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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150화 (150/164)

00150 12. 싸울 수 있는 이 =========================

모양새도 비슷했다. 유리에 금이 가듯 세상이 조각났다.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에샤와 스란은 떨어질까 봐 서로를 힐끔거리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에샤의 추측은 빗나갔다. 대연회장이 나타날 줄 알았건만, 다다른 곳은 정원이었다. 결계 안과 다르게 맑고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이에샤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낯익은 풍경이 펼쳐졌다. 어디였더라? 머리를 쥐어짰다. 어렴풋하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앳된 음색에, 여기가 어디인지 알 것 같았다.

“버들궁이야.”

“듣고 보니. 주변이 낯익습니다.”

“황자 저하랑 공주님이 계실 텐데……, 저게 뭐야?”

고개를 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스란도 이에샤의 눈길을 좇았다. “윽.” 하고 침음했다. 하늘이 기괴하게 바뀐 채였다. 한낮일 텐데 짙푸른 어둠이 퍼졌다. 자주색과 진녹색 구름이 굽이굽이 흘렀다. 별이 촘촘하게 박혔는데, 빛깔이 희지 않고 붉었다.

이에샤는 킁, 코를 울렸다. 공기에 물비린내 같은 것이 그득했다. 멀리 버들궁 건물이 보였다. 무너지거나 부서지지는 않았지만, 새까만 그림자가 바깥벽을 휩쌌다. 버들궁에서는 수레국화궁 무도회에 참가하지 못하는 어린 귀족들이 황자·황녀의 연회를 즐길 터였다. 이에샤가 해야 할 행동은 정해졌다.

“공주님이랑 황자 저하가 무사하신지부터 봐야겠어.”

“건물 안에 계실까요?”

“우리처럼 결계 같은 데 빨려 들어가기라도 했으면 큰일이야. 가 보자.”

두 사람은 걷기 시작했다. 버들궁에는 대연회장만큼은 아니어도, 눈부신 홀이 있었다. 달콤한 간식을 쌓아 놓고 노는 것이 아이들의 신년맞이 무도회였다. 라제카가 준비는 힘들어도 재미있다고 조잘거렸었다. “누님은 대단해.” 하며 말갛게 웃던 란델도 떠올랐다. 이에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쌍둥이에게 탈이 생겼다면 평정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았다.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마파랑이 벌어졌다고 어림했으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마파랑이란 신이 어리석은 인간에게 내리는 벌이라고 일컬을 만큼 끔찍한 재앙이었다. 지진과 물난리가 한꺼번에 닥치고, 바다가 없는 곳에서 해일이 인다고 들었다. 대규모 마법이 동시다발로 터지는 것이었다. 하나 주변은 잠잠했다. 하늘이 괴괴하기는 했으나, 재해라고 부를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파랑이 아닌 걸까. 그 밖에는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에르실반의 계시가 이루어져 갔다. 밀레나가 나타났고, 이변이 생겼다. 딜란 렌디드의 찌꺼기로 마력 오염 사태가 벌어진 뒤이기까지 했다. 마파랑이라고 하면 모두가 들어맞았다. 틀렸다면?

‘모르겠다. 이런 문제를 고민하는 건 나한테 안 맞아.’

자연스럽게 누군가가 떠올랐다. 가슴이 술렁였다. 엘테르트는 밀레나의 이야기를 듣고자, 가까이에 있었을 터였다. 위험에 휘말렸을까 걱정되었다. 다치거나 목숨을 잃기라도 했다면……. 이에샤는 고개를 털었다.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자신은 황실의 기사단장이었다. 지금 파묻혀야 할 일은 상황을 살피고, 황족을 지키는 것이었다. 엘테르트의 곁에는―싹수없는 놈이기는 해도―실력 있는 근위 기사인 옐윈이 붙었다. 머릿속에서 엘테르트의 상을 몰아냈다.

“공주님이랑 저하의 안전을 확인한다. 그다음엔 백화 기사단의 소임에 충실해야지. 황후 마마를 찾고, 여자 귀족과 사용인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도록 이끌어야 해. 에브라힐 바깥은 어떻게 됐을지 모르니까 궁내 대피 시설로.”

“저희 둘만으로 될까요?”

“되도록 달신교랑 합류해야지. 페리튼 경도 실무가니까 나보다 훨씬 도움이 될 거야.”

스란은 이에샤를 바라보았다. 이에샤는 제가 몸 쓰는 일 말고는 젬병이라고 말했지만, 재빠른 기지와 결단력은 지휘관에 걸맞았다. 이에샤에게는 사람을 휘어잡고 부리는 힘이 있었다. 귀족이라서일까. 스란은 이에샤를 따르면 상황이 잘 풀리리라는 느낌을 받고는 했다―자존심이 상하여 인정하기 싫었지만.

버들궁 건물에 다다랐다. 이에샤는 인상을 썼다. 결계의 나무에서 맡았던 것과 비슷한 악취가 났다. 벽에 들러붙은 그림자가 풍기는 냄새였다. 코가 비뚤어질 것만 같았다. 이에샤와 스란은 들숨을 참으며 현관으로 다가갔다. 바닥에 깔린 대리석까지 거무칙칙하게 얼룩졌다.

현관문의 손잡이를 쥔 순간이었다.

“큭!”

이에샤는 기척이 난 쪽을 가로 베었다. 반사적으로 브링을 실었다. 이에샤를 습격한 녀석이 브링에 휩쓸렸다. 이맛살을 찌푸렸다. 위화감이 차올랐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스란이 이에샤의 어깨를 두드렸다.

“앨저 경, 경의 그림자가 사라졌습니다.”

“……아!”

스란의 말대로였다. 대리석 포장에 스란의 그림자는 드리웠지만, 이에샤의 발치는 휑했다. 흐릿한 자국조차 없었다. 퍽 부자연스러웠다. 이에샤는 자신을 공격한 것이 제 그림자였음을 깨달았다. 무언가 마법에 걸린 성싶었다.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림자 좀 없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닌데 무시하고 들어갈까. 어떻게 생각해?”

“그것도 방법이겠죠. 여기 죽치고 있는다고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역시 경은 시원시원해서 좋아. 가자.”

문을 열어젖혔다. 현관으로 접어들었다. 금으로 장식한 수레국화궁과 다르게, 버들궁은 석영과 강옥을 많이 썼다. 중앙에 커다란 크리스털 사자상이 섰다. 눈과 꼬리털은 루비로 이루어졌다. 은제 난간이 주변을 둘러쌌다. 버들궁 안에 들어오기는 처음이었다. 연회장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인기척이 한가득 몰린 곳이 있었으므로. 스란은 버들궁의 구조를 알았던 듯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같은 쪽으로 향했다.

연회장 문 앞에서 이에샤는 멈칫했다. 쌍여닫이 손잡이에 푸르스름한 사슬 모양의 빛이 감긴 채였다. 잡아당겨 보았다. 문은 꿈쩍하지도 않았다.

‘이게 사람들을 가두고 있는 건가?’

“어떻게 하죠?”

“어떡하긴 뭘 어떡해.”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검을 치켜들었다. 스란이 “무슨 짓을 하시려는 겁니까?” 하고 묻기도 전이었다. 브링과 마력이 맞부딪쳤다. ‘파지직’ 소리가 났다. 문을 걸어 잠그던 사슬이 바스라져 버렸다. 스란은 이에샤의 행동력에 혀를 내둘렀다. 이에샤가 당장에라도 검을 휘두를 수 있도록 섰다. 스란에게 눈짓했다. 스란이 고개를 끄덕이고, 연회장 문을 잡아당겼다. 기름칠이 잘된 문은 소리도 내지 않고 열렸다.

이에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뜻밖의 광경을 맞닥뜨린 까닭이었다. 백 명도 넘어 보이는 어린아이와 하인, 하녀들이 연회장 깊숙이에 모였다. 문가에는 라제카 공주가 홀로 섰다. 낯이 하얗게 질린 라제카가 울음기 섞인 목소리를 냈다.

“애, 앨저 경? 스란 경?”

“공주님! 혼자 여기서 뭘 하고 계셨습니까?”

“나, 나는,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여기, 이 애뮬릿으로.”

이에샤는 “아.” 하고 중얼거렸다. 라제카는 오른쪽 가운뎃손가락에 늘 똑같은 반지를 끼웠다. 금테에 푸른빛이 도는 센터 스톤, 다이아몬드로 만든 사이드 스톤이 박힌 물건이었다. 장갑을 낄 때조차 빼지 않았다. 왜인지 알 성싶었다. 공주의 몸을 지키는 호신 마법이 걸렸으리라. 라제카는 아티팩트로 연회장 문을 잠그고, 침입을 막은 것이었다. 이에샤는 겁에 질려서도 책임을 다한 라제카에게 강한 애정을 느꼈다.

“고생하셨습니다, 공주님. 이제 제가 지켜 드릴 테니 안심하십시오.”

“앨저 경. 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아냈어요?”

“아니요. 저희도 위험한 결계에 빠졌다가 갓 나온지라 아직 파악 중입니다.”

“마파랑이에요.”

움찔 놀랐다. 라제카의 눈에는 확신이 깃들었다. 이에샤도 같은 짐작을 했지만, 라제카는 무언가를 아는 것 같았다. 이에샤는 다른 사람들을 힐끗하고 재빨리 라제카에게 물어보았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늘. 117년 전에 시어칸 지방에서 벌어진 마파랑의 기록이랑 똑같아요. 정오인데도 세상이 밤에 뒤덮이고 천공에는 붉고 푸른 기류가 아스라이 흘렀다. 사서에서 그런 구절을 읽었거든.”

“영명하십니다. 저는 짐작만 했습니다. 우선은 공주님과 여기 있는 귀족들을 대피 시설로 인도한 다음 황후 마마를 찾아볼 셈입니다만, 이만한 인원이 밖으로 나가면 어떤 일이 닥칠지……. 탈리오노 저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라제카가 피곤한 기색이었지만, 빙그레 웃었다. 연회장 한구석을 손가락질했다. 그곳에는 석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몰렸다. 유모나 하녀들 틈으로 낯익은 소년이 보였다.

“아이들이 진정하지 못하고 자꾸만 울음을 터뜨려서요. 울면 불안감이 전염되잖아요? 유모나 하녀가 얼러도 울던 애들이 란델이 나서니까 거짓말처럼 그치는 거 있죠. 옛날부터 아기나 동물을 잘 달래긴 했지만 이런 때에까지 통할 줄은 몰랐어.”

알 만했다. 란델의 보드라운 분위기는 어른의 마음까지 가라앉혀 주었다. 조곤조곤한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긴장이 풀리고는 했다. 어려도 귀족인 아이들에게는, 황자가 나서서 위로해 준다는 사실이 신뢰감을 주기도 했으리라. 라제카와 란델은 어지러운 와중에도 저마다의 방법으로 버텨 냈다. 기특한 일이었다.

“앨저 경, 대피 시설까지 안 가도 나한테 방책이 있어요. 여기 있는 모두가 안전하게 숨을 곳 말이야.”

“예?”

“말했죠? 에브라힐의 모든 별궁에는 나만 아는 길이 있다고. 지하예요. 황궁 지하에는 보호 마법진을 품은 거대한 미로가 있어요. 거기라면 버들궁 정원의 감춰진 입구로 바로 들어갈 수 있어.”

라제카는 평상시의 나긋나긋한 말본새를 집어던졌다. 열다섯 나이에 어울리게, 제법 어른스럽게 늘어놓았다. 황족으로 태어난 여자는 사교계에 나설 때―열여섯 살―까지, 앳되고 순종적인 말투를 써야만 했다. 황자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굴레였다. 지금의 당찬 태도가 그동안 라제카가 눌러 참아 온 본모습인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면에 스란은 “과연.”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암무에 속했던 스란은 에브라힐 지하 미로에 관하여 들어 보았다. 폐쇄된 지 오래라 했는데, 어린 공주가 드나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의문점이 남았다.

“그럼 왜 진즉 이동하지 않으시고 홀의 문을 잠그고 계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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