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3 12. 싸울 수 있는 이 =========================
이에샤는 ‘무사할 거야.’ 하고 곱씹었다. 지금은 연인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황실의 기사단장 중 한 명으로서 뛰어야 했다. 재앙이 닥쳤지만, 바라 마지않던 공을 세울 기회가 찾아온 것이기도 했다. 에르실반의 말을 돌이켰다. 신을 믿지는 않았으나, 자신이 큰일을 하리라는 추측은 달가웠다. 마음을 다졌다. 체사로에게 동료에게 돌아가겠노라 말하려는 참이었다.
콰르릉!
땅이 흔들린 것 같았다. 세찬 바람이 먼지를 몰고 왔다. 뭇사람이 비명을 질러 댔다. 이에샤는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눈을 뜨려고 애썼다. 굉음이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입이 헤벌어졌다. 땅이 갈라진 채였다. 낙뢰가 잇따랐다. 벼락은 바닥에 닿으며 사라지지 않고, 덩어리진 채 ‘파지직파지직’ 떠다녔다. 가까운 나무들에 불이 붙었다.
갓 데뷔를 치렀을 법한 소녀가 바닥에 쓰러졌다. 드레스 자락을 밟은 모양이었다. 벼락 구름이 소녀에게 다가갔다. 이에샤는 피하라고 외치기보다, 다리부터 움직였다. 바람 같이 달렸다. 검을 허리띠에 매달았다. 자유로워진 양손으로 소녀를 안아 들었다. 소녀가 “꺅!” 하고 놀란 소리를 냈다.
“행렬로 데려다 줄게요. 기사들이 안내하는 대로 대피 시설을 찾아가요.”
“가, 감사합니다.”
“드레스가 무겁네요. 가능하다면 속치마를 몇 겹 벗거나 잘라 내고 뛰는 편이 좋겠어요. 물론 내키지 않겠지만 지금 상황이…….”
“아니에요. 하녀가 근처에 있을 테니 말씀하신 대로 할게요.”
다부진 대답이 돌아왔다. 이에샤는 의외로운 표정을 띠었다. 귀족 여자가 사람으로 바글거리는 곳에서 속치마를 벗기는 어려우리라 생각했다. 소녀가 따르기를 바라고 꺼낸 말도 아니었다. 철모르는 아가씨답게, 어떻게 그리 망측한 짓을 하겠느냐며 질색할 줄 알았다. 밀레나라면 그리하리라 여겼으므로.
“왜 그러세요?”
“아, 아뇨. 과감한 결단을 하는구나 싶어서.”
“비상사태인걸요. 고집부릴 수는 없죠.”
이에샤는 소녀를 대피 행렬에 내려 주었다.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세라가 목이 터지라 외치는 중이었다. 여자 귀족을 불러 모아, 움직이기 쉽도록 무거운 장신구나 구두 따위를 버리라고 타일렀다. 보석이며 파우치 따위가 바닥에 산더미처럼 쌓였다. 나중에 백화 기사단 본부에서 물건을 찾아가라는 이야기도 빼먹지 않았다. 빈틈이 없었다.
이에샤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은 다른 여자를 업신여겨 왔는지도 몰랐다. 밀레나처럼 꿈도 없이, 결혼에 목매달 터라면 어려운 때에도 체면만 차리리라고. 하지만 여자들은 정연하고 협조적이었다. 신년맞이 무도회에 맞추어 마련한 값비싼 장신구를 던져 버리며, 피난길에 올랐다. 남성이야말로 안내하는 기사가 건방지다느니 하며 우왕좌왕했다.
네세라가 이에샤를 돌아보았다. 반색을 떠올렸다.
“앨저 경!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스란 경은 봤어?”
“예. 올센 경이랑 달신교 사제들을 찾아 모으고 있어요. 성력으로 마력 오염을 막을 수 있다면서요? 혹 오염되는 사람이 생기면 사제님들이 한곳에 모여 계시는 편이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거예요.”
“에르실반 사제가 달의 여섯 딸이라 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몰라.”
“뭐든 확신을 얻고 움직일 만한 상황이 아니니까요. 가능성이 있다면 죽어라 매달려 봐야죠!”
네세라의 말이 옳았다. 이에샤에게도 할 일이 있었다. 이에샤는 감각을 가다듬었다. 어수선한 가운데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찾고자 용썼다. 높고 낭랑한 음색을 잡아냈다.
“난 올센 경한테 가 볼게!”
“예? 왜요?”
“그녀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땅을 박찼다. 미엘라가 있으리라 짐작되는 쪽으로 달려갔다.
미엘라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여기저기 누비며 달신교 사제의 이름을 불러 댔다. 스무 명의 이름을 기억하는 데에 5분도 걸리지 않았었다. 부름을 들은 사제가 찾아왔다가, 동료가 모인 곳으로 향하기를 되풀이했다. 이에샤는 서둘러 미엘라에게 다가들었다.
“앨저 경! 무사하셨군요! 다행이에요!”
미엘라가 네세라와 같은 소리로 이에샤를 맞이했다. 이에샤는 때에 어울리지 않게 웃고 말았다. 이내 낯빛을 굳혔다. 지금부터 미엘라에게 중요한 일을 맡길 셈이었다. 미엘라의 어깨를 붙잡았다. 눈을 마주했다. 미엘라가 “무, 무슨 일 있으세요?” 하고 물어 왔다. 잘 들어. 이에샤는 딱딱하게 말했다.
“수레국화궁의 와인 저장고에 들어가서 끝벽부터 네 번째, 아랫줄 오크통을 찾아. 그리고 뚜껑을 일곱 번 두드려.”
“예, 예?”
“지하로 들어가는 비밀 통로가 열리는 조건이야. 에브라힐 아래에는 거대한 미로가 있어. 공주님께서 옛날에 도주로로 이용되던 거라, 길에 규칙성이 있다고 하셨어. 그것만 알면 황궁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지하 미로에는 보호 마법이 걸려서 마파랑의 영향이 안 미쳐.”
코트 주머니에서 라제카로부터 받은 쪽지를 꺼냈다. 종잇조각에 글씨가 빼곡했다. 내용을 읽어 내렸다. 갈림길에서는 떠다니는 마법의 빛 중 큰 덩어리가 있는 쪽이 정답이다, 모퉁이의 발목 높이에 흠집이 났으면 북쪽으로 향한다, 허리 높이에 났으면 남쪽으로 향한다, 별궁으로 이어지는 길에서는 어렴풋하게 풀 냄새가 난다, 에브라힐 궁전 바깥으로 나가는 길에는 알코올 냄새가 감돈다……. 스무 개에 달하는 규칙을 늘어놓았다. 미엘라라면 외울 수 있을 터였다.
“북쪽 비상구로 궁을 빠져나가. 마파랑은 아마도 에브라힐만이나, 근방까지만 퍼졌을 거야. 나가서 마차든 뭐든 잡아타고 암발라 산으로 가. 해신교 대사원에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해 줘. 해신교에 말하면 알아서 달신교에도 전달할 거야.”
“그, 그런 중요한 일을 왜 저 같은 애한테……?”
“올센 경이 가장 확실하게 해낼 수 있을 테니까.”
미엘라는 기억력도 관찰력도 빼어났다. 미로의 규칙을 놓치지 않고, 알맞은 길을 찾아낼 법했다. 다른 누구도 해내지 못할 일이었다. 미엘라만이 할 수 있었다. 이에샤는 믿었다. 미엘라는 실수하는 법이 없었다.
“어서 가!”
“앨저 경, 저, 저는, 전 못 해요!”
“할 수 있어. 아니, 못 해도 해야만 돼. 올센 경은 이제 하녀가 아니라 기사야. 위험에서 황실을 지키는 게 경의 임무야. 일을 내팽개치지 마.”
이에샤는 엄격하게 못박았다. 백화 기사단은 황궁의 여자를 지킬 뿐인 조직이었으나, 이에샤는 시키는 일만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백화 기사도 제국 기사와 마찬가지였다. 황실에 이바지할 수 있었다. 밖에 에브라힐 궁전의 위기를 알릴 사람은 미엘라 올센뿐이었다. 검을 들지 못해도, 재빠른 두뇌는 강력한 무기였다.
미엘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다짐을 세운 모양이었다.
“가 볼게요! 시키신 일,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경을 믿을게!”
몸을 돌렸다. 수레국화궁 건물로 향했다. 이에샤는 긴 숨을 몰아쉬었다. 라제카에게 일러 받은 일은 마쳤다. 이제는 스스로 움직여야 했다. 검을 뽑아 들었다. 벼락 구름은 제국 제2 기사단장 발테른의 브링에 사라진 뒤였다. 체사로보다 발테른과의 거리가 가까웠다. 이에샤는 싫증을 억눌렀다. 발테른에게로 다가갔다.
“발테른 경.”
“……백화 기사단장이군. 무슨 일인가?”
“알다시피 백화 기사단에는 아직 마파랑 진압 시의 행동 강령이 전해지지 않았소. 간략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설명해 주겠소?”
발테른이 이에샤를 바라보았다. 눈빛에 경멸이 깔렸다. 이에샤는 꿈쩍하지 않았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싸움을 벌일 때가 아니었다. 발테른도 알 터였다. 썩어도 준치라고, 제국 기사단의 버금인 자였다. 실력만으로는 체사로를 웃돌았다. 예상대로 발테른은 순순히 이야기해 주었다.
“마파랑에는 태풍의눈처럼 중심지가 있네. 그곳을 찾아내서 마력 변이를 일으킨 핵을 파괴하면 이상 현상이 멈춰. 초대형 결계인 셈이지. 그리고 마파랑 속에서 정신과 육신을 유지하며 핵을 탐색할 수 있는 게 브링어뿐이고.”
“핵이라.”
“문제는, 이번 사태에는 간악한 무리가 개입했으리라는 게 황태자 전하의 고견일세. 어지럽혀진 마력에 누군가가 불을 질렀다는 거야. 딜란 렌디드, 그 미치광이의 바람대로 된 거지.”
이에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테른이 말하는 바를 알 성싶었다. 이 마파랑이 사람 손으로 이루어졌다면, 브링어라고 무사하지 않았다. 황실 마법부가 인공 마력이 브링어에게 통할 수 있음을 밝혀냈으므로. 엘먼이 만든 발모 마법은 기사단장들에게 효과를 보였다. 이에샤는 명료하게 추려 냈다.
“시간 싸움이라는 거군.”
“우리 기사단장들이 핵을 찾아내느냐, 마력에 오염되느냐. 어느 쪽이 먼저이냐에 달렸소.”
기사단장이 오염될 무렵에는 평범한 사람은 남아나지 않을 터였다.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핵’이라는 낱말을 듣고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모든 실마리가 한 가지 결론을 가리켰다. 자그맣게 내뱉었다.
“밀레나.”
“뭐라고?”
발테른이 되물었다. 이에샤는 뒤돌아서며, 체사로 쪽으로 손짓했다.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다른 기사단장에게도 말해야 했다.
“내 동생을 찾아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