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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148화 (148/164)

00148 11. 파국 =========================

‘근거가 없다고?’

이에샤는 입을 다물었다. 엘테르트 멘델린은 사실과 지식과 정보를 곱하여 생각하는 데 익은 사람이었다. 우기는 짓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째서 까닭을 밝히지 않을까? 밀레나에게 무언가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에샤가 눈치챈 줄을 엘테르트도 알 터였다. 이에샤는 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주기로 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었다. 어느 쪽도 바쁜 몸이었다. 연회장으로 돌아가면,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몰랐다. 몸을 뒤로 뺐다. 엘테르트로부터 물러났다. 눈을 홉떴다. 엘테르트가 의아쩍게 고개를 기울였다.

“알았어요. 전 일단 빠져야겠네요. 그보다 멘델린 경.”

“예?”

“당신 아버지 좀 어떻게 해 줘요. 공작 각하께 덤볐다가 앞길 망치긴 무서운데, 아까 눈이 뒤집혀서 큰일 칠 뻔했다고요.”

“……아버님이 앨저 경한테 무언가 하셨습니까…….”

이에샤는 한숨을 쉬었다. 천방지축이라고 까마득한 권력자에게 대들기 쉬울 턱이 없었다. 애버토스의 화를 돋웠을 때, 미엘라가 들이닥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경을 쳤을지도 몰랐다. 이에샤는 사랑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싶지 않았다. 불똥 따위는 엘테르트가 막아 주기를 바랐다. 답답했다. 짜증스럽게 코트 윗단추를 풀었다. 목둘레선이 느슨해지자 살 것 같았다.

“당신 만나서 부당한 소리 들을 건 각오했지만, 경도 알잖아요. 저 성깔 더럽고 급한 거.”

“앨저 경은 성격이 더럽지 않습니다.”

“입바른 소리는 됐어요.”

툴툴거리고, 이에샤는 팔을 뻗었다. 엘테르트의 어깨를 잡았다.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뺨에 입술을 붙였다가 떨어졌다. 엘테르트는 무거운 낯으로 키스를 받아들였다. 이에샤가 “가 보겠습니다.” 하고 인사했다. 몸을 돌렸다. 저에게도 할 일이 있었다. 언제까지고 연회장을 비워 둘 수는 없었다. 밀레나 문제는 다른 이들이 맡아 줄 터였다.

엘테르트를 등지고 떠나는 걸음걸이에 망설임이라고는 없었다.

“나 왔어.”

이에샤는 한 손을 흔들었다. 뒷짐을 지고 선 스란이 반색했다. 애버토스에게 불려갈 때는 이토록 늦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스란은 미엘라에게 이야기를 들은 듯했다. 캐묻고 들지 않았다. 이에샤에 에르실반마저 빠져, 혼자서 자리를 자키느라 긴장한 모양이었다. 가무잡잡한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채였다. 평민이었던 처지에는 수레국화궁의 위용이 버거울 만도 했다. 이에샤는 미안함과 북돋우려는 뜻을 담아, 스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알디온 영애는 좀 어떻습니까?”

“수상쩍고 수상쩍고 수상쩍지. 난 빠지고 멘델린 경이랑 에르실반 사제가 마저 파고들기로 했어.”

“대재앙의 계시란 게 그렇게 위험하다면 당장 사람들을 피난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터질지 아무것도 확실치 않잖아. 작년 무도회가 성공적이었다면 모를까, 또 중단했다가 잠잠하게 넘어가면 그거야말로 재앙이지. 이날을 위해 무리해서 가산을 탕진한 집안도 한둘이 아닐 텐데.”

“그딴 게 안전보다 중요하다니.”

대답을 삼갔다. 스란의 불평은 이에샤 자신의 생각이기도 했다. 이에샤에게 사교나 사업 따위는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다치거나 죽으면 무엇도 소용없었다. 귀족으로서 돈과 품위, 명예가 중요한 줄은 알았다. 하지만 신의 계시까지 흘려 넘기며 무도회를 이어 나가는 짓은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엘테르트도 마찬가지인 성싶었으나, 이에샤보다는 귀족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글쎄. 내가 없는 동안 연회장에는 별 탈 없었고?”

“예. 아직 시작한 지 세 시간밖에 안 됐으니 술에 취하기엔 이르죠.”

“좋네. 이대로 무사히 끝나면 최고일 텐데.”

손깍지를 끼었다. 팔을 앞으로 뻗어 기지개했다. 스란은 곁눈으로 이에샤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눈동자에 아무것도 모르는, 태연한 모습이 담겼다. 한숨을 내쉬었다. 속이 뒤숭숭했다.

한 시간쯤 전이었다. 웨이터 한 명이 스란에게 다가왔었다. 스란은 일하며 술을 마실 수는 없다고 물리치려다, 샴페인 글라스의 손잡이에 묶인 쪽지를 찾아냈다.

‘밀레나 알디온이 나타난 정원에서 인공 마력 감지. 방향은 먼 북쪽.’

쪽지에는 암무의 암호로 아리송한 정보가 적혔다. 스란은 암무단장이 전하는 바를 알아들었다. 벨체터에서 잡아낸 움직임과 밀레나 사이에 연관이 있다는 뜻이었다. 밀레나는 이에샤의 이복동생이었다. 이에샤는 벨체터인 용병을 스승으로 섬겼다. 의구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스란의 마음속에서 이에샤가 불온한 무리와 얽힌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부풀어 갔다.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에샤가 델페레타에 반기를 들 리 없었다. 스란이 보아 온 이에샤는 소탈하기는 해도, 귀족다운 의식―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을 갖추었다. 제국의 기사로서 자부심이 컸다. 스란은 마음을 굳혔다. “앨저 경.” 하고 불러 보았다. 이에샤가 고개를 들었다. 꾸밈없는 낯이 스란을 향했다.

“계속 서 있으려니 심심하지 않습니까? 우리 얘기나 할까요.”

“경이 그런 말을 하다니 별일이네.”

“앨저 경도 세 시간 동안 가만히 서 있어 보시면 말 상대가 절실해질 겁니다.”

“……미안.”

이에샤는 머쓱하게 사과했다. 에르실반이라도 남았으면 모를까, 덩그마니 선 스란은 객쩍기 그지없었을 터였다.

“예전에 정이 외국인 용병한테서 검술을 배웠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런 걸 다 기억하고 있었어?”

“그가 벨체터 사람이었습니까?”

“응.”

이에샤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스란에게는 벨체터인과 아는 사이라고까지 말한 뒤였다. 이상할 것 없는 추측이었다. 어째서 셈브리온 이야기를 꺼내는지 궁금했으나, 잡담이란 뜬구름 잡고 시시껄렁하기 마련이었다.

“저한테는 벨체터에 가 본 적도, 관심도 없다고 하셨었죠.”

“스승님이 거기 출신이다 뿐이니까. 나한테 중요하고 흥미로운 건 나라나 땅이 아니야. 내 가족이나 다름없는 스승님이지.”

스란은 치민 말을 삼켰다. “그럼 스승이 조국보다도 소중합니까?” 하고 물어볼 뻔했다. 스란은 잠행에 익었지만, 남의 속을 떠보는 데에는 서툴렀다. 암무단장은 감정에 휩쓸리는 스란에게 사람 대하는 일을 맡기지 않았으므로. 그렇더라도 스란은 이에샤가 벨체터와 무관하다는 믿음을 얻고 싶었다.

“그럼 앨저 경, 경은…….”

말을 이었을 때였다. 이에샤가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붙였다. 스란은 반사적으로 주춤했다. 이에샤의 얼굴색이 바뀌었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살갗에 따끔따끔한 느낌이 닿았다. 숱한 바늘에 찔리는 것만 같았다. 공기가 밀도 높게 부풀어, 어깨를 짓눌렀다. 이에샤는 셈브리온의 브링을 앞에 두고도 이만한 압박감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배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구쳤다. 머릿속에 엘먼에게 들은 이야기가 되살아났다.

‘브링과 마력은 상극.’

스란이 입을 달싹였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 했다. 소름이 등골을 내달렸다. 이에샤는 '시작됐다.' 하고 떠올렸다. 스란의 팔을 낚아챘다.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스란은 당황스럽게 달라붙었다. 이에샤가 스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몸을 홱 수그렸다. 머리 위에서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목청을 돋웠다.

“다들, 엎드려―――!”

우지끈!

무도회를 즐기던 사람들이 고개를 치켰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 여렷이 흔들거렸다. 하나 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없었다. 공중에서 암청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내 돌개바람으로 바뀌었다. 흩뿌려진 양초와 수정 장식을 집어삼켰다. 아무것도―촛농 한 방울, 가루 한 줌 남기지 않고.

대연회장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 작품 후기 ============================

어제 갑자기 손님을 치르느라 못 왔습니다...

파국 에피소드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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