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9 12. 싸울 수 있는 이 =========================
바람이 불었다.
스란은 눈을 떴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마를 부여잡았다. 고개를 들었다. 아니, 들려고 했다. 목이 앞쪽으로 꺾어졌다. 그제야 자신이 앉거나 서지 않고, 드러누웠음을 깨달았다. 뿌연 눈앞이 삽시간에 맑아졌다. 벌떡 윗몸을 일으켰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상한 곳이었다. 눈부신 수레국화궁은 온데간데없었다. 황량한 풍경이 펼쳐졌다. 금과 보석으로 만든 실내 장식, 화려한 태피스트리 따위는 사라져 버렸다. 바닥이 굵은 나무뿌리로 뒤덮였다. 등이 배기더라니. 스란은 커다란 나무 아래에 있었다. 어둠 속에서 푸른색 광양자가 떠다녔다. 앞을 보는 데에는 문제없었다. 먼지가 휘날렸다. 벽도 천장도 보이지 않았다. 바깥인 성싶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고민에 잠긴 참이었다. 나무 위에서 누군가가 뛰어내렸다. 회색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 희끄무레하게 밝아졌다.
“깼어?”
“앨저, 경.”
“기절하고 얼마 안 됐어. 오래 걸리면 근처 좀 둘러보고 오려 했는데, 튼튼해서 다행이네.”
“앨저 경은 정신을 잃지 않으셨습니까?”
“브링어잖아.”
스란이 고개를 갸웃했다. 강해서 괜찮다는 뜻일까? 이에샤는 차근차근히 이야기했다. 이상한 회오리가 대연회장을 집어삼킨 일, 사람들의 모습이 사라진 일, 풍경이 바뀐 일……. 이에샤가 스란을 붙든 덕분에 둘은 떨어지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마력의 변이―마파랑이 벌어졌다고. 호랑가시궁에서 결계에 빠졌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스란이 까무러친 시간은 십여 분 정도였으나, 얼굴색이 송장 같았다. 마력 탓이리라. 이에샤는 브링어이므로 괜찮은 듯했다.
설명을 마쳤다. 스란이 머리를 주억거렸다.
“여기서 나가야 해. 아마 마법 결계 같은 거일 거야. 결계를 깨면 다시 대연회장으로 돌아가는 식이겠지.”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확신 못 해. 추측이지. 찍어서 행동하는 거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게 있어?”
“그건, 그렇군요.”
이에샤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상하리만치 침착한 모습이었다.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스란은 무릎을 털고 일어나며, 이에샤를 향했다. 이에샤는 날카로운 눈길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에 누웠던 스란과 다르게 깨끗한 코트가 위화감을 자아냈다.
“앨저 경.”
스란이 무거운 목소리로 불렀다. 이에샤가 스란을 돌아보았다.
“혹시 이번 일이 앨저 경하고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뭐?”
“이렇게 됐으니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암무에서 저한테 앨저 경이 수상쩍으니 지켜보라고 명령해 왔습니다.”
“뭐어?”
큰 소리가 터졌다.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스란이 다른 조직의 명령을 받은 일도 언짢았지만, 무엇보다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암무는 황실의 녹봉을 받는 관리가 아니었다. 이오르 황제가 사사롭게 거느린 이들이었다. 암무가 저를 살핀다니, 이오르의 의심을 샀다는 뜻과 같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스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꾸며 낸 반응일지도 몰랐으나, 이에샤는 참말로 놀란 것처럼 보였다.
“최근 벨체터랑 레오웰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더군요. 특히 벨체터 용병 집단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답니다. 그리고 알디온 영애가 먼 북쪽에서 나타났다는 정보도 얻었습니다. 앨저 경이라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릴 수 있으겠죠.”
“……그래서 내 스승님 얘기를 물어봤군. 떠보려고.”
“예. 죄송합니다.”
이에샤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오르라면 이에샤의 스승이 누구인지 캐는 일쯤, 어렵지 않았을 터였다. 알디온 후작가의 고용인에게 금화 한 닢만 쥐여 주어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셈브리온이 벨체터인이라서 의심받은 모양이었다. 틀린 추측도 아니었다. 셈브리온의 친구가 황후를 해치려 들었었으니까. 그러나 이에샤는 떳떳했다.
“난 아무것도 몰라. 경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니 솔직하게 말할게. 내 스승님은 벨체터의 사특한 무리에 몸담았을 수도 있어. 하지만 나는 아니야. 이게 전부라서 더는 말할 것도 없네.”
자기 자신이 놀라웠다. 옛날이었다면 기를 쓰고 셈브리온의 결백을 내세웠을 터였다. 하지만 이에샤는 스란의 눈짓을 읽었다. 진실이 궁금하다는 뜻을. 스란은 저를 믿고, 싸우기 싫다고 전해 왔다. 그러한 믿음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이에샤에게 부하들은 아끼는 사람이 되었으므로, 괜한 불씨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스란은 이에샤를 바라보았다. 이에샤가 스란의 속마음을 알아주었듯, 스란도 이에샤가 거짓말하지 않는 줄 깨달았다. 싱거운 웃음이 새었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옛 상관이 명령한다고 쪼르르 들어준 점을 야단치고 싶지만 상황이 이러니 참을게. 움직이자.”
“감사합니다. 이제 어디로 가죠?”
“이동은 안 해. 내가 경을 업고 오면서도 살펴보고 나무 위에서도 멀리까지 내다봤는데, 이 나무 말고 자연물이나 구조물은 못 찾았어. 여기서 나갈 방법을 찾아야 해.”
이에샤가 허리띠에서 검을 끌렀다. 스란도 고개를 끄덕였다. 롱소드와 단검을 뽑아 들었다. 어디인지, 무엇인지 모를 곳에서 무기를 쥐는 행동은 당연했다.
“스란 경이 기절한 동안 간단한 조사는 마쳤어. 흔들거나 나뭇가지를 꺾어 봐도 아무런 반응은 없더라. 평범한 나무야, 일단은. 하지만 아예 베어 보면 어떨까?”
“브링으로 베어질까요?”
“돌도 자르는걸. 몸은 어때? 평소처럼 움직일 수 있겠어?”
“머리가 쑤시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에샤는 한숨을 지었다. 쉬게 해 주고 싶어도, 한시가 급했다. 이곳을 벗어나는 일이 먼저였다. 대연회장은 어떻게 되었는지, 사람들은 다치지 않았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이에샤의 검에 빛 덩어리가 맺혔다. 검신 전체가 새파래졌다. 스란은 몇 번을 겪어도 경이롭구나, 생각했다. 사람이 눈에 보이는 기운을 만들어 내다니. 이에샤처럼 젊은 여자가 해냈다는 점도 놀라웠다. 브링어 대부분이 마흔을 넘겼다. 이에샤의 재능은 말로 나타내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에샤가 검을 나무둥치에 댔다. 가로로 그었다. 톱질하듯이 칼로 나무줄기를 자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끼이이이이이!
기다란 비명이 올랐다. 이에샤의 손이 멎었다. 나무에 파묻힌 검을 빼냈다. 스란도 등허리를 곤두세웠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리는 동굴에서처럼,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르게 울려 댔다. 이에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기척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본능이 조심해야 한다고 외쳤다.
변화를 눈치챈 쪽은 스란이었다. 스란은 몸을 숨기는 데 익었다. 지형지물을 살피는 눈이 발달했다. 이에샤가 베던 나무의 밑동이 아까보다 살짝 솟아오른 채였다. 수상한 구석을 찾아내자, 소리도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앨저 경, 아래입니다!”
외치자마자, 발밑의 뿌리가 불뚝거렸다. 이에샤는 망설이지 않았다. 아래쪽으로 브링을 쏘아 보냈다. 재빠르게 비켜섰다. 기검이 파헤친 곳에서 검붉은 액체가 솟구쳐 올랐다. 오래되어 끈적해진 핏물 같았다. 고약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이에샤는 콧숨을 멈추었다. 일어서서 저를 노리고 달려드는 뿌리를 잘랐다. 스란도 자기에게 휘둘러진 뿌리를 피했다.
‘보아 하니 바닥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건 아니야. 한 번에 움직이는 뿌리는 대여섯 가닥 정도. 하지만 바닥이 죄 뒤덮였으니 어디로 피하든 공격당할 거야. 어떡할까.’
이에샤는 냉정하게 관찰했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허둥지둥하다가 당했으리라. 한 번 위험한 결계에 빠졌던 몸이었다. 그 뒤로 결계 마법에 관한 책―라제카가 쉬운 내용으로 골라 준―을 읽어 보았다. 결계란 핵을 부수면 깨지는 종류가 많았다. ‘불온의 장막’의 핵은 사람을 공격하는 지킴이였고, 지금은 우뚝 선 나무가 틀림없었다.
‘이 많은 것들을 전부 자르고 있을 수는 없어.’
구불거리는 뿌리를 베어 냈다. 스란에게 달려갔다. 스란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이에샤는 스란의 허리를 낚아채고, 나무줄기를 밟았다. 저보다 10㎝는 큰 사람을 달고도 움직임에 거침이 없었다. 온몸에 브링을 돌렸다. 나뭇가지 위로 올라섰다. 스란을 주저앉혔다. 내다본 대로 가지는 요동치지 않았다. 움직이는 것은 뿌리뿐인 듯했다.
“거기서 기다려!”
“앨저 경?! 뭘 하려는 겁니까!”
“단숨에 갈 거야.”
훌쩍 뛰어내렸다. 바닥에 내려섰다. 발밑의 뿌리들이 꿈틀거렸다. 스란이 사라졌으므로, 모든 뿌리가 이에샤를 노렸다. 이에샤는 그를 베어 버리지 않았다. 날래게 달아났다. 뿌리들이 저희끼리 부딪치고 얽혔다. 칼날에 브링을 모았다. 한 번에 뿜어낼 수 있는 만큼 한껏. 반쯤 잘린 나무둥치를 향하여 휘둘렀다.
나무가 ‘콰지직’ 소리를 내며 기울어졌다. 고개를 치키고 외쳤다.
“내려와!”
스란이 무게중심을 잡았다. 이에샤에게로 몸을 던졌다. 뭇사람이라면 엄두조차 내지 못했으리라. 이에샤는 스란이 만난 날, 이오르의 부름에 높다란 나무에서 뛰어내린 일을 돌이켰다. 계산하여 위쪽으로 피신시킨 것이었다.
뿌리의 공격이 멎었다. 스란은 눈치껏 이에샤와 붙어 섰다. 대연회장에서도 달라붙은 덕분에 함께할 수 있었다. 어디로 옮겨 갈지 모르니, 가까이 있는 편이 안전했다. 나무가 완전히 쓰러졌다. 이에샤는 챙그랑하고, 불온의 장막이 깨지며 울렸던 소리를 다시 한 번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