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수는 검 한 자루-151화 (151/164)

00151 12. 싸울 수 있는 이 =========================

“그건…….”

라제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에샤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어째서일까? 기사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버들궁에도 철통같은 경비가 서기로 했었다. 백화 기사단은 끼지 않았지만, 제국 기사단에서 뽑은 이가 수두룩했다. 연회장에 어른이란 시중꾼이 다였다. 공주가 나서서 참가자들을 지킨 일부터 이상했다. 원래라면 라제카는 누구보다도 튼튼한 경호진에 둘러싸여, 뒤로 빠졌어야만 했다.

“기사들은 어디 갔습니까? 공주님.”

“눈치챘군요. 이제 버들궁엔 기사가 한 명도 없어요.”

“예?! 어째서죠?”

“사방이 어두워지고 회오리바람이 불더니, 갑자기 모두 사라져 버렸어요.”

라제카가 무겁게 대답했다. 이에샤와 스란은 흠칫했다. 눈길을 주고받았다. 라제카의 이야기는 저희가 겪은 일과 비슷했다.

“내 생각은 이래요. 무장한 사람들만 골라서 어딘가로 끌려간 게 아닐까? 마파랑이 그렇게 섬세한 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이랑 기사의 차이점이라곤 그뿐이니까.”

“일리 있군요. 저희도 검을 차서 결계에 빠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짐작일 뿐이에요.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호위해 줄 사람이 마땅치 않으니까 구조가 올 때까지 연회장을 벗어나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했어요. 먼저 하인 두 명을 내보냈는데, 비명만 들리고 돌아오지 않았거든요.”

왜 라제카가 지하 미로로 달아나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이곳에는 대귀족의 자녀도 적지 않았다. 후계자가 변을 당하기라도 하면, 부모가 가만있지 않을 터였다―그 부모도 무사할지 몰랐지만. 자리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라제카로서는 신중하게 굴어야만 했다. 희생양이 된 하인들에게도 죄책감을 품은 듯했다. 이에샤는 라제카를 안타깝게 내려다보았다.

라제카의 짐작이 들어맞는다면, 수레국화궁에서도 두 백화 기사와 제국 기사만 결계에 빠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미엘라와 네세라, 달신교 사제들은 무기를 지니지 않았다. 대연회장에 남았는지도 몰랐다. 이에샤는 서둘러 버들궁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동료의 안위가 궁금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들어오는 길에 한 번 공격당하긴 했지만 별거 아니었습니다. 앞장설 테니 이동하시지요, 공주님.”

“정말이에요?”

“제가 공주님께 거짓말하는 거 보셨습니까.”

빙그레 웃어 보였다. 사람들이 모인 쪽으로 다가갔다. 가장자리에 익숙한 여자가 섰다. 말비다는 백작 부인이었으나, 수레국화궁 무도회에 나가지 않았다. 공주의 시녀장으로서 곁을 지켰다. 지금은 어린 귀족들을 추스르도록 하인·하녀를 다스리는 중이었다. 이에샤를 보자 말비다의 눈썹이 치솟았다. 적대적인 태도에는 변함없었다. 하지만 이에샤는 말비다에게서 어렴풋한 반가움을 느꼈다. 경비가 사라져 조마조마했던 모양이었다.

“고생하십니다, 부인. 지금부터 홀의 사람들을 데리고 장소를 옮길 겁니다.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요. 어차피 여기에 검을 들고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두 여기사뿐입니다. 저 벨제아는 공주님과 황자 저하의 안위를 위해 성심껏 협력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우선 벨제아 백작가의 안주인으로서 위계를 잡으시고, 성인들을 지휘해 어린아이들이 정연하게 대피 시설로 갈 수 있도록 하죠.”

“짓궂은 꼬마들에게는 저처럼 나이 든 여자보다 힘센 자의 위용이 크게 다가갑니다. 앨저 경도 함께하셔야겠습니다.”

벨제아 백작이 세도가라고 해도, 철부지에게 와닿기는 어려울 터였다. 브링어라는 사실이 알려진 이에샤가 나서는 편이 나았다. 이에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비다가 이르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수선한 와중에도 일은 척척 풀려나갔다. 하녀 하나와 하인 둘이 다섯의 아이를 맡아, 여덟 명씩 무리 지었다. 라제카의 활약이 눈부셨다. 라제카는 치기 어린 소년에게 능숙하게 황족의 권위를 내세웠다. 점잖고 어른스러운 말본새에 위엄이 흘렀다. 꼬마들은 기가 죽어, 얌전하게 시중꾼이 이끄는 대로 따랐다.

이에샤는 앞장에서 라제카와 란델을 지키기로 했다. 꽁무니에서는 스란이 주변을 경계했다. 말비다가 황손을 선두에 세울 수는 없다고 들고일어났으나, 지하 미로로 들어가는 길을 아는 사람은 라제카뿐이었다. 별수 없었다.

“후원 전나무 숲에 접어들자마자 오른쪽으로 열다섯 발짝, 거기서 정면으로 일곱 번째 나무 밑에 납작한 비석이 묻혀 있어요. 그 위에 서서 발끝으로 두 번, 세 번, 한 번 순서로 연달아 가운데를 두드리면 문이 열려. 그게 에브라힐 지하 미로의 출입구예요.”

“누님은 그런 걸 어떻게 알았어?”

“내 궁 정원을 헤집고 다니다가 우연히 조건이 맞았거든. 그 뒤로 1년을 꼬박 들여서 지도를 만들었어. 정식 지도는 기밀문서니까 외운 다음에 태워 버렸고.”

“그렇구나. 누님이 그런 일을 하는 줄은 전혀 몰랐어.”

란델이 온순하게 중얼거렸다. 라제카는 쓴웃음을 흘렸다. 여느 남자아이라면 누이가 자신을 따돌렸다고, 골을 낼 법도 했다. 란델은 놀라워할 따름이었다. 라제카는 이따금 란델의 너그러움이 부담스러웠다. 저는 란델에게 좋은 감정만 품지는 않았다. 수십 분 건너서 태어난 쌍둥이인데, 계집애는 고루한 예법을 강요받고 존칭조차 들을 수 없었다. 깜찍하고 친절하며 어리숙한 공주님으로 남아야만 했다. 옛날에는 란델에게 왜 너만 남자로 태어났느냐고 소리지른 적도 있었다.

라제카의 속내를 읽은 양 란델이 말했다.

“누님이 황자였다면 대단했을 텐데. 형님보다 멋있었을지도 몰라.”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야. 오라버니 화내셔.”

“아냐. 아까 나는 무서워서 벌벌 떠는데 누님이 모두를 지켜야 한다고 나섰잖아. 난 황족으로서 좀 모자란 애 같아. 내가 남자로 태어나서 누님이 누려야 할 것들을 다 빼앗아 가는 기분이야.”

라제카는 말을 잊었다. 란델에게서 이러한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다. 밝고 보드라운 상상만 하는 녀석이라고 여겨 왔다. 고민 따위는 모르리라 생각했다. 계면한 기분이 차올랐다.

이에샤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걷다가, 피식하고 말았다. 라제카는 현명할지언정 어렸다. 마음속이 훤하게 들여다보였다. 이에샤는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란델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상대방이 황족임을 깨닫고 멈추었으나. 그만큼 쌍둥이가 사랑스러웠다.

“저하, 공주님은 황자가 되기를 바라진 않으실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앨저 경.”

언젠가 네세라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돌이켜 보았다. 여자로 태어난 사람은 숱한 아픔을 겪지만, 덕분에 남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스스로가 여자여서 다행이었다. 라제카도 마찬가지이리라.

“성별을 바꾸기보단 황녀여도 황자랑 똑같은 것을 누리길 바라시지 않을까요? 어떠세요, 공주님?”

라제카의 뺨이 발긋해졌다. 영리하고 조숙한 라제카에게 속을 꿰뚫리는 경험이란 낯설었다.

“그, 그래. 난 내가 여자인 게 좋아요. 남자인 라제카 바르벨로샤라니 상상도 못 하겠어. 하지만 공주라고 란델보다 귀찮은 일이 잔뜩 있으니까, 그걸 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그거 보세요. 저하도 당신께서 황자로 태어나신 점을 슬퍼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슬퍼해야 마땅한 것은 황제의 아들과 딸 사이를 가르는 간극이었다. 이에샤는 드러나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라제카를 보자면 제가 여자 기사로서 당한 수모들이 떠올랐다. 심경이 복잡했다.

후원을 가로질렀다. 전나무 숲에 다다랐다. 라제카가 가리키는 나무로 다가갔다. 들은 대로, 낡은 비석이 묻힌 채였다. 150명에 이르는 인원이 움직이는 만큼 번잡스러웠다. 다행하게도 습격 같은 것은 없었다. 이에샤는 라제카를 비석 위에 세웠다. 라제카가 발끝을 쿡쿡 찍어 댔다. 덜커덩! 석판이 흔들렸다. 얼른 비켜섰다. 비석이 옆쪽으로 밀려났다. 땅속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으로 만든 듯한 노란색 빛 덩어리가 둥실둥실 떠다녔다.

이에샤는 계단 어귀에 섰다. 라제카와 란델과 말비다부터 내려보냈다. 뒤따라온 사람들도 한 명, 한 명씩 밀어 넣었다. 미로는 외적의 침입을 대비한 도주로인 만큼, 강력한 보호 마법들이 걸렸다. 마파랑이 지나갈 때까지 사람들을 숨기기에 알맞았다.

행렬이 반으로 줄었을 무렵이었다.

“아아아악!”

자지러지는 비명이 터졌다. 이에샤는 놀라서 뒤쪽을 건너다보았다. 먼 하늘이 밝아졌다. 백주(白晝)가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줄 끝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새빨간 불꽃이 날름거리며 몸을 부풀려 갔다. 불씨 한 점 없던 곳에서 급작스러웠다. 황당해 하다가, 에브라힐이 마파랑에 휩쓸렸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가까운 하녀에게 나머지 사람을 밑으로 보내도록 일렀다. 땅을 박차고 달렸다. 뒤에는 스란이 있었다. 다행이라고 할까, 비명 가운데 스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에샤가 왔던 길을 되밟는 중에도 사람들은 미로로 뛰어들었다. 후원 한가운데에 돌아왔을 즈음에는 모두가 계단을 내려갔다. 땅바닥에 숯덩이 같은 시신 몇 구가 굴러다녔다. 어린아이도 있었다.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저게, 뭐야?”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3m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인형이 불타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