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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152화 (152/164)

00152 12. 싸울 수 있는 이 =========================

그것이 팔을 내저었다. 불티가 타닥타닥 튀었다. 양손에 검을 든 스란이 몸을 날려서 피했다. 떨기나무 화단에 불이 붙었다. 스란은 당황한 낯으로 허둥거렸다. 활활 타는 거인을 베려 들었다가는, 제 손이 델 터였다. 이에샤는 상황을 파악했다. 거인의 등 뒤로 다가들었다. 열기가 훅 끼쳐 왔다. 삽시간에 입술이 말라붙었다. 검에 브링을 실었다. 겅중 뛰어올랐다. 거인의 등골을 내리그었다.

“소용이 없어!”

거인은 브링에 얻어맞고도 말짱했다. 베인 곳의 불길이 흐트러졌다 돌아왔을 뿐이었다. 이에샤는 이를 악물었다. 브링이 먹히지 않는다면 무기를 들이미는 짓은 무의미했다.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거인은 호전적이었다. 이에샤와 스란에게 주먹을 휘둘러 댔다. 달아나도 따라올 것이 뻔했다. 전나무 숲에 거인을 끌어들였다가는, 버들궁 전체에 불이 옮겨붙을 터였다. 기사로서 황궁에 누를 끼칠 수는 없었다.

스란이 이에샤 쪽으로 달렸다. 모여서 작전을 짤 셈이었다. 그때, 거인이 팔을 크게 저었다. 주먹에서 큼지막한 불똥이 쏘아져 나왔다. 스란의 등을 노린 공격이었다. 이에샤는 질겁했다. 성큼성큼 뛰어, 스란에게 다가붙었다. 단검을 든 팔목을 잡아챘다. 몸을 수그렸다. 불덩어리가 둘의 머리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환장하겠네!”

“후우, 허억! 어떻게 하죠?”

“도무지 답이 안 나와. 저걸 방치했다간 온 에브라힐이 불바다가 될 텐데.”

“붓꽃궁으로, 헉, 헉, 유인하면 어떨까요? 마법사들이, 휴!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마법부에 근무하는 관리가 몇이나 될지 모르겠어. 최악의 경우에는 아무도 없을 수도 있어. 일단 엘먼 공은 확실히 수레국화궁에 계셨어.”

마법부 관리에도 신년맞이 무도회에 나가고자, 출근하지 않은 이가 많았다. 붓꽃궁으로 끌고 간들 사람이 모자랄 것이었다. 거기다 버들궁과 붓꽃궁은 멀찍했다. 가는 동안에 입을 해를 무시할 수 없었다. 사면초가였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거인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불똥을 던지려는 모양이었다. 이에샤와 스란은 양쪽으로 갈라졌다. 거인은 둘 가운데에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에샤를 향했다. 이에샤는 어렵지 않게 날아오는 공격을 피해 냈다.

‘이제 어쩐다?’

마파랑이 어떠한 재앙인지 알 성싶었다. 하늘이 바뀌고, 그림자가 사라지고, 괴물이 나타났다. 자연재해에 더불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지금 거인을 물리치더라도 무엇이 기다릴지 몰랐다. 힘을 아껴야 했다. 벌써 브링을 많이 써 버렸다. 막막하여 한숨이 나왔다.

‘난 아직 마파랑 진압 지침을 잘 몰라. 우선은 다른 기사단장들하고 합류해서 설명부터 들어야 해. 이럴 때는 도대체 어떻게…….’

“아악!”

앓는 소리가 터졌다. 상념이 깨어졌다. 이에샤는 움찔하고 스란을 돌아보았다. 스란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였다. 거인에게 당한 것 같지는 않았다. 이에샤는 눈만 끔뻑였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스란에게 거인이 다가갔다. 앞뒤 잴 때가 아니었다. 이에샤는 힘을 다하여 브링을 끌어 모았다.

거인에게 통하지 않더라도 브링의 쓰임새는 많았다. 거인의 발치를 노렸다. ‘콰쾅’ 소리가 울렸다. 화단의 부토가 솟구쳐 올랐다. 거인이 주춤했다. 불로 이루어진 몸뚱이는 흙을 뒤집어쓰자, 덩치가 수그러들었다. 이에샤는 서둘러 스란에게 달려갔다. 겨드랑이를 붙들고 일으켜 세웠다. 스란이 “아, 윽.” 하고 신음했다. 얼굴이 보랏빛으로 질려 버렸다.

“왜 그래? 스란 경! 정신 차려 봐!”

“죄송, 합니다. 아까부터, 묘하게 움직, 이기가, 힘들어서, 쿨럭!”

이에샤는 흠칫했다. 스란의 흰자위가 벌겠다. 실핏줄이 터진 모양이었다. 눈초리에서 핏물이 배어났다. 익숙한 꼴이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렘 모드리스가 마력에 오염되었을 때, 이러한 변화를 보였었다. 애가 끓었다. 스란을 가만두어서는 안 될 듯싶었다.

어찌하여 마파랑이 벌어졌을 때, 기사단장이 긴요해지는지 깨달았다. 마파랑은 마력의 변이 현상이었다. 변이 마력은 사람을 좀먹었다. 브링어가 아닌 스란에게는 숨쉬는 일조차 버거울 것이었다. 다른 사람도 매한가지일 터였다. 사태가 길어질수록 사상자가 생겨나리라. 보호 마법이 필요했다. 한시라도 빠르게 스란을 지하 미로로 옮겨야만 했다.

스란의 눈빛이 흐리멍덩했다. 이에샤는 울고 싶어졌다. 까마득했다. 궁리를 짜낼 수가 없었다. 거인이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정신 차리라고 스란의 어깨를 쥐어흔들 때였다.

“Quae lun cem uer tu.”

뜻 모를 말이 들려왔다. 신기하리만치 발음이 미끄러웠다. 높낮이가 골랐다. 아는 목소리였다. 에르실반이 기도문을 외우자마자, 불타는 거인이 허물어졌다. 이윽고 재가 되어 흩날렸다. 이에샤는 눈을 크게 떴다. 에르실반이 망토 자락을 쥐고 달려왔다. 주름진 목에 익숙한 물건이 자리했다. 가죽끈에 보석을 꿴 목걸이. 이에샤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 전하께서 내게 거짓말을 하셨군.”

옛날에 루시온이 만든, 이에샤가 있는 곳을 찾는 아티팩트였다. 없애겠노라 약속받았던.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하나 덕분에 살았다. 에르실반은 루시온에게서 건네받은 아티팩트를 목둘레선 안으로 추스르며 말했다.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멀쩡한 아티팩트를 파괴하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이건 1년 가까이 사용된 흔적이 없으니 황태자 전하께서도 나쁜 뜻을 먹은 건 아니실 겁니다.”

“아무래도 좋아, 그게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죽었을 테니. 이벨리오노 전하께서 사제한테 나를 찾도록 시키신 거요?”

“냉정하신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앨저 경이 갑자기 사라지자 반쯤 이성을 잃으시더군요. 때맞춰 도착해서 다행입니다.”

이에샤는 야릇한 심정이 되었다. 루시온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았다. 연인이 있었으므로 이에샤도, 루시온도 모르는 척해 왔다. 그러나 루시온의 마음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요즈음도 이에샤를 보는 시선에 열망이 깃들었다. 이에샤에게 향하는 아티팩트를 보관한 데에도 그러한 까닭이 섞였는지 몰랐다.

에르실반은 황태자가 어찌하든 관심 없다는 듯, 스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이에샤도 “핫.” 하며 스란을 끌어안았다. 뺨을 아프지 않게 두드려 보았다. 스란은 송장처럼 눈을 감았을 따름이었다.

“어, 어떡하지? 스란 경이 마력에 오염된 것 같아. 이대로 두면 죽을 텐데!”

“진정하세요, 앨저 경.”

에르실반이 이에샤를 말렸다. 무릎을 구부렸다. 스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살갗에 푸르죽죽한 반점이 떠올랐다. 한숨을 내쉬었다. 열 오른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Libe lun tris quiet digaur.”

해달신교의 밀어가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이에샤는 조마조마하게 지켜보았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스란의 표정이 풀어졌다. 얼굴에 핏기가 돌아왔다. 숨소리가 가라앉았다. 이에샤는 흥분과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한 거지?”

“몸에 침투한 마력을 이로운 성질로 바꿨습니다. 성물을 만드는 일과 같은 원리죠. 방금 불 괴물을 없앤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구나. 고, 고맙소. 난 스란 경이 잘못될까 봐…….”

“됐습니다. 제가 앨저 경을 찾아 헤맨 이유는 따로 있으니까요.”

에르실반이 무뚝뚝하게 잘랐다. 이에샤는 눈을 치켜떴다. 에르실반의 말속을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에르실반은 차근차근히 이에샤를 뜯어보았다. 검질긴 눈길에, 이에샤는 낯이 근지럽다고 느꼈다. 스란의 코에 집게손가락을 댔다. 숨결을 확인하며 슬그머니 고개를 비꼈다.

“잘 들어 주십시오, 앨저 경.”

“무얼?”

“달신께서 계시로 앨저 경을 정확하게 가리키신 데는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겁니다. 늘 그랬으니까요.”

에르실반은 굳은 말투로 이야기했다. 녹갈색 눈동자가 이에샤를 담았다. 소리라고는 없었지만, 이에샤는 들은 것만 같았다. ‘움직여라.’ 하는 부추김을.

수레국화궁은 아수라장이었다. 이에샤는 아름다웠던 별궁을 멍하니 보았다. 폭풍이라도 지나간 양, 정원이 뒤집혔다. 건물의 3·4층은 온데간데없었다. 천장이 뚫린 2층만이 남았을 따름이었다. 무도회 참가자로 나온 제국 기사들이―연미복을 입은 채―사람들을 이끌었다. 대피 시설은 수레국화궁에서 멀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이 지나치게 많았다. 정연하게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이에샤와 스란처럼 사라진 경비들은 돌아오지 못한 성싶었다. 이에샤는 “줄을 맞추십시오! 밀지 마십시오!” 하고 외치는 체사로에게 달려갔다. 제가 겪은 일들을 전했다. 스란은 네세라와 미엘라를 찾으러 떠났다.

“황궁 지하 미로? 나도 들어 본 적은 있네. 공주님께서 그런 생각을 해내실 줄이야.”

“버들궁에 있던 인원은 결계에 빠졌을 기사들을 빼고 모두 대피시켰습니다. 혹시 모르니 이따 호위를 더 보내 주시죠.”

“알겠네. 황자 저하와 공주님을 보필하느라 수고 많았네, 앨저 경.”

체사로가 가볍게 묵례했다. 근위 기사단장으로서 성의를 다한 인사였다. 이에샤도 “당연한 일인걸요.” 하고 답했다. 수레국화궁에는 괴물이 나타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사상자가 많았다. 건물의 반이 날아갔으니 당연했다.

이에샤는 체사로에게 속닥속닥 이야기했다.

“이 일은 밀레나와 관련된 게 틀림없습니다. 달신의 계시도 그렇고, 시기도 너무 절묘해요. 붙잡아서 추궁해야만 합니다.”

“경도 알다시피 그녀의 심문은 3층에서 진행됐네. 하지만 보게. 이 별궁은 이제 2층짜리 건물이 되었어.”

“……그럼, 멘델린 경도.”

“찾을 수 없었네.”

이를 악물었다. 희망을 놓기는 일렀다. 에르실반이 화장실에 가느라 객실을 나온 사이, 일이 터졌다고 들었다. 엘테르트가 어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폭풍에 휘말렸을 수도 있었지만 괜찮을 수도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그런 식으로 말하고 헤어지지 말걸.’

엘테르트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날카로운 질책이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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