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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158화 (158/164)

00158 12. 싸울 수 있는 이 =========================

“후우!”

네세라는 숨을 돌렸다. 수레국화궁은 여전했다. 난장이었다. 사람 수백이 모인 만큼 대피가 더뎠다. 두 시간째 피난길을 이끌었건만, 줄이 줄어들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네세라의 체력은 뭇 귀족 여자보다 나은 편이었다. 하나 이에샤와 스란―하녀였던 미엘라도―에 견주면 턱없었다. 지쳤다. 침대에 뛰어들고 싶었다. 달신교 사제가 만들어 준 탈리스만 덕분에 마력 오염은 면했으나, 마파랑 속에서는 숨쉬기가 벅찼다. 화재와 우박과 낙뢰가 되풀이되었다. 신경이 곤두섰다. 아직도 우왕좌왕하는 이가 많았다. 네세라는 수재민 구호 활동에 나섰던 나날을 돌이켰다. ‘더 버틸 수 있어.’ 하고 되새겼다.

“괜찮으세요? 네세라 아가씨.”

“괜찮아요. 슈리 사제야말로 괜찮은가요?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사제님이 힘들어도 제가 알아채지 못할 거예요. 힘들다 싶으면 꼭 말씀하세요.”

“감사합니다. 사원에서 뵐 때도 생각했지만 아가씨는 참 다정하시네요.”

흐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정겹다, 상냥하다 하는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묘했다. 페리튼 자작 부인은 살뜰한 여인이었다. 어린 네세라를 데리고 사용인들이 일하는 곳을 누비며,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었었다.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았던 것 같았다. 네세라에게 아버지와 동생들을 챙겨야 한다고 이르고는 했다. 여자니까 부드럽게 웃으렴. 장녀니까 야무지게 굴어야 한다. 귀족이니까 아랫것에게 본을 보여야지. 그러한 이야기를 지겹도록 들었다. 네세라는 이따금 자기 자신이 어머니의 손에 만들어진 듯하다고 느꼈다.

“페리튼 경. 마시고 해.”

“어머, 스란 경. 고마워요.”

스란이 다가왔다. 손에 가죽 주머니를 든 채였다. 네세라에게 내밀었다. 네세라는 주머니를 받아, 어귀를 벌렸다. 입가로 가지고 갔다. 꼴깍꼴깍 들이켰다. 몸가짐 바른 아가씨라면 컵에 따라 마셔야겠으나, 면치레할 때가 아니었다. 스란은 작은 비스킷을 씹어 먹었다. 제국 기사단 천막에서 얻어 온 것들이었다. 상황이 긴박하니 백화 기사에게도 고분고분하게 물자를 내주었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앨저 경한테 검술 좀 가르쳐 달라고 할걸 그랬어요. 할 일은 넘쳐 나는데 힘이 부치니 갑갑하네요.”

“여자 귀족이 검 같은 걸 배우면 고생하잖아. 앨저 경을 봐.”

“안 배운다고 편하게 사는 것도 아닌걸요, 뭐.”

그렇기는 했다.

네세라의 옆쪽을 힐끗했다. 하이힐이나 무거운 장신구 따위가 산더미 같았다. 스란도 이에샤와 비슷한 감상을 느꼈다. 귀족 여자들이 이토록 순순할 줄은 몰랐다―같은 귀족인 네세라가 말하여 따랐을 수도 있었으나. 남은 사람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확연하게 적었다. 여자는 귀족과 하녀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 대피 시설로 들어간 뒤였다.

숱한 잣대와 굴레가 주어져서일까. 여성은 남이 옳은 소리를 하면 따라 주는 편이었다. 제 감정보다 질서를 무겁게 여겼다. 자존심 센 남자 귀족은 변변찮은 가문의 기사가 이래라저래라 하면 참지 못했다. 한숨이 나오는 일이었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정리됐어. 슬슬 겨우살이궁에 가 보고 싶은데.”

“저도요. 황후 마마는 오늘도 안 나오셨으니까.”

“마마의 옥체에 문제가 생기면 백화 기사단 책임이야. 무사히 피신하셨기만 바라야지.”

스란과 네세라는 걱정스럽게 이야기했다. 이실리아 황후는 신년맞이 무도회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문안 인사조차 물리쳤다. 에브라힐 서쪽에도 대피 시설이 있었지만, 겨우살이궁에서 몇 분쯤 걸어야 했다. 이실리아의 걸음으로 괜찮았을지 몰랐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인기척이 났다. 스란이 고개를 돌렸다. 까만 눈이 휘둥그레졌다.

“실례합니다.”

말을 건 여자는 무도회 참가자답게 화장이 짙었다. 반면에 차림새는 수수했다.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비녀 말고는 장신구를 내던진 듯싶었다. 놀라운 점은 따로 있었다. 칼로 찢어 낸 양 너덜너덜하게, 치마와 속치마가 무릎 높이에서 끊어졌다. 구두를 신지 않은 발과 실크 스타킹이 드러났다. 여자의 몰골에 네세라도 질겁했다.

네세라는 여자가 누구인지 아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알베라 영애! 누가 이런 심한 짓을!”

“놀라지 말아요. 제 스스로 한 일이니까요, 페리튼 영애. 있잖아요, 제 어머니가 보이지 않아요. 대피 시설에도 안 계시고 여기저기 찾아봤지만 허탕이었어요. 혹 수레국화궁 시녀장인 알베라 후작 부인을 보지 못하셨나요?”

스란과 네세라는 답을 삼갔다. 둘은 발렌티아가 3층 객실에 있었던 줄 알았다. 밀레나가 마파랑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밀레나를 돌보던 발렌티아가 무사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발렌티아의 딸, 엔시아에게 바른 대로 고하기는 힘들었다. 어지러운 와중에 혼란을 더하고 싶지 않았다.

“알베라 부인께서는, 저, 그게…….”

“잠깐만요. 지금 황후 마마를 뵈어야 한다고 하셨죠? 아, 엿들은 건 아니에요. 다가오다 보니 들렸어요.”

“괜찮아요. 그렇긴 합니다만, 왜?”

“어머니가 황후 마마랑 함께 계실지도 모르겠어요. 매년 그러시거든요, 마마께 올해야말로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겠느냐고 자꾸만 부추기셔서.”

네세라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실리아의 몸은 벅적한 자리에 나서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한 사람에게 무도회에 나오라고 하다니. 발렌티아 알베라가 철딱서니 없다는 소문이 날 만했다.

엔시아는 헛다리를 짚었으나, 수긍해 두는 편이 나을 성싶었다. 발렌티아가 이실리아 곁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면 엔시아도 대피 시설로 돌아가리라. 스란도 같은 생각을 떠올린 듯했다. 네세라가 입을 열려는 참이었다.

“그래요! 틀림없어. 두 분, 한시라도 빨리 겨우살이궁을 보러 가 주지 않으시겠어요? 이 유실물 더미라면 제가 지켜 드릴게요. 일도 대신할게요.”

“예?”

“어머니가 걱정돼서 미치겠어요. 제 차림 좀 보세요. 어머니를 찾아다니기 편하도록 이렇게 한 거예요. 그러니까 제 말은.”

주절주절 늘어놓던 엔시아가 멈칫했다. 한숨을 지었다. 숨결에 걱정이 묻어났다. 철부지 같은 어머니여도 발렌티아를 퍽 사랑하는 모양이었다.

“전 다른 사람들처럼 궂은일을 꺼리지 않는단 거예요. 페리튼 영애라면 아시겠죠? 오며 가며 정리하시는 모습을 봤습니다. 똑같이 할 수 있어요. 제가 이 자리를 맡을 테니 제발 빨리 어머니를 찾아 주세요.”

“하지만 알베라 영애,”

“좋아요.”

스란이 말리려 했으나, 네세라가 대답했다. 엔시아의 낯빛이 환해졌다. 스란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네세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네세라는 코트의 단추를 끌렀다. 자보가 달린 블라우스가 드러났다. 엔시아의 어깨에 상아색 정복 코트를 둘러 주었다. 걱정 말아요, 스란 경.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베라 영애랑은 달신교 봉사 활동에서 알게 된 사이니까. 백화 기사 대행이라는 증표로 이걸 빌려줄게요, 입고 있어요. 남은 일은 많지 않을 테니 뒤를 부탁해요. 그리고 모든 여성이 대피하면 당신도 시설로 돌아가세요. 꼭이에요.”

“고, 고마워요! 페리튼 영애.”

“뭘요.”

달신교에서 만났다는 이야기에, 스란도 알아들었다. 엔시아 알베라는 네세라와 같은 부류일 터였다. 맡겨 봄 직했다. 네세라의 뜻도 읽었다. 발렌티아에 관해서는 덮어 두고 엔시아에게 일을 넘기려는 모양이었다. 자리를 비우지 않고 곧장 겨우살이궁으로 향할 수 있도록. 엔시아에게는 미안스러웠지만, 황후의 안위가 중요했다.

발렌티아가 죽었다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에르실반도 무사하지 않았는가. 네세라는 발렌티아가 살아남았기를 바라며, 걸음을 옮겨 놓았다. 스란도 따라붙었다.

“여기서 겨우살이궁까지는 뛰어도 30분이야.”

“방치된 이동 마차 같은 게 없을까요?”

“말 몰 줄 알아?”

“탈 줄은 알아요.”

스란 또한 암무에서 승마를 배웠다. 말을 탈 줄 안다면, 이동 마차에서 말만 풀어내는 편이 좋을 성했다. 둘은 계획을 정했다. 움직이기로 했다. 뒤쪽에서 엔시아가 “조심하세요! 부탁드려요!” 하고 외쳤다. 네세라는 쓰게 웃었다.

“앨저 경이 없을 뿐인데 너무 무서워요. 스란 경은 그렇지 않나요?”

“……감히 브링어를 대신하겠다고는 못 하겠지만, 나도 쓸만한 검사야.”

“경을 못 믿어서가 아니에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개를 치켜들었다. 얼룩진 하늘이 무시무시한 느낌을 자아냈다. 새빨간 별들이 당장에라도 쏟아져, 땅을 뒤흔들 것만 같았다. 마파랑이라면 그러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번 일이 너무 큰 재앙이라서 그렇지.”

무서웠다. 네세라는 기사였다. 마파랑으로부터 달아나서는 안 되었다. 목숨을 잃어버릴지도 몰랐다. 네세라에게는 꿈이 많았다. 여성의 삶에 이바지하겠노라 다짐하고, 짜 둔 계획이 숱했다. 초조감으로 손이 떨렸다. 날씨가 흐트러지고 괴물이 나타나는 재앙 속에서, 어찌하면 살 수 있을까? 까마득했다.

“그동안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가 쓰러지신 틈에 기부도 마음껏 하고, 봉사도 마음껏 하고. 그런데…….”

“그런데?”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네요. 오늘 당장 죽기는 절대로 싫어요.”

스란은 입을 다물었다. 네세라의 속을 알 것 같았다. 매한가지 처지였다. 스란에게도 황제에게 가장 큰 신임을 받겠다는 야망이 있었다. 그를 위하여 암무마저 뛰쳐나왔다. 백화 기사가 되었다. 사방에서 찍어 누르려 들지만, 이오르가 굽어살피는 곳으로.

그리고 이에샤와 미엘라와 네세라를 만났다. 암무의 남자 동료에게는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을 품었다. 동질감이란 애정과도 맞닿았다. 피식하고 웃어 버렸다. 일이 끝나면 백화 기사단, 달신교 사제들, 시더를 모아 건배라도 하고 싶었다.

“나도 그래. 마시고 싶은 술이 잔뜩 있어.”

“어휴! 이런 때에까지 술타령이에요?”

“거 여자가 술 좀 밝힐 수도 있지.”

네세라의 입버릇을 흉내 내 보였다. 네세라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뒤, “푸훗!” 하는 소리가 터졌다. 마음이 가벼워진 듯싶었다.

따지자면 위기는 기회이기도 했다. 백화 기사가 공을 세우면, 기사단의 영향력을 황궁 밖으로 넓힐 수 있을지도 몰랐다. 우선은 나라 제일의 여인이 무사해야만 했다. 두 사람은 겨우살이궁 쪽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 작품 후기 ============================

여러 곳에서 여러 여자가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신경을 전혀 못 쓰거나 까먹어서 인사가 늦었네요...

했네했어 님, 초네 님, 아띠미리 님 후원 쿠폰 감사합니다ㅠㅁ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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