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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157화 (157/164)

00157 12. 싸울 수 있는 이 =========================

아고르나 빌버 조직원의 마음은 알았다. 셈브리온 또한 손을 더럽혀서라도 안녕을 되찾고 싶었으니까. 어리석은 일을 했었다. 벨체터 내전에 불을 붙인 자신은 이러쿵저러쿵해서는 안 될지 몰랐다. 빌버에도 제가 귀족파의 지도자를 암살했다는 이야기는 밝히지 못했다. 실수를 들추어내기가 부끄러웠으므로. 그러한 주제에, 나라에 이바지하려는 이들을 가로막는 짓은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델페레타를 어지럽혀서야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샤가 제국인인 까닭도 있었지만, 델페레타는 벨체터에 해를 끼치지 않았다. 기사를 파병한 것이 내정 간섭을 위해서라고 믿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무너지지 않는 하늘탑’에는 벨체터를 집어삼킬 필요가 없었다. 황량한 소국은 제국에 이득이 되지 못했으니까. 선황제와 이오르가 전쟁을 반대하기도 했다. 벨체터 말고도 많은 나라에 기사단을 보내, 싸움을 중재한 일이 많았다.

말려야 했다. 멈추지 않으면 벨체터는 침략국이 되고 말았다. 셈브리온은 조국이 손가락질당할까 봐 두려웠다. 레오웰, 쟐레와 손잡고 제국을 갈라 먹자는 빌버의 목표에는 따를 수 없었다. 입맛이 썼다.

“형제보다야 딸내미 편이지. 애당초 빌버에 들어간 것부터가 내 제자가 휘말릴까 봐 동태를 살피는 게 목적이었어.”

“그것참. 내가 네놈을 처음 봤을 때도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는데, 그보다 더 어린 브링어를 만들어 내다니. 괴물은 괴물끼리 모인다 이건가?”

“이-샤처럼 예쁜 괴물이 세상에 어딨어.”

헤놀의 옆에 선 벨타르테오가 이에샤를 쳐다보았다.

“이이샤 양.”

“……이에샤다. 이에샤 앨저.”

“이거 실례했소. 앨저 양, 미안하지만 데힐이라면 모를까, 그대는 우리의 상대가 못 되오. 스승을 말리는 편이 좋지 않을지?”

“내가 왜?”

이에샤는 롱소드가 몸을 가로지르도록 들었다. 한 손으로 칼자루를 쥐었다. 반대쪽 손으로는 칼끝을 집었다. 헤놀의 피가 엉겨 붙은 칼날이 거슬렸다. 서둘러 적을 몰아내고, 엘테르트에게 받은 도구들로 손질해 주고 싶었다.

“내가 경험이고 실력이고 달린다는 건 인정하지. 그래도 헤놀 크로유를 한 번 이겼잖아? 네놈이 내 뒤를 쳤던 걸 설욕하지 않으면 밤에 잠도 못 잘 거 같거든.”

“고집이 세군. 그리고 무모해.”

“용맹하다고 해 주겠어? 3분 지났어, 세비.”

대답은 기다리지 않았다. 앞으로 튀어 나갔다. 셈브리온도 움직였다. 검은색 검 두 자루가 벨타르테오와 헤놀을 겨누었다. 벨타르테오가 쇼텔을 들었다. 칼등으로 이에샤의 공격을 막았다. 미늘창이 이에샤의 빈틈을 찌르려 했다. 이에샤는 피하지 않았다. 브링을 실은 셈브리온의 검이 창대를 쳐 주었다. 벨타르테오로부터 물러섰다. 몸을 뱅글 돌렸다. 헤놀의 목을 향하여 검로를 그렸다. 벨타르테오가 검을 내밀어, 우묵한 부분으로 이에샤의 검을 챘다. 헤놀이 창을 휘둘렀으나 셈브리온이 끼어들었다.

장관이었다. 브링어 넷이 얽히고설켜 합을 주고받았다. 벨타르테오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은 해적선 갑판으로 쳐들어가서 날뛸 만큼 난전에 익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도시전을 벌이는 헤놀도 같았다. 셈브리온 또한 용병 시절에 마구잡이로 싸워 댔다. 이에샤는 다를 터였다. 이러한 싸움을 겪어 보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동작에 어설픈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갈수록 익숙해지고, 정교해진다.’

짙푸른 눈동자가 휙휙 굴렀다. 세 남자의 움직임을 담았다. 이에샤는 싸우는 중에도 남을 관찰하며, 재주를 흡수해 갔다.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겉모습만 보아도 이에샤의 재능은 헤아릴 수 있었다. 이제는 피부로 와 닿았다. 처음 헤놀에게 덤빌 때는 버거워하는 티가 났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침착하게 적들을 몰아붙였다. 칼날이 벨타르테오의 머리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간담이 서늘했다.

놀라기는 셈브리온도 매한가지였다. 떨어져 지내는 동안, 이에샤가 수련을 게을리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자신의 빈자리를 잊고자 파고든다면 모를까. 하지만 이에샤는 셈브리온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세상과 담쌓고 검술에만 매달리던 때보다 빠르게 발전한 성싶었다. 지금이라면 셈브리온이 죽일 각오로 상대하더라도 쉽게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이에샤는 벨타르테오의 목만 노려 댔다. 키가 비슷하여 쉬웠다. 헤놀의 창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셈브리온이 막아 주리라는 믿음을 가졌다. 동맹 관계일 따름인 벨타르테오와 헤놀은 둘을 떨쳐 내지 못했다. 호흡을 맞추어 싸우기는 처음이었으나, 빼어난 감각이 받쳐 주었다. 검술 재능으로는 둘째, 셋째 가라면 서러울 사제였다. 노련한 브링어들도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일까? 이에샤는 몸이 가볍다고 생각했다. 팔다리가 마음 가는 대로 움직였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유연하게 휘고, 거세게 내리쳤다. 상쾌했다. 아침보다 지금이 훨씬 강해진 것 같았다. 그는 사실이기도 했다. 마파랑이 벌어지고 싸움이 잇따르며, 이에샤의 검술은 성큼 뛰어올랐다. 솜이 물을 빨아들이는 듯이. 오늘처럼 짧은 시간에 자주 싸워 보기는 처음이었다. 해방감마저 느껴졌다.

“크악!”

벨타르테오가 비명을 질렀다. 챙그랑! 쇼텔이 바닥에 떨어졌다. 오른 어깨를 부여잡았다. 반쯤 잘린 팔이 덜렁거렸다. 마침내 이에샤가 폐를 찢긴 일을 갚아 준 셈이었다. 벨타르테오가 비틀거렸다. 공격이 먹혀들어서 주춤했던 이에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벨타르테오에게 달려들었다. 헤놀이 말릴 겨를도 없었다. 검을 치켜들었다. ‘쾅’하고 브링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벨타르테오는 멀쩡한 왼팔에 브링을 끌어모아, 이에샤의 검을 막아 냈다.

“쓸데없는 저항이야!”

“너, 이, 이에샤, 앨저……!”

“귀부인의 가슴에 칼을 쑤셨으면 목 정도는 내놔야지!”

이에샤는 주저하지 않았다. 검을 뒤로 빼 들었다. 일자로 벨타르테오에게 겨누었다. 세차게 찔러 들어갔다. 당장에라도 벨타르테오의 목에서 피가 솟구칠 것 같았다. 그러나 신음을 흘린 사람은 헤놀이었다. 벨타르테오를 감싼 근육질의 팔에, 이에샤와 셈브리온의 검이 동시에 꽂혔다.

“이거참, 그러게 정신 나간 망아지라니까!”

“크로유 시장, 놓으시, 윽!”

“닥치고 찌그러져라. 여기서 개죽음당할 순 없잖아.”

헤놀이 미늘창을 휘저었다. 적의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손짓이었다. 이에샤와 셈브리온이 한 걸음씩 물러섰다. 헤놀은 벨타르테오를 힐끗했다. 창을 내던져 버렸다. 이에샤의 눈이 커졌다. 셈브리온은 침착했다. 내다본 바였다. 헤놀 크로유는 무기를 아끼는 성미가 아니었다. 옛날에도 급자기 질렸다며 창을 패대기치고, 셈브리온을 놓아주었었다.

“우리가 졌다. 이 자식 팔이 이렇게 됐는데 나 혼자 너희를 상대해 봤자지. 붉은 악몽, 넌 나한테 목숨 빚이 있었지?”

“으음…….”

“꼬마, 네가 자비를 좀 베풀어 준다면 우린 여기서 때려치우고 더는 참견하지 않으마. 관두지 않겠냐?”

이에샤는 검을 늘어뜨렸다. 머릿속은 차갑게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생각에 잠겼다. 헤놀의 이야기를 따져 보았다. 믿을 수만 있다면,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먼저 쳐들어왔다고 해도 레오웰 도시 연합과 쟐레 왕국의 유명 인사를 죽였다가는 외교 문제로 번지리라. 주도권은 이쪽에 떨어지겠으나, 델페레타에는 두 나라를 무릎 꿇릴 필요가 없었다. 이오르 황제는 평화와 질서를 중하게 여겼다. 다툼은 바라지 않을 터였다. 레오웰과 쟐레가 빠지고 벨체터만 남는다면 달가운 일이기도 했다.

“국가 차원에서 다 같이 꺼진다면 살려 주지 못할 것도 없지.”

“이 사태는 이미 우리 손을 떠나서 말이다. 그래도 브링어 둘이 빠지는 거라고? 원래 맡은 일은 여기 기사단장들을 모조리 잡아 족치는 거였는데 관두겠다 이거야. 우리만 없으면 일란드랑 쟐레는 별 힘도 없어. 주축은 벨체터니까.”

“지금 네놈들 목숨을 거두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잖아?”

“뒷감당할 자신은 있고?”

이에샤는 입을 다물었다. 헤놀의 말이 맞았다. 두 사람은 이에샤가 처리하기에 지나치게 거물이었다. 루시온이나 엘테르트, 체사로라도 있었다면 괜찮았으리라. 지금은 자신의 깜냥으로 결정해야만 했다. 이에샤는 어찌해야 좋을지 갈팡질팡했다.

끝내, 고개를 아래위로 흔들었다.

“완전히 신용할 수 없으니 무기는 버리고 꺼져.”

“야무지구먼. 고맙다.”

헤놀이 껄껄 웃었다. 이에샤는 인상을 썼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죽을 뻔했건만, 앙갚음하지도 못하다니. 별수 없었다. 이에샤 앨저는 백화 기사단장이었다. 자기 자신보다 황실을 생각해야 했다. 이것이 잘한 결정이었다. 더는 숲 속의 연무장에 틀어박힌 골칫덩이 이에샤가 아니었으니까.

헤놀이 벨타르테오를 부축하고 모습을 감추었다. 바닥에 미늘창과 쇼텔만 덩그러니 남았다. 이에샤는 한숨을 쉬었다. 셈브리온을 돌아보았다. 뒤늦게 실감이 났다. 제 스승이었다. 꿈에서도 그리워한 이가 곁에 있었다. 이에샤의 하나뿐인 가족이 돌아왔다.

부둥켜안고, 목 놓아 울고 싶었다. 급한 일이 있지만 않았어도 그리했으리라. 이에샤는 깨끗하게 아문 가슴께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당신이 왜 여기 있어? 시간 없으니까 최대한 간략하게 알려 줘.”

“빌버. 벨체터 종전과 부흥을 꾀하는 조직이야. 거기서 델페레타랑 가까운 레오웰 연합하고 쟐레를 끌어들였어. 제국이 중부만 무너지면 다른 지방은 싸워 볼 만하니까 수도에 마파랑을 터뜨리기로 한 거지. 근데 이 마파랑은 규모가 내가 아는 계획보다 작은 것 같아…….”

“작다고? 실패한 건가?”

“아니. 이건 아마 아가씨가,”

셈브리온이 말을 삼켰다. 이에샤는 ‘아가씨’라는 낱말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아차렸다.

“밀레나?”

“그래. 알디온 아가씨가 마법을 망쳐서일 거야. 오늘 아침까지 우리 아지트에 있었어.”

“역시 그렇구나. 대충 이해했어.”

“역시? 이-샤, 알고 있었어?”

이에샤는 고개를 끄덕일지, 가로저을지 망설였다. 달신의 계시가 있기는 했다. 밀레나가 벨체터의 불온한 무리와 이어진 줄은 몰랐다. 설명하자니 까다로웠다. 모호하게 “약간은.” 하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밀레나 그 계집애가 원흉이었단 말이지. 안 그래도 걔 찾다가 크로유 시장이랑 마주친 거야. 세비, 마파랑의 핵을 찾아야 사태가 번지는 걸 막을 수 있대. 핵은 밀레나가 가지고 있는 거지?”

“…….”

“세비? 왜 그래?”

셈브리온은 복잡한 눈빛을 띠었다. 고민스러웠다. 자신은 밀레나가 아고르를 만난 곡절을 알았다. 밀레나의 눈이 멀어 버린 까닭도. 미워하는 이복동생이 제 대신 변을 당했다고 들으면, 이에샤는 무어라 할까. 이에샤가 재차 “세비!” 하고 불렀다. 셈브리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핵은 아가씨가 가진 게 아니야.”

“뭐?”

이에샤는 이맛살을 찡그렸다. 뜻밖의 답이었다. 밀레나가 핵을 가지지 않았다니. 의아쩍었지만, 셈브리온이 거짓말할 이유가 없었다. 이에샤의 피로 밀레나를 찾아내겠다는 계획이 무용해진 셈이었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생각하니 막막했다. 단념하고, 체사로에게 알리러 가기로 마음먹은 참이었다. 셈브리온이 툭 말했다.

“아가씨 자신이 핵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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