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수는 검 한 자루-146화 (146/164)

00146 11. 파국 =========================

(연참 2/2)

“뭐?!”

이에샤가 놀람과 동시에, 애버토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선에서 물러났어도 애버토스는 황실의 중역이었다. 달신의 계시도 전해 들었다. 그를 에르실반이 어떻게 풀이했는지도. 황실이 신년맞이 무도회를 밀어붙인 까닭은, 계시 내용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약속의 날’이 다른 날일지도 몰랐다. ‘첫 번째 발’이 다른 것을 가리킬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에샤의 동생이 돌아왔다. 상황이 달라졌다.

“지금 연회장이 발칵 뒤집혔어요. 실종됐던 알디온 영애가!”

“걔가 뭘 어쨌길래 그래?”

“나이트가운 한 장만 걸치고 맨발로 정원에서 걸어 나왔어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물어봐도 모른다고만 대답하고, 정신을 차려 보니 황궁이었대요. 눈도 여전히 안 보이는 것 같아요.”

이에샤는 미엘라가 달려온 연유를 알아차렸다. 알디온 후작가는 대문을 걸어 잠근 채였다. 오스터와 셀더리는 어느 모임에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전령을 보내도, 부부가 도착하기까지 두 시간은 걸릴 터였다. 하나뿐인 피붙이가 밀레나를 돌보아 마땅했다. 이에샤는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조차 못 했다. 계시를 외는 에르실반의 목소리만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뭐야, 정말이란 말이야? 오늘 대재앙이 일어난다고? 어디서? 어떻게?’

“앨저 경!”

애버토스가 장식용 지팡이로 바닥을 찍었다. 남자 손으로 성년이 된 귀부인을 두드리거나 쥐어흔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샤는 “핫.” 하며 상념을 떨어냈다. 애버토스를 돌아보았다. 부리부리한 눈이 소리 없이 이에샤에게 침착하라고 일렀다.

“엘테르트 녀석 문제로 우리끼리 티격태격할 때가 아닌 거 같군. 나는 폐하를 모시러 가겠네. 경은 동생에게 가 보게.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겠지?”

“문초실에 격리하고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캐묻겠습니다.”

“그대가 냉철하고 영리한 기사라 다행이군.”

이에샤는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냉철하다니. 저와는 동떨어진 소리였다. “우리는 선례를 만드는 중이니까요.” 하던 네세라의 타이름을 기억했을 따름이었다. 애버토스는 이에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성큼성큼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판테라 자작이 따라붙었다. 이에샤도 미엘라에게 턱짓을 까딱했다.

“밀레나한테 뭔가 이상한 점은 없었어?”

“이상하다면 전부 이상했죠. 구태여 꼽자면, 영애가 정신을 차리니 황궁이었다고 말씀하신 게 걸려요.”

“집에서 실종된데다 눈도 안 보이는 애가?”

“네. 거짓말을 하는 걸까요?”

“이제부터 캐 봐야지.”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걸었다. 미엘라의 통찰력은 날카로웠다. 자기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정신을 차려 보니 황궁이었다.” 하고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눈이 보인다면 모를까, 밀레나에게는 세상이 깜깜했다. ‘어디인지 모를 정원이나 숲’쯤으로 깨달았어야 옳았다.

미엘라는 이에샤의 걸음에 맞추느라 뛰듯이 했다. 숨을 할딱거렸다. 띄엄띄엄한 말투로 물었다.

“저, 정말 문초실로 데려가실, 건가요? 영애가 잘못한 건 딱히 없잖아요. 후우!”

“적당히 표현한 거야. 경 말대로 죄인도 아닌데 어떻게 데려가겠어? 객실 중 하나를 잡아서 수사관이 심문할 거야. 나랑 에르실반 님도 참관하고. 난 기사단장이라기보다 걔 보호자라서 끼는 거지.”

“아! 저는 앨저 경이 백화 기사단장으로서 알디온 영애를 심문하신다는 건 줄 알았어요.”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할 뿐이니까. 알아낼 거 다 알아내면 집으로 보내야지. 그냥 우연의 일치라면 좋겠는데…….”

이에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 에브라힐에는 중부의 모든 귀족이 모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사건 사고가 벌어진다면, 피해가 클 터였다. 밀레나의 귀환이 아무런 일도 아니라면 좋으리라. 하지만 어림없는 기대인 줄 알았다. 달신의 계시와 에르실반의 풀이가 맞아떨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지난해를 돌이켜 보았다. 딜란 렌디드 같은 미친놈이 또 나타났으면 어떡하지. 오만 생각이 떠올랐다.

1층에 다다랐다. 술렁거리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에샤는 인파를 헤쳤다. 중앙 현관으로 나아갔다. 제국 기사 몇 사람이, 다른 귀족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곳을 찾았다. 밀레나의 모습이 보였다. 밀레나는 산발한 채, 제국 기사단 정복의 코트를 어깨에 둘렀다. 고개가 푹 꺾어졌다.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서 ‘알디온 영애’, ‘실종’, ‘시든 꽃’ 어쩌고 하는 쑥덕임이 들려왔다. 이에샤는 눈살을 찌푸렸다. 밀레나에게 다가갔다. 제국 기사들이 자매를 흘끔거렸다.

“밀레나.”

밀레나가 얼굴을 들었다. 이에샤를 바라보았다. 이에샤는 흠칫했다.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눈길을 두었을 뿐이겠으나, 밀레나가 저를 향하는 데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에샤 언니구나.”

“……가자. 부축해 줄게.”

“어디로?”

“조용한 곳. 몇 가지 질문만 하고 너희 집으로 보내 줄 거야. 네 부모가 데리러 올지도 모르고.”

이에샤는 오스터 알디온을 제 아버지가 아닌 것처럼 일컬었다.

밀레나가 양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격식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동작이었다. 이에샤는 서슴없이 움직이는 밀레나를 처음 보았다. 다소곳한 꽃 한 송이 같던 인상이 바랬다. 낯선 느낌이 들었다.

밀레나의 겨드랑이 밑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거부감이 치밀었지만 별수 없었다. 밀레나는 맹인들이 그러하듯이, 자유로운 팔을 앞으로 뻗었다. 허공을 더듬거렸다. 주춤주춤 걸었다. 이에샤는 한숨을 쉬었다. 작년만큼이나 바쁜 신년맞이 무도회가 되리라는 예감이 솟았다.

이오르와 애버토스가 본궁으로 피했다는 전갈이 다다랐다. 루시온은 수레국화궁에 남았다고 했다. 밀레나가 나타났다고 해도 주변은 잠잠했다. 대재앙의 조짐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무도회를 계속하려도, 멈추고 참가자들을 흩으려도 지휘자가 필요할 터였다. 루시온은 부황으로부터 전권을 넘겨받았다. 모인 귀족들에게 되도록 돌아가라는 권고를 내렸으나, 따르는 이는 드물었다. 엘테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인간은 평화가 이어지면 위험에 둔감해진다고 합니다.” 하고 설명했다. 이에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마조마한 자신과 다르게 연회장은 열을 띠었다. 사람들은 밀레나의 출현을 흥밋거리로만 삼았다.

이에샤와 에르실반, 엘테르트는 3층 객실에 모였다. 근위 기사와 황실 수사관도 끼었다. 이에샤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인상을 구겼다. 옐윈 리토스가 엘테르트와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엘테르트는 껄끄러운 듯했지만, ‘일이니 참는다.’ 하는 태도로 옐윈을 상대했다. 옐윈은 이에샤를 보고 노골적으로 업신여기는 표정을 지었다. 이에샤와 엘테르트를 번갈아 힐끔댔다. 추잡한 상상을 하는 티가 뚜렷했다. 이에샤는 속을 다스리며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리토스 경은 왜 여기 있죠? 오늘 경비의 총책임자는 4 기사단장이었을 텐데요.”

“그는 대피 시설을 점검하러 갔습니다. 오늘 근무를 서는 근위 기사 중에서는 리토스 경이 가장 큰 권한을 가져서 대타로 부른 겁니다. 알디온 영애는 어디 계십니까?”

“차림새가 엉망이라 알베라 부인에게 잠시 맡겼어요. 단장이 끝나면 이곳으로 오도록 말했습니다.”

발렌티아 알베라 후작 부인은 본궁에서 일하다, 수레국화궁을 열면 시녀장으로 서는 귀부인이었다. 이실리아의 사촌이기도 했다. 황족에게 시집온 여자란 가족과 인연이 끊어진다지만, 세상일은 원칙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황실의 사돈집이란 떵떵거리게 마련이었다. 발렌티아 또한 이실리아 덕으로 황제의 말벗이 되었다.

이오르는 출산으로 몸이 망가진 이실리아에게 죄책감을 품었다. 바람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었다. 이실리아가 발렌티아를 내세우며 “폐하의 용안을 뵈면 내장이 진탕하는 듯하니 전하실 말씀은 알베라를 통해 주소서.” 하고 쏘아붙인 사건은 유명했다. 황제 부부의 연락책인 만큼 알베라 부인도 권세가 높았다.

“알베라 부인이라…….”

“왜 그래요, 멘델린 경?”

“아닙니다. 조금 지체되겠군요.”

엘테르트는 부드럽게 에둘렀다. 발렌티아는 상냥했지만, 사치스럽고 머리가 나빴다. 엘테르트는 세 살배기 적부터 발렌티아를 보았다. 저를 귀여워해 주면서도 하는 말의 반도 알아듣지 못하는 여자였다. 일을 맡기면 믿을 수 없으리만치 망쳐 놓고는 했다. 이에샤는 모르고 밀레나를 맡겼으리라. 철모르는 발렌티아는 밀레나를 어여쁘게 꾸미겠다고, 하녀들을 들볶을 것이 틀림없었다. 한숨이 나왔다.

엘테르트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발렌티아가 밀레나를 부축하여 객실로 들어온 때는, 한 시간하고도 삼십 분이 지난 뒤였다.

============================ 작품 후기 ============================

마음이 복잡해서 트위터에는 6월 5일까지 쉰다고 공지했는데 조아라에 직접 공지하지 않았더니 걱정해 주신 분들이 계시네요...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코멘트 확인도 한동안 안 하다가 보고 놀라서 부랴부랴 올립니다...

발렌티아는 나름대로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캐릭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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