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2 11. 파국 =========================
품으로 파고들어 팔꿈치를 휘두르면, 셈브리온은 왼쪽으로 비껴들었다. 급소가 아닌 부분을 내주었다. 이에샤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이에샤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떠밀렸다. 발뒤꿈치에 무게를 실으려고 용썼다. 반동을 써서 튀어 나갔다. 또다시 격돌.
머릿속에서 십여 합이 지나갔다. 셈브리온은 브링을 감추는 데 능했지만, 두어 번 붉은색 브링이 빠직거렸다. 이에샤는 검을 늘어뜨린 채 상상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떠올리는 검로와 보법은 진짜로 행할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이에샤는 검술에 한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못하는 일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깜냥이 안 되는 움직임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그것은 본능에 가까웠다.
새카만 검끼리 부딪쳤다. 셈브리온은 여유롭게 힘을 주었다. 이에샤의 검을 밀어냈다. 이에샤는 악으로 버티다가, 자세라도 바로잡고자 뒷걸음질 치게 될 터였다.
그때, 불현듯이 알아차렸다. 셈브리온은 완력으로 밀어붙일 때 왼쪽 옆구리가―지극히 미세하게―느슨해졌다. 심상이 그러하다는 게 아니었다. 실제 셈브리온과의 대련에서도 같은 빈틈이 있었다. 그동안은 깨닫지 못했다. 방금 처음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에샤는 셈브리온을 몰아붙일 수 없었다. 석곡궁 건물과 연무장을 잇는 길에서 인기척이 났다. “앨저 경!”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아! 억눌렀던 숨을 터뜨렸다. 등허리에서 힘을 풀었다. 아까워 죽을 것 같았다. 스승의 경지에 한 발자국 다가선 듯했는데, 김이 새어 버렸다.
미엘라가 잰걸음으로 걸어오다가, 이에샤가 보이자 달음박질했다. 꼬마 같은 모습이 귀여웠다. 이에샤는 싱거운 웃음을 머금었다. 검을 허리띠로 되돌렸다. 미엘라나 시더는 몸체가 거무칙칙한 이에샤의 검을 무서워했다. 미엘라가 움츠러들지 않도록 마음 쓴 것이었다. 이에샤 자신은 배려라고 깨닫지 못했으나, 생각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행동이 우러나왔다. 검술 말고도 발전한 점이 있었다.
미엘라가 석회암으로 포장한 연무장에 발을 디뎠다. 이에샤 앞에 멈추어 섰다. 고개를 꾸벅했다. 이에샤는 “무슨 일이야?” 하고 물어보았다.
“손님이 오셨어요!”
“손님? 그런 일정 없는데.”
“갑자기 찾아오신 분이에요. 달신교에서 나오셨는데! 그, 그게, 그러니까.”
“누구길래 그래?”
캐물으면서도 누구인지 알 성싶었다. 미엘라는 ‘높으신 분’과 마주할 때마다 쩔쩔맸다. 달신교의 손님 가운데 주눅이 들 만한 사람이라면 정해졌다. 이에샤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달의 여섯 딸은 고위 성직자였다. 오랫동안 교단에 몸 바친, 나이 든 사람일 것이 틀림없었다. 이에샤는 앨저 백작으로서 성직자이자 평민인 노부인을 어찌 대하면 좋을지 따져 보았다. 미엘라가 대답했다.
“무도회에 오기로 한 다, 달의 따님 중 한 분이세요. 급히 앨저 경을 뵈어야 한다고.”
“무도회까지는 보름이나 남았는데, 왜?”
“저도 바로 달려와서 무슨 용건인지는 모르겠어요. 아무튼 어서 가요!”
이에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미엘라가 쫑쫑 따라붙었다. 오솔길을 지나, 석곡궁 건물로 접어들었다. 단장 사무실 쪽에서 기척 둘이 느껴졌다. 네세라가 이에샤 대신 손님을 접대하는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미엘라에게 “옷 좀.” 하고 말하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땀은 흘리지 않았다. 제자리에서 심상으로만 움직였으므로. 가죽 바지를 트라우저로 갈아입었다. 셔츠도 벗어 던졌다. 자보가 달린 블라우스를 걸쳤다. 코트는 걸어가면서 여몄다. 사무실에 다다랐을 때는 십여 분이 지난 뒤였다. 이에샤는 점잖게 보이도록 걸음새를 다잡았다.
네세라와 미엘라는 떠난 채였다. 응접 소파에 노파 한 사람이 앉았다. 검은 원피스―하이웨이스트를 졸라매고 부드럽게 늘어뜨린―에 군청색 망토를 두른 차림이었다. 망토 아랫단에는 별처럼 비즈가 박혔다. 낯익은 모양새였다. 이전에 만난 하급 사제 슈리도 같은 망토를 둘렀었다. 노파의 가슴께에는 달신교 심벌이 수놓이지 않았다. 대신 은으로 만든 펜던트를 걸었다. 머리카락이 짙었다. 중년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자세히 살피면 주름살이 깊고 잘았다. 예순은 되었을 듯싶었다.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공주의 시녀장인 말비다가 깐깐하다면, 노파는 무심해 보였다. 자비로운 성직자 같지는 않았다. 이에샤는 노파의 맞은편에 앉았다. 고개를 까딱했다.
“안녕하시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안녕하십니까. 기별도 없이 찾아왔으니 제가 폐를 끼쳤지요.”
“앨저 백작 이에샤요. 황궁 내에서의 직책은 알다시피 백화 기사단장이고.”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앨저 경. 달신의 셋째 딸, 에르실반이라고 합니다.”
달신의 맏딸은 대사제를 일컬었다. 셋째 딸이라면, ‘달의 여섯 딸’에서는 버금으로 높은 자리였다. 예상보다 거물이 왔네. 이에샤는 놀라움을 감추며 생각했다. 탁자에 찻잔이 놓였다. 시더가 준비해 둔 모양이었다. 홍차로 목을 축였다.
에르실반의 눈동자는 올리브색이었다. 노인답게 흰자위가 노르께했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무심한 눈에 이에샤가 비쳤다. 고매한 성직자이기 때문일까? 이에샤는 속마음이 까뒤집힌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에르실반 사제. 귀하가 날 급하게 찾았다고 들었소만, 영년 무도회 관련이오?”
“……앨저 경은 젊고 영특하시지요.”
“갑자기 무슨 소리요?”
“젊은이는 대화를 빠르고 간단하게 마쳐야 똑똑하다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을 놓치기 싫으시다면, 경, 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짚어 나가는 편이 좋습니다.”
눈을 가늘게 떴다. 에르실반의 말속을 풀이하자면 “재촉하지 말고 들어라.”쯤 되었다. 이에샤에게 상하를 일깨워 줄 셈도 있었으리라. 에르실반이 황족이라도 욕하지 않는 한, 이에샤는 달신교의 삼인자를 건드리지 못했다. 황실과 해달신 교단의 관계는 조심스러웠다. 신분이 낮을지언정 우위를 점한 쪽은 에르실반이었다. 이에샤는 피식 웃었다. 자존심은 상했으나, 화는 나지 않았다. 이만한 배짱과 노련미를 갖추었다면 골통 같은 남자 귀족도 휘어잡을 법했다.
“좋소. 경청할 테니 편하게 말하시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르실반이 차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손은 머리카락과 얼굴보다 늙은 티가 났다. 쪼글쪼글한 살결이 노인다웠다.
“어디서부터 운을 뗄까요. 앨저 경, 신의 계시를 믿으십니까?”
“글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내가 믿고 안 믿고는 관계없는 문제 아닌가?”
“그렇긴 하죠. 아무리 불신자가 늘어나더라도 계시는 실존하니까. 어제 새벽, 저한테 달신의 계시가 내려왔습니다.”
이에샤는 종교와 동떨어져 살았다. 신이 있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신을 믿지는 않았다. 계시라고 해도 무덤덤했다. 달신의 계시와 황실 무도회가 무슨 상관인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눈만 끔뻑였다.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에르실반이 한숨을 쉬었다.
“그 내용이 너무나 흉해서 길을 마구 재촉했지요. 본디라면 내일모레에나 수도에 들어설 예정이었는데, 오늘 아침에 중부 대사원에 도착했습니다. 앨저 경도 진지하게 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앨저 경께는 피를 나눈 형제가 있으십니까?”
이에샤는 입을 다물었다. 에르실반이 꺼낸 화제는 이에샤가 달아나던 것이었다. 밀레나의 실종 소식을 듣고, 한동안 멍했었다. 저와 만난 이튿날 사라지다니. 맹인 계집애가 어디로 갔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큰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밀레나가 어떻게 되든지 알 바 아니었다. 다만 뒤숭숭한 기분은 어찌할 수 없었다. 이에샤는 밀레나 이야기를 피하며, 엘테르트나 부하들과 즐겁게 지내려고 애써 왔다.
말문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만 꼴깍꼴깍 들이켰다. 평민인데다 세속과 먼 에르실반은 알디온 후작가의 스캔들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
“이복 여동생이 한 명 있소만.”
“지금 수도에 계시지 않겠군요.”
“그걸 어떻게 알았지?”
“달신께서 약속의 날, 먼 땅에서부터 첫 번째 발의 핏줄이 돌아오리라 말씀하셨으니까요.”
이에샤는 눈살을 찌푸렸다.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첫 번째 발이라니. 앞뒤를 재어 보면, 자신을 가리키는 성싶었다. 에르실반이 무뚝뚝한 말투로 풀이해 주었다.
“계시라는 게 그렇습니다. 추상적이죠. 약속의 날은 영년 무도회를 말할 겁니다. 저희가 황실과 협력하기로 한 날. 앨저 경은 백화(百花) 기사단장이지만, 달신께서는 여인을 꽃에 빗대지 말라 하셨습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사람일 수 없다고. 정황으로 미루어 첫 번째 발이란 최초로 여자 기사의 길을 걸으시는 앨저 경을 가리키지 싶습니다.”
‘갈수록 마음에 드네, 달신.’
“그다음, 핏줄. 보통 계시에서 부모를 지칭할 때는 근원이라는 낱말이 쓰입니다. 핏줄은 형제자매에게 붙곤 하죠. 무조건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서 내 여동생이 무도회 날 나타난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음을 듣자 하니, 이에샤의 이복동생은 자기 발로 떠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돌아온다.’가 아니라 ‘나타난다.’라고 말했으므로. 에르실반의 머릿속에서 아귀가 맞아떨어져 갔다.
“예. 동생분이 무도회 날, 아마도 수레국화궁에 나타나실 겁니다.”
“밀레나가, 어떻게? 대체 왜?”
에르실반은 곁눈으로 창밖을 보았다. 대화 상대를 무시하는 태도였다. 이에샤는 발끈하지 않았다. 아니, 동질감마저 느꼈다. 옛날에 자신이 남과 이야기할 때도 비슷했었다. ‘달의 여섯 딸’이 될 만큼 성력을 타고난 사람이라면 대인 관계가 평범하지는 못했으리라.
“어떻게 나타나시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왜, 라는 물음에는 답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에르실반이 눈동자를 굴렸다. 도로 이에샤를 바라보았다. 이에샤는 어리둥절한 낯빛을 지었다. 녹갈색 눈 깊숙이에서 무언가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 거무칙칙한 감정이었다. 불안보다 거세고, 우울보다 어두운…….
‘공포?’
달신의 세 번째 딸은 두려워하는 중이었다. 서늘한 얼굴 밑으로 겁이 언뜻언뜻했다. 이에샤는 눈을 치켜떴다. 예감이 나빴다. 이런 뒤에는 성가신 일이 벌어지고는 했다. 까닭이 궁금하면서도, 듣고 싶지 않았다. ‘하여간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계집애.’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에르실반이 입을 열었다.
“대재앙을 불러일으킬 제물로써, 앨저 경의 이복 여동생은 돌아오실 겁니다.”
============================ 작품 후기 ============================
에르실반 관련해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소설 내용을 듣고 이런저런 조언이나 평가를 주는 친구에게 달의 여섯 딸이라는 고위 성직자 캐릭터가 나올 거라고 했더니, 신비로운 분위기의 미녀 캐릭터일 줄 알았다네요. 달의 딸들은 여섯 명 모두 할머니입니다. 다양한 연령의 여자 캐릭터가 살아가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에르실반 외의 달의 딸은 아마 등장하지 않겠지만... 푸근한 할머니도 있고 괴팍한 할머니도 있고 가는귀가 먹은 할머니도 있지 않을까요.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