도 희끗희끗하게 빛나던 정원이 어두컴컴했다. 나비는 한 마리도 찾을 수 없었다. 맞게 온 성싶었다. 버들궁이나 다른 별궁에서도 보았던 그림자가 건물에 덕지덕지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결계가 눈에 비칠 리는 없었으나, 이상한 점을 찾을지도 몰랐다. 다른 곳과 비슷했다. 위화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애가 끓었다. 서둘러 밀레나를 끌어내야만 했다. 핵을 파괴해야 마파랑을 걷잡을 수가 있었다. 셈브리온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내 대신 눈이 멀었다고…….’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브링어가 그렇게...쉬운 경지가 아니라서...이에샤가 규격외라서...

나리 님, eiren 님 후원 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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