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7 11. 파국 =========================
알디온 후작가로부터는 소식이 없었다. 전령은 도착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엘테르트는 후작 부부가 사람을 보려고 하지 않아, 늦어지는 것이 아니겠냐고 어림했다. 그럴싸했다. 황궁에서 보낸 전령이라도 하나뿐인 딸을 잃고―호적상으로 알디온 영애는 밀레나뿐이었다―슬퍼하는 부모에게 밀고 들어가지는 못했다.
밀레나는 사르륵 떨어지는 진줏빛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속치마를 껴입고 스커트를 부풀리기에는 겨를이 모자랐던 모양이었다. 어깨에는 금실과 홍실로 짠 숄을 걸쳤다. 멋들어진 지팡이도 들었다. 그러나 지팡이를 짚고 걷는 데 익숙하지 않아, 도움은 안 되어 보였다. 발렌티아가 억지로 쥐여 준 성싶었다. 발렌티아는 뿌듯한 낯으로 밀레나를 내세웠다. 기다리느라 지친 사람들이 원망의 눈길을 보냈다. 천진난만한 귀부인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엘테르트 군! 오랜만이에요. 지난번에 본궁에서 보고 처음이죠?”
“오래간만입니다, 부인. 알디온 영애를 보살펴 줘서 감사합니다.”
“무얼요. 이렇게 예쁜 아가씨를 꾸밀 수 있다니 행복했어요. 늘 말비다 언니가 부러웠거든요.”
까르륵하는 웃음이 터졌다. 공주의 시녀장인 말비다는, 라제카의 드레스와 장신구를 고르는 데 열성적이었다. 공주에게 겉모습이란 중요했으므로. 발렌티아는 그를 부러워했다. 황제의 말벗이라고 해도, 이오르는 국무에 파묻혀 살았다. 발렌티아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이실리아 때문에 곁에 둘 따름이었다. 발렌티아는 여자 황족을 모시는 겨우살이궁이나 서향궁의 시녀가 되고 싶어 했다.
밀레나는 입을 다물었다. 발렌티아의 팔짱을 꽉 끼었다.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무어가 보일 리도 없건만, 눈을 크게 떴다. 인기척이 들리는 곳들을 훑었다. 이에샤 쪽을 향했다. 이에샤는 흠칫했다. 허공을 더듬듯 모호하던 밀레나의 움직임이 또렷해졌다. 밀레나가 저를 관찰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엘테르트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갑작스러운 일로 놀랐을 텐데 집으로 보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영애. 사실은 당신과 관련해서 불온한 예고가 있었던지라.”
계시라는 낱말은 피했다. 이에샤는 고개를 갸웃했다. 엘테르트라면 밀레나에게 모든 것을 밝히고, 속내를 털어놓도록 호소할 줄 알았다. 그편이 엘테르트에게 어울렸다. 하지만 엘테르트는 친절히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밀레나가 가냘프게 물었다.
“예고요?”
“네. 당신이 연회장에 나타날 거라는 예고가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질 거라고도.”
“그럴 수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이에샤는 밀레나가 열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귀족으로서는 혼기였으나, 요즈음은 결혼하는 나이가 올라갔다. 소녀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옛날에는 밀레나가 가련하게 굴어도 코웃음만 쳤었다. 안타깝게 여기다니 새삼스러웠다. 시력을 잃은 일이 크기는 했다.
“전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저기, 거기 엘테르트 님이시죠? 믿어 주세요. 계속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있다가 정신 차려 보니 여기였는걸요.”
“영애를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예고가 있었으니 만일에 대비해 몇 가지 확인을 할 뿐이지요. 시작해라.”
엘테르트가 눈짓했다. 수사관이 종이 다발과 깃펜을 들고 나섰다. 황실 수사관에게 주어지는 진술서와 필기구였다. 잉크에 담그지 않아도 오랫동안 쓸 수 있는 있는 아티팩트는 조사가 길어질수록 값어치를 발휘했다. 이에샤는 호기심 어린 눈빛을 띠었다. 죄인을 문초하는 자리는 아니었으나, 수사관의 업무를 지켜보기는 처음이었다. 엘테르트가 백화 기사단에도 비슷한 역할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저는 황실 제 274기 수사관인 우드 베른스트입니다. 밀레나 알디온 양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고자 합니다. 동의하신다면 여기에, 아, 알베라 부인. 영애의 오른쪽 손바닥을 여기, 이 위치에 대 주시겠습니까?”
“잉크나 도장밥은요?”
“아뇨, 아뇨. 그런 건 필요 없습니다. 종이가 손금을 읽어 들이게 하면 됩니다.”
“어머나! 신기해라.”
이에샤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심문이 여러 차례 거듭될 때 사람이 바꿔치기당하는 일을 대비해서, 마법 처리된 종이에 손바닥을 대고 시작한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이에샤조차 알리만큼 유명한. 명문가의 딸인 발렌티아가 모르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엘테르트가 작은 목소리로 이에샤에게 속삭였다.
“부인은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내용만 기억하는 버릇이 유난히 심각한 사람입니다.”
“……알 만하네요.”
“저기! 우리 차와 간식이라도 먹으면서 이야기하는 게 어떨까요?”
발렌티아가 명랑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모두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황실 수사관의 기록이란 주정뱅이의 헛소리를 받아 적더라도, 델피르 황가 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다. 긴장하며 임해야 하는 일이었다. 대여섯 시간이 넘어가면 물이나 포도주로 목을 축이기도 했다. 하지만 군음식과 함께할 수는 없었다. 발렌티아는 좋은 생각을 떠올려 냈다는 듯이 뿌듯한 얼굴이었다.
“알디온 영애를 치장해 줄 때 보니까 살가죽이랑 뼈밖에 없을 정도로 말랐던데요. 실종된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게 틀림없어요. 이대로 두는 건 안 돼요.”
“알베라 부인. 말씀하시는 바는 알겠습니다만 조사가 일단락된 다음에도 늦지 않습니다.”
“엘테르트 군, 지금 알디온 영애는 체온도 무척 낮아요. 뜨거운 차가 필요해요. 당장.”
“하지만,”
“지금 당장요. 이렇게 어리고 힘든 아가씨 하나를 둘러싸고 이러지 말아요.”
이에샤는 눈을 치떴다. 이상한 기분이 솟았다.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었지만, 밀레나의 분위기가 바뀐 것 같았다. 밀레나가 발렌티아―의 목소리가 들리는―쪽을 바라보았다. 눈매를 샐그러뜨렸다. 드러날락 말락 한 변화였다. 이에샤는 밀레나의 그러한 표정을 처음으로 보았다. 언짢은 듯도 했고, 슬픈 듯도 했다. 자신이 알기로 밀레나와 본궁 시녀인 발렌티아 사이에는 친분이 없었다. 어찌하여 발렌티아를 향하며 울적해 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밀레나가 고개를 돌렸다. 야릇한 낯빛도 가셨다. 이에샤는 위화감을 억눌렀다. 밀레나 알디온은 본디부터 이해할 수 없는 계집애였다. 지금처럼 불가사의한 상황이라면 더더욱.
“후우! 알겠습니다. 간단한 다과라도 차려 오도록 이르죠.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멘델린 경이 직접?”
“그 밖에도 주방에 전달할 사항이 있어서 겸사겸사. 아, 앨저 경도 잠시 따라와 주겠습니까?”
엘테르트가 문가를 가리켰다. 이에샤는 어리둥절해졌다. 밀레나와 발렌티아가 방에 들어온 지 15분도 지나지 않았다. 그전까지 대화할 시간은 넉넉했다. 갑작스럽게 불러내다니, 미심쩍었다. 엘테르트는 설명을 삼갔다.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이에샤는 밀레나를 힐끗했다. 새파란 눈이 또다시 저를 본 것만 같았다. 설마, 아니겠지. 마음을 다스렸다. 엘테르트의 뒤를 따랐다.
복도로 나왔다. 문을 닫자마자, 엘테르트가 손목을 잡았다. 이끌고 걷기 시작했다. 이에샤는 뿌리치지 않았다. 엘테르트에게 무언가 뜻이 있겠거니 여길 따름이었다. 엘테르트는 허드레꾼 한 사람 지나다니지 않는 곳에서 멈추었다. 이에샤를 놓아주었다. 고개를 내렸다. 입을 이에샤의 귓전에 가져다 댔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듯이.
“알디온 영애는 명백하게 수상합니다, 앨저 경.”
“심문은 시작조차 안 했잖아요?”
“그 짧은 시간 동안 영애의 시선이 정확하게 앨저 경을 향한 횟수가 일곱 번에 달합니다. 비정상적인 빈도입니다.”
“그걸 다 세고 있었어요?”
이에샤는 질려서 물어보았다. 자신이 밀레나와 눈이 마주쳤다고 느낀 순간은 세 번을 넘지 않았다. 제삼자인 엘테르트가 더 자세하게 꿰다니. 제 주의력이 모자란가 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엘테르트는 “괜찮습니다.” 하고 북돋워 주었다. 이에샤의 무기는 차근차근한 관찰보다, 번뜩이는 기지였으니까.
“이상할 정도로 태도가 침착하기도 합니다. 제가 파악한 알디온 영애의 교양 수준은 일반적인 귀공녀의 평균을 웃도는데, 수사관이 공식 조사에 들어간다고 말했는데도 놀라거나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모든 발언이 사록으로 남는다는 걸 알면 보통은 긴장하게 마련인데요.”
“밀레나가 눈이 안 보이는 척 연기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런 것치고는 알베라 부인의 팔에 너무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어요. 놓치면 당장 넘어지기라도 할 사람처럼.”
“예. 앞뒤가 안 맞는다는 건 압니다.”
이에샤는 멈칫했다. 엘테르트의 태도는 무겁기 그지없었다. 넘겨짚는 것 같지가 않았다. 믿음을 가지고 밀레나를 의심하는 모양새였다. 생각이 알디온 후작가가 잠잠하다는 데에 미쳤다. 금장 브로치가 꿰인 크라바트를 낚아챘다. 날카로운 눈길로 엘테르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알디온에 전령을 보냈다는 거, 거짓말이었어요?”
“후작가에 도착하기 전에 몇 군데 더 들르라고 지시했을 뿐입니다.”
“저를 밀레나랑 떨어뜨려 놓으려는 이유는 뭐죠?”
“……속일 수가 없군요. 불길한 계시의 당사자 두 사람을 한자리에 두면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제가 이야기를 듣고 전해 드릴 테니 앨저 경은 연회장으로 돌아가십시오.”
엘테르트가 이에샤의 손을 풀어냈다. 앞머리를 쓸어넘겨 주었다. 이에샤에게는 못마땅한 티가 뚜렷했다. 자신의 귀로 밀레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듯했다. 미안한 마음에 쓴웃음이 흘러넘쳤다.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 당신이 알디온 영애와 함께 있으면 큰일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근거는 없지만.”
============================ 작품 후기 ============================
돌아왔습니다...돌아올 땐 연참하고 싶었는데 실패했네요...
지금 스스로도 질질 늘어지는 느낌을 받는데 의외로 전편과 붙여놓고 읽으면 분량이 얼마 안 돼서...제 스타일이 연재랑은 잘 안 맞는구나 싶습니다...밀레나가 재등장한 지 이제 1화 지났다는 게 제 자신도 안 믿겨요...
아무튼 오늘부터 일일연재 재개합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