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4 12. 싸울 수 있는 이 =========================
반듯한 눈꺼풀이 들어 올려졌다. 홍차 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엘테르트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두통은 욕지기를 불러일으켰다. 바닥을 짚고 말았다. 고개를 푹 수그렸다. 헛구역질을 했다. 한참을 웩웩거린 다음에야,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눈에 들어온 모습은 비현실적이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돌개바람과 무너지는 천장이었는데, 햇볕이 따사로웠다. 하얗고 동그란 테이블에 티세트가 놓였다. 분홍빛 테를 두른 도자기 찻잔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밀레나가 우아하게 차를 들이마셨다. 몸가짐이 흠잡을 데 없었다. 맹인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엘테르트는 밀레나의 맞은편 사람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발렌티아는 앉았다기보다 늘어진 채였다. 의식을 잃은 모양새였다. 땅을 내려다보았다. 희고 자디잔 꽃잎들이 빼곡했다. 눈이 쌓인 것만 같았다.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물씬한 꽃향기, 귀여운 테이블과 티세트, 아름다운 여인들.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엘테르트는 눈을 날카롭게 떴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겁니까? 여긴 어딥니까?”
“제 친구가 만들어 준 결계예요.”
“결계라니.”
“사실은 혼자 들어올 생각이었는데…….”
밀레나가 씁쓸하게 웃었다. 발렌티아를 쳐다보았다. 엘테르트는 밀레나의 시력이 돌아왔다고 확신했다.
“알베라 부인 말이에요. 참 좋은 분이세요.”
“알디온 영애, 지금 한가롭게 잡담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까 그건 당신이 벌인 짓입니까? 수레국화궁은 어떻게 됐죠?”
“저랑 닮았어요.”
밀레나는 엘테르트 따위 하찮다는 듯이 굴었다. 물음에 답하지는 않고, 자기 할 말만 꺼내 놓았다. 엘테르트는 밀레나를 노려보았다. 답답했다. 낯설기도 했다. 밀레나 알디온, 아니, 이에샤를 뺀 여자들과 이야기할 때 자신은 주도권을 잡는 쪽이었다. 바라는 대로 대화를 이끌어 갔다. 궁금한 점은 그때그때 캐물을 수 있었다. 밀레나는 특히 유별하게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는 성미였다. 지금처럼 엘테르트를 무시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예쁘고 허영심 많고. 하지만 결코 나쁜 사람은 아니죠.”
“자기 입으로 하기에는 꽤 오만한 소리군요.”
“저한테도 참 잘 대해 주셨어요. 제가 황궁에 나타나고 단 한 사람도 저를 걱정하지 않았잖아요? 구경거리 삼든가, 엘테르트 님이나 이에샤 언니처럼 의심하든가. 그렇죠?”
엘테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대꾸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밀레나의 말투는 예사로웠지만, 뼈가 느껴졌다.
“부인만은 절 꾸며 주면서 계속 말씀해 주셨어요. 이렇게 어린 아가씨를 의료원에도 안 보내고 심문부터 하겠다니 이해할 수가 없다고요. 최고로 예쁘게 만들어 줄 테니 기죽지 말라고도.”
“알디온 영애.”
“그래서, 한순간 망설여 버린 거예요.”
밀레나가 피식했다. 쓴웃음 같기도 했고, 비웃음 같기도 했다. 엘테르트는 밀레나의 웃는 낯을 숱하게 보았다. 하지만 이처럼 착잡한 미소는 처음이었다. 밀레나 알디온이라는 사람의 진심을 마주한 듯싶었다.
밀레나는 찻잔 손잡이를 어루만졌다. 발렌티아와는 생면부지였다. 하나 정이 갔다. 한 시간이 넘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쁜 얼굴 때문에 옛날부터 남자들의 눈요깃감이 되었다든가, 이실리아 황후도 아둔한 자신을 은근히 깔보았다든가, 생글생글하니 남들은 제가 상처받지도 않는 줄 안다든가. 놀라우리만치 자신과 닮은 여자였다. 아니, 숱한 귀족 여자가 밀레나와 발렌티아 같았다. 두 사람은 평범할 따름이었다.
밀레나는 자신의 눈이 보이는 결계를 만들어 준 사람을 떠올렸다. 마흔 살이 넘었다는 남자는, 기껏해야 이십 대 중반으로 보였다. 아고르의 말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이야기하다 보면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밀레나는 “밀레, 넌 곧 죽을 거야.” 하는 소리를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아고르는 밀레나에게 최고의 무대를 마련해 주겠노라 큰소리쳤다. 억울하고 쓸쓸하게 스러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했다. 밀레나는 아고르의 유혹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발렌티아를 향한 동질감이 발목을 잡았다.
“내가 제대로 해냈다면 수도 전체가 마파랑에 휘말렸을 텐데. 저도 바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고요. 그런데 알베라 부인을 보니까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버렸어요.”
“뭐라고……? 지금 마파랑이라고 했습니까?”
“마법이라는 게 어렵네요. 아주 잠깐 망설였을 뿐인데 효과가 반도 안 나타났어요. 사실은 엘테르트 님도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답니다.”
엘테르트는 이를 악물었다. 똑똑한 머리는 알아차렸다. 밀레나가 저를 ‘봐주었다’고. 객실에 들었던 수사관과 옐윈 리토스는 죽었으리라. 밀레나는 결계로 몸을 피하며, 발렌티아와 엘테르트도 챙긴 것이었다. 부역자의 변덕으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엘테르트를 수치스럽게 했다. 에브라힐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이에샤는 괜찮을까.
“제가 생각보다 엘테르트 님을 많이 좋아했나 봐요.”
“개소리!”
“엘테르트 님도 그런 말을 쓰시는군요. 신기해라.”
밀레나가 웃었다. 낭랑한 목소리가 희고 아름다운 정원에 메아리쳤다. 엘테르트의 거친 말씨도 신기하지만은 않을지 몰랐다. 저 또한 가슴속에 끔찍한 충동을 품어 왔으니까.
이에샤는 달렸다.
체사로는 이에샤의 말을 웃어넘기지 않았다. 귀를 기울여 주었다. 마파랑을 일으킨 자에 관하여 듣고, 황실 마법사를 불러들였다. 이에샤와 밀레나는 반이나마 피가 섞였다. 이에샤의 피를 촉매로, 밀레나를 좇을 마법을 짜낼 셈이었다. 하지만 엘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매 사이가 남만도 못하니 연결이 너무 약하네.” 하고 설명했을 따름이었다. 동복누이가 아닌 탓도 있었다. 서너 시간은 걸릴 것이라고 했다.
차선책으로, 이에샤는 법무부로부터 작은 약병을 받았다. 속에는 친자 감정 시약이 들어찼다. 여인의 부정을 밝혀내는 데 쓰이는 아티팩트였으나, 원리는 단순했다. 피붙이끼리 가까이에 있으면 약물이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지금으로서는 이에샤가 그것을 들고 에브라힐을 뛰어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어찌하여 마파랑이 대재앙이라는지 알 것 같았다. 별궁 하나를 지났을 뿐인데,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다. 폭우라고 불러도 어울렸다. 장대비가 살갗을 아프게 때렸다. 빗소리가 이에샤의 날카로운 청각을 거슬리게 했다. 날씨가 미치광이처럼 날뛰어 댔다. 느닷없이 땅이 갈라지거나, 불덩어리가 날아오거나, 발밑이 얼어붙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괴물은 마주치지 않았다.
본궁이 가까웠다. 시약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샤는 한숨을 내쉬었다. 작은 도시만 한 에브라힐 궁전을 누비는 일이 바보같은 짓임은 알았다.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계집애! 마음속으로 밀레나에게 욕을 퍼부었다.
종탑을 지나친 참이었다.
선득한 느낌이 치밀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고, 검을 쳐들었다. 내리쳐 오는 공격을 막았다. ‘쾅’하는 굉음이 울렸다. 날붙이끼리 부딪쳐서 날 만한 소리가 아니었다. 자세를 추스르기도 전에 후속타가 들어왔다. 이에샤는 몸을 젖히며 뒷걸음질 쳤다. 뾰족한 날이 가슴께를 스쳤다. 이에샤의 것보다 밝은 푸른색 브링이 코트를 걸레짝으로 만들었다.
“이것참! 놀랄 노 자로군. 그림자 뺏긴 인간이라는 말에 왔는데 어린 계집이잖아?”
“누구냐!”
“그 검정 눈깔(벨체터 사람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 실수를 했나? 아냐, 아냐. 방금 반응을 보면 분명하지. 네깟 게 브링어라고? 정말? 내가 지금 꿈을 꾸나?”
습격자는 수다쟁이인 듯했다. 이에샤는 흠칫했다. 살면서 셈브리온보다 덩치 큰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다. 사내는 키가 2m하고도 10㎝는 커 보였다. 부담스럽지 않게 옹골진 셈브리온과 달리 우락부락한 근육을 지녔다. 한 손에 미늘창을 쥐었다. 이에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내는 브링어가 틀림없었다. 델페레타인도 아니었다. 제국어의 억양이 독특했다. 사투리와는 달랐다. 외국인 특유의 어눌함이 묻어났다.
사내가 무엇이 즐거운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 너. 이름이 뭐냐?”
“외적에게 가르쳐 줄 이름은 없어!”
이에샤는 사납게 씹어뱉었다. 사내에게 검을 겨누었다. 미늘창은 롱소드보다 네 배쯤 길어 보였다. 다가붙지 않으면 당할 터였다. 몸집이 큰 만큼, 표적으로 삼기는 좋았다. 속전속결로 목숨을 거두기로 했다. 각오를 세웠다. 칼날에 브링을 실었다. 땅을 박찼다.
이에샤의 찌르기는 보기 좋게 창대에 가로막혔다.
“살벌하게 굴지 말고 얘기 좀 하자고. 내가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래, 꼬마. 기껏해야 스물은 됐나? 그렇게 생겨서 남자는 아니겠지?”
“큭!”
사내가 창대를 밀어냈다. 가벼운 움직임인데도 무게가 있었다. 이에샤는 두 발자국이나 물러나고 말았다. 자존심이 구겨졌다. 받아들이기 싫었지만, 사내는 강했다. 셈브리온에게 맞설 때와 비슷한 긴장감이 들었다. 모멸적인 말이 쏟아져도 혼쭐을 내 줄 수 없었다. 기분이 곤두박질쳤다.
“마음 같아서는 살려서 일란드로 데려가고 싶군. 브링어 노예라니 희소성이 장난이 아닐 거야.”
멈칫했다. 귀에 익은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레오웰에는 노예 계급이 남았다. 옛날처럼 체벌은 하지 않았지만, 봉급을 받지 못하고 일하는. 일란드는 레오웰 도시 연합에서 가장 번성한 곳이었다. 시장이 강력한 브링어라고 들었다. 이에샤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헤놀 크로유……?”
“청개구리구먼. 내가 네 이름을 가르쳐 달랬지, 내 이름을 불러 달라고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