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수는 검 한 자루-145화 (145/164)

00145 11. 파국 =========================

(연참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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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르력 754년 1월 25일. 이에샤에게는 두 번째 신년맞이 무도회 날이 밝았다.

열다섯 살이 넘은 중부 귀족이라면 황실 신년맞이 무도회를 빼먹지 않았다. 큰돈을 들여서 올라오는 지방 귀족도 흔했다. 열아홉이 되도록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이에샤뿐일 터였다. 거기다 올해는 참가자로서 나온 것도 아니었다. 은밀하고 강제적으로 벌어지는 음행을 막기 위해, 휴가도 마다하고 출근했다.

이에샤는 제가 많은 여자 귀족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별나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네세라에게 들은 ‘매해 무도회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이 아니었다면, 저도 엘테르트의 파트너로 나왔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남과의 차이점보다 공통점을 찾는 편이 좋았다. 사람들 사이에 훌륭하게 녹아든 기분이 들었으므로.

네세라는 이에샤가 여성의 대표라도 되어, 바깥일에 나설 권리를 따냈으면 하는 모양이었으나―이에샤 자신도 여성을 지키는 일을 목표 삼았으나―이에샤는 평화롭게 어우러져 살고 싶었다. 기본적으로 소란이 싫었다. 조용한 것이 좋았다.

그러므로 몰려드는 귀족 무리에 기가 질렸다. 작년에도 겪어 보았지만, 그때는 무도회가 시작하고야 입장했었다. 1년 사이에 기억도 흐려졌다. ‘그렇게 붐비지도 않았나?’ 하고 여기게 되었다.

‘붐비지 않기는 개뿔.’

백화 기사 네 명과 달신교 사제 스물한 명―스물다섯 명만으로 대연회장을 둘러볼 수 있을까. 자신감이 수그러들었다. 네세라가 꿋꿋한 얼굴로 섰다. ‘허튼짓하는 놈이 있으면 가운뎃다리를 부러뜨려 버리겠어.’ 하는 다짐이 풍겨 나왔다.

“주로 희롱당하는 표적은 술에 취한 아가씨예요. 특히 열예닐곱, 어린 영애들은 자기 주량을 잘 몰라요. 샴페인이 달짝지근하다고 들이켜다가 취하는 일이 많죠. 와인 테이블 가까이에서 있다가 걱정스러운 아가씨가 나타나면 눈여겨보세요.”

미엘라가 말꼬리를 물었다.

“웨이터들은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마다 맡은 구역 안에서만 돈답니다. 사제님들, 수레국화궁 도면 받으셨죠? 제가 표시해 놓은 데가 각 구역을 둘러보기 편한 지점이에요. 마찬가지로 과음하는 여자가 있나 주시해 주세요.”

“부축받아 움직이는 여자를 보면 무조건 따라가세요. 어느 집안 아가씨인지, 부축인하고는 무슨 사이인지, 어느 휴게실로 갈 셈인지 똑똑히 확인해야 합니다.”

“사제복을 보고도 막 대할 사람은 적겠지만……. 행여라도 남자 귀족과 시비가 붙는다면 곧장 앨저 경이랑 스란 경, 에르실반 님이 대기하시는 곳으로 도망치세요. 어차피 소란이 일어나면 음흉한 짓을 계속하기는 어려울 테니까요. 무조건 사제님들의 안전이 우선이에요.”

네세라와 번갈아들며 설명했다. 어제저녁에 들은 이야기였지만, 모두 귀를 기울였다. 에르실반만이 가라앉은 낯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곤두선 모습이었다. 계시가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이에샤도 덩달아 조마조마해졌다. 예사로운 수레국화궁 풍경을 보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백화 기사로서의 일이 먼저였다. 엘테르트가 옳았다. 불안해 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브리핑을 마쳤다. 자기 자리로 움직여야 했다. 이에샤와 스란은 중앙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다가, 폭력 사태에 대비하기로 정해졌다. 나머지는 흩어져서 대연회장을 감시할 계획이었다. 이에샤가 걸음을 옮기려는 참이었다.

“앨저 경.”

뒤쪽을 돌아보았다. 정장 차림에 머리카락을 올백으로 넘긴 남자가 섰다. 중년 신사는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고 일깨워 주듯 “이에샤 앨저 경.” 하고 되풀이했다. 이에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판테라 자작입니다. 경에게 전언이 있습니다.”

“전언? 누구의?”

이맛살을 찌그렸다. 생각에 잠겼다. 판테라 자작이라니.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판테라가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앨저 경을 4층 접견실에서 기다리겠노라고,”

4층은 대귀족을 위한 곳이었다. 세도가가 아니면 올라갈 수조차 없었다. 황태자의 휴게실도 4층에 자리했다. 황제는 2층을 썼으나, 이오르가 다리를 저는 까닭이었다. 이에샤는 판테라가 누구인지 떠올려 냈다.

“멘델린 공작 각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판테라 자작가. 멘델린 공작가의 가신 집안. 애버토스의 시종이 눈짓으로 이에샤를 다그쳤다. 이에샤는 낯빛을 굳혔다. 멘델린 공작은 제국에서 황자만큼이나 존엄한 사내였다. 전언이라고 했지만, 물리쳐서는 안 되는 명령이었다. 한숨을 내쉬었다. 스란을 보았다.

“미안하지만 먼저 가 있어. 최대한 빨리 합류할게.”

“알겠습니다.”

스란은 고분고분 받아들였다. 이에샤를 지켜보라는 암무단장의 말을 떠올렸다. 괜찮을 터였다. 상대방이 지나칠 정도로 믿음직했다. 애버토스 멘델린이 수상쩍다면, 의심받지 않을 사람이 없었으므로. 이에샤가 판테라를 따라 계단으로 향했다. 스란은 일꾼이 드나드는 샛문을 지났다. 눈부신 대연회장이 펼쳐졌다.

수레국화궁은 천장이 높았다. 계단도 그득그득했다. 이에샤는 꼭대기까지 쉬지 않고 올라갈 수 있었다. 하나 판테라는 달랐다. 3층으로 이어지는 층계참쯤에서 다리가 느려졌다. 판테라의 체력은 보통의 중년 남자다웠으나, 이에샤에게는 한심하게만 비쳤다. 답답함을 억눌렀다. 슬렁슬렁 걸었다. 4층에 다다랐다. 판테라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에샤는 태연스럽게 서서 기다려 주었다.

인적이 뜸했다. 4층을 쓸 만한 대귀족은 몇 안 되거니와, 무도회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대연회장이 붐빌 때였다. 객실을 쓸 사람은 드물었다. 판테라가 앞장섰다. 복도 깊숙이로 이에샤를 이끌었다. 커다란 쌍여닫이 앞에 멈추어 섰다. 똑똑! 문을 두드렸다. 점잖은 몸가짐으로 문짝을 밀었다. 닫히지 않도록 붙들었다. 안쪽으로 팔짓했다. 이에샤를 들여보냈다.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누구에게인지―이에샤와 애버토스―모르게 덧붙였다.

화려한 방이었다. 평소에는 잠가 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농홍색 양탄자가 빈틈없이 깔렸다. 떡갈나무로 만든 벽장과 진열대가 늘어섰다. 도자기 꽃병에 하얀 글라디올러스가 꽂혔다. 온실에서 길러 낸 모양이었다. 애버토스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부전자전이었다. 엘테르트도 흰 꽃을 좋아했다.

애버토스 멘델린 공작은 안락의자에 앉은 채였다. 팔걸이에 팔꿈치를 붙였다. 손허리뼈로 뺨을 괴었다. 은색 머리털 틈틈이 세어서 광택을 잃은 백발이 섞였다. 푸른 눈동자에는 형형한 빛이 서렸다. 쉰의 나이도 애버토스를 무르게 만들지 못했다. 훤칠한 아들과 달리 중키인데도, 다부진 체격이 위압감을 뿜어냈다. 엘테르트와는 참으로 달랐다. 심약한 사람이라면 눈도 맞추지 못할 성싶었다.

이에샤는 오른 무릎을 바닥에 댔다. 고개를 수그렸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부르셨습니까.”

“일어나게. 올해도 근사한 차림으로 나타났군.”

“과찬이십니다.”

애버토스가 저를 부른 까닭이 무얼까. 마른 입안을 침으로 축였다. 짚이는 바라면 있었다. 엘테르트는 부모 모두 이에샤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고 말했다.

“레이디 엘로나께서는.”

“엘로나 님은 오늘 나오지 않으셨네. 나도 무도회에 얼굴을 비칠 생각은 없어.”

“…….”

“경을 만나고자 온 걸세.”

이에샤의 이맛살이 죄어들었다. 애버토스로부터 따끔따끔한 적의가 느껴졌다. 각오는 했으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제가 이러한 미움을 받아 내야 하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이에샤를 바란 쪽은 엘테르트였고―이에샤도 엘테르트를 손 놓지 못하게 되었지만―결혼하기를 바란 사람도 엘테르트였다. 이에샤는 애버토스와 엘로나의 귀여움받는 며느리가 될 셈이 없었다. 엎드려서 아양 떨기는 싫었다.

엘테르트에게도 화가 났다. 애버토스는 이에샤에게 까마득하게 높은 대귀족이었다. 부조리한 소리를 들어도 맞서기 어려웠다. 엘테르트가 책임지고 막아 주었어야 했다. 이에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엘테르트는 무기와 무기 휘두르는 자를 싫어하지.”

“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나한테조차 서슴없이 검을 들 때의 아버님은 존경스럽지 않다고 말한 녀석이야.”

젊은 시절의 애버토스는 근위 기사 못지않은 검사였다. 멘델린 공작가를 이끌려면, 문무를 갖추어야 한다고 믿었다. 검에 뜻이 없는데도 검술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들 또한 자신처럼 되었으면 했다. 검 따위 싫다고―드물게―칭얼거리는 엘테르트에게 최강의 스승을 붙여 주었다. 그 고집이 엘테르트의 생명을 앗아갈 뻔했었다.

“그런 아들이 검의 귀재를 사랑한다고 말하니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나. 얘기나 한 번 해 보고 싶었네. 앨저 경의 어느 부분이 내 아들을 사로잡았는지도 알아볼 겸.”

“전 그냥…….”

“봐도 전혀 모르겠군.”

이에샤가 인상을 구겼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떠올렸다. 서둘러 짜증을 갈무리했다. 애버토스가 피식하고 싱겁게 웃었다.

“엘로나 님처럼 빼어난 미인도 아니야. 바르벨로샤 공주님처럼 학술에 조예가 깊지도 않아. 엘테르트와 닮아서 고결한 신념을 품지도 않았지. 앨저 경의 검술은 따를 자가 없다지만, 엘테르트는 검술을 싫어하지 않나. 참으로 기묘하단 말이야.”

“각하께서는 저를 모욕하고 싶어 불러들이신 겁니까?”

“사실을 말했을 뿐이네. 난 앨저 경, 그대한테서 어떤 특별함도 찾지 못하겠군. 엘테르트가 한때의 미혹에 정신 못 차린다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아.”

이에샤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모멸감이 밀려들었다. 멘델린 공작이고 연인의 아버지이고, 얼굴에 장갑을 던져 주고 싶었다.

애버토스는 이에샤를 싫어하지 않았다. 아니, 좋아하는 편에 가까웠다. 이에샤가 입궁해서 세운 공이 얼마던가. 여자 기사에게 쏟아지는 멸시를 1년이나 견딘 일이 대단스럽기도 했다. 하나 애버토스가 여기기에 엘테르트의 반려는 살뜰한 여인이어야만 했다. 사라져 버린 이에샤의 이복동생처럼. 가망 없는 이에게 빠져, 어머니를 슬프게 하는 엘테르트가 한심스러웠다.

“여기사가 지니는 의미를 부정하지는 않겠네. 남성한테만 열려 있던 문을 여성이 두드리고, 같은 여성을 지킨다는 취지는 훌륭해. 하지만 그런 일을 짊어져야 할 만큼 위태로운 처지의 여자를 내 아들의 짝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지 않겠나.”

멘델린 공작가의 안주인에게 무력이란 쓸모없었다. 유리온실 속의 장미처럼, 아름답고 안전한 삶이 기다렸다. 궂은일에 뛰어들지 않아도 되었다. 검술 따위 모르는 편이 좋았다.

이에샤는 헛웃음을 흘렸다. 불경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들이고 아버지고 앞서 나가기는.

“각하께서는 무언가 착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음?”

“저는 멘델린 경이랑 결혼하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저한테 멘델린 공작가라는 이름은 거추장스러울 뿐이에요. 절 아내로 맞고 싶어하는 건 각하의 아드님뿐이죠.”

“그게 무슨……!”

애버토스가 성을 내기도 전이었다.

이에샤의 감각에 달음박질치는 기척이 느껴졌다. 한 사람이 다가왔다. 문 밖의 판테라 자작에게 무어라 무어라 이야기했다. 이에샤는 방문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미엘라가 판테라에게 “앨저 경께 급한 볼일이 있어요!” 하고 양해를 구했다. 문이 열렸다.

“애, 애, 앨저 경!”

“경박하게 무슨 짓이야? 올센 경. 멘델린 공작 각하 앞이야.”

“죄송합니,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이에샤는 애버토스에게 고개를 꾸벅했다. 미엘라를 돌아보았다. 미엘라가 불안스럽게 눈알을 굴렸다. 방 안으로 들어설 용기가 안 나는 것 같았다. 나와 달라는 듯이 이에샤에게 손짓했다.

“알디온 영애가 돌아오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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