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6 12. 싸울 수 있는 이 =========================
늘어뜨린 검은 심하게 휘어진 모양새였다. 찌르기에는 알맞지 않았다. 벨타르테오는 칼등에 브링을 덧씌워, 억지로 이에샤의 가슴을 쑤신 것이었다. 이에샤는 제가 치명상을 입었다고 깨달았다. 이대로 죽는 건가? 가물가물한 머리로 생각했다. 땅에 부딪힌 무릎이 쓰렸다.
“이렇게 젊은데다 여자인 브링어라니, 놀랐소. 여자 또한 전사로 싸우는 우리 쟐레에도 여자 브링어는 없거든. 물렁물렁한 델페레타의 귀족이 대단하군.”
“허억, 흑, 커헉!”
“반항적인 눈빛이군. 뒤에서 기습한 게 못마땅한가?”
벨타르테오는 우아했다. 장군이 되어 공주와 결혼한, 평민이었던 남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기품이 흘러넘쳤다. 이에샤는 벨타르테오가 해적 소굴에 쳐들어가 피보라를 일으켰다는 무용담을 떠올렸다. 헤놀처럼 험상궂은 인상이 그려졌었지만, 실제는 왜소한 편이기까지 했다.
이에샤는 검을 바닥에 꽂았다. 양손으로 칼자루를 붙들었다. 넘어지지 않고자 용썼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심장 밑을 뚫려 버렸다. 폐를 다친 성싶었다. 이에샤의 몸속에서는 횡격막이 찢어져, 위가 폐부를 짓누르는 중이었다.
“델페레타의 싸움은 태반이 결투지. 하지만 쟐레의 싸움은 모두가 생존을 향한 투쟁이오. 여기사여, 우리는 그대의 나라에 수탈을 저지르러 온 무뢰배요. 예의를 기대해서야 어리석은 짓이지.”
“거 듣기 안 좋군. 그동안 제국이 혼자 빨던 꿀을 같이 좀 맛보자는 건데 꼭 그렇게 표현해야 하나?”
“크로유 시장, 그대는 부끄러운 줄 아시오. 약자에게 형편없이 밀려 놓고도 가슴을 펴다니.”
“약하긴. 날 제압한 순간부터 저 계집은 나보다 강한 거지.”
헤놀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에샤는 기운이 빠져나가면서도, 두 사람을 독특하다고 느꼈다. 한쪽은 스스로를 서슴없이 깔아뭉갰다. 한쪽은 패배를 순순하게 받아들였다. 그들에게는 자연한 일이었다. 쟐레는 해적이 육지까지 뛰쳐나와 횡포를 일삼는 나라였다. 레오웰은 도시끼리 땅과 자원을 두고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모욕과 패배는 일상적인 것들이었다. 델페레타에서 나가 본 적이 없는 이에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한 가지 뚜렷한 점이 있었다.
‘막지 못하면, 사람들이 죽어…….’
이에샤가 아끼는 사람이 해를 입을지도 몰랐다. 견딜 수 없었다. 열여덟 해를 쓸쓸하게 살아왔다. 가까스로 남과 어울리게 되었다. 연인과 지기와 동료가 생겼다. 보금자리가 갖추어졌다. 그들을 외적 따위에게 짓밟혀야 한다니. 분해서 눈물이 났다.
하지만 이에샤는 죽어 가는 처지였다. 손끌 길이 없었다. 당장 의사에게 보이더라도 살지 못할 터였다.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감각이 무뎌졌다. 헤놀처럼 포션이라도 들이켜지 않는 한, 이에샤의 끝은 정해졌다. ‘안 돼.’, ‘싫어.’ 같은 한마디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떠오르는 생각마저 단순해졌다.
‘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해야 할 일이라기보다, 하고 싶은 일이었다. 신년맞이 무도회가 끝나면 처음으로 달신교에 헌금을 낼 셈이었다. 한 달치 봉급을 털려 했다. 괴로워하는 여자를 한 명이라도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네세라에게 더 많은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미엘라에게 수사관 교육을 시키고도 싶었다. 스란을 강하게 키워 주고자 했다. 사람들이 얼어 죽는 겨울에 엘테르트가 어떠한 자선 사업을 펼치는지도 궁금했다.
죽기 싫었다. 여름이 오면 엘테르트와 브로칸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었다. 언젠가 셈브리온에게 달라진 제 모습도 자랑해 주어야 했다.
“세, 비…….”
“이-샤.”
마지막이 닥치니 헛소리를 듣는 모양이었다. 내리덮인 눈꺼풀 틈으로 눈물이 넘쳐 났다. 이에샤는 가냘프게 “세비.” 하고 웅얼거렸다.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가 진짜라면 얼마나 좋을까? 잠깐이라도 셈브리온을 만날 수 있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체온이 올라간 듯했다. 손발이 따뜻해졌다. 굳었던 팔다리가 눅었다. 가슴께에 미지근한 물이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향긋한 냄새가 콧구멍을 간질였다. 두꺼운 손이 이에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이에샤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이-샤.”
“……세비?”
“말하지 마. 이거부터 마셔. 브링어한테도 들을 테니까.”
셈브리온은―벨타르테오가 헤놀에게 건넨 것과 똑같은―유리병 두 개를 들었다. 하나는 빈 채였다. 나머지의 마개를 잡아 뽑았다. 주둥이를 이에샤의 입술로 가져다 댔다. 이에샤는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다. 시큼한 액체가 흘러들어 왔다. 후끈후끈하던 목구멍이 식었다. 포션이었다.
셈브리온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안타까운 눈길로 이에샤를 보았다. 뒤통수를 끌어안고 토닥여 주었다. 이에샤는 당혹했지만, 셈브리온의 가슴에 뺨을 비볐다.
“세, 세비? 세비야?”
“응. 나야, 이-샤. 네 스승님. 나 왔어.”
“어, 어, 어떻게? 왜?”
물어보는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였다. 말이 더듬더듬 끊겼다. 셈브리온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미소 지었다.
“보고 싶어서. 내 예쁜 제자가 너무 보고 싶어서, 돌아왔어.”
“세비.”
“늦어서 미안해. 많이 아팠지.”
이에샤는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았다. 가슴을 적신 물도 포션인 모양이었다. 솜씨 좋은 마법사가 만든 성싶었다. 적은 양으로도 치명상이 나았다. 눈을 끔뻑거렸다. 셈브리온이 곁에 있음을 믿기가 힘들었다. 그림자가 없어서 더했다. 브링어에게만 걸리는 마법 때문이라 들었는데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세비, 당신 대체…….”
“도대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행동이지? 붉은 악몽.”
“그녀가 데힐, 그대의 지인이었나?”
말허리가 잘렸다. 헤놀과 벨타르테오가 끼어들었다. 한마디씩 늘어놓았다. 셈브리온이 등골을 굳혔다. 놀라거나 겁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이에샤는 셈브리온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셈브리온은 “후우우.” 하고 숨을 골랐다. 노여움을 다스리려고 애썼다.
“애드미럴 벨타르테오. 난 당신을 꽤 존경했소. 빌버에서 당신 정도면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라고 생각했지.”
“고맙군. 그런 말을 한다는 건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겠지?”
“그래.”
매섭게 내뱉었다. 뒤로 돌아섰다. 두 브링어를 마주 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이에샤는 허둥지둥 일어나 서려고 했다. 기운이 동났다가 되돌아온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세운 무릎이 픽 꺾어졌다. 셈브리온이 살기등등하게 말했다.
“지금은, 네놈만큼 증오스러운 놈이 없다.”
“마치 딸 다친 아비처럼 구는군.”
“군인 관두고 점쟁이로 바꿔도 먹고 살겠어.”
벨타르테오의 이맛살이 죄어들었다. 이에샤도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셈브리온이 이에샤를 딸과 같다고,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기는 처음이었다. 셈브리온은 이에샤가 아버지에게 품은 미움을 알았다. 그렇기에 양부로 나서려 하지는 않았었다. 가장 가까운 가족. 그만큼으로도 족했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모전자전이라고 했는가? 힐가가 저를 아들로 여겼듯이, 셈브리온에게도 이에샤는 자식이었다. 피붙이보다 끈끈하게 얽힌.
“당신들에게 3분 주지.”
“뭐라는 거야? 똥이라도 싸고 오라 이거냐?”
“선택하라는 거다. 그동안 이 자리를 뜨고 물러나든가,”
팔을 뻗었다. 이에샤의 손을 잡았다. 힘차게, 하나 거칠지는 않게 끌어당겼다. 다리를 세워 주었다. 한 번 일어서니 중심을 잡기는 쉬웠다. 이에샤는 브링을 끌어올려 보았다. 포션을 마신 덕분일까. 헤놀과 싸울 때보다도 브링이 차올랐다. 셈브리온이 이에샤를 향했다. 씨익 웃었다. 이에샤는 셈브리온이 말하려는 바를 눈치챘다.
“나랑 내 제자, 이 대 이로 다시 싸워 보든가.”
셈브리온 데힐은 제자를 오냐오냐 키우지 않았다. 받은 굴욕을 자기 손으로 갚아 줄 차례였다.
세계의 강자에는 누가 있지?
그러한 물음을 던진다면, 제국 근위 기사단장 체사로 에버렛은 세 사람을 꼽으리라. 쟐레 왕국의 천부장, 레오웰 도시 연합의 시장, 벨체터 왕국의 용병. 브링어 중에서도 격이 다른 이들이었다. 세 명이 한자리에 모이기를 바라는 호사가도 많았다. 그 꿈같은 일이 이루어졌다
셈브리온은 헤놀과 마주했다. 새파랗던 시절에 검을 부딪쳐 본 상대였다. 속수무책으로 당했었다. 운이 따르지 않았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터였다. 나이를 먹고 재차 맞붙으려니 기분이 묘했다. 헤놀도 마찬가지인 듯싶었다. 찌푸린 낯으로 셈브리온을 흘겨보았다.
“대체 왜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이봐, 우린 동맹 아니었나?”
“어디에나 첩자는 있다고들 하잖아.”
“농담에 별로 소질이 없군, 검정 눈깔. 그 마법사랑 넌 형제 같은 사이라며?”
셈브리온은 마법사, 아고르를 생각했다. 헤놀의 말이 맞았다. 아고르는―킬타로스와 함께―힐가를 어머니로 삼았던 의형제였다. 아고르를 싫어하느냐 한다면, 아니었다. 델페레타에 사는 내내 그리워했다. 무사하기를 바랐다. 만나지 못해도 잘 살았으면 했다. 자신은 돌아갈 수 없는 조국에서.
“……그랬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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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이에샤인데 셈브리온이 다 해결해 주고 그런 거 말도 안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