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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141화 (141/164)

00141 11. 파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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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돼!’

셈브리온은 내지를 뻔한 소리를 씹어 삼켰다.

누추한 방이었다. 푸른색 빛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점만 빼면, 움막보다 나을 바가 없었다. 벨체터의 추위에는 곰팡이가 살기 어려웠다. 하나 울창한 숲 속의 나무집은 벽 이곳저곳이 얼룩졌다. 지저분한 가운데 흰 나이트가운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밀레나는 짚을 엮어 만든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은 채였다. 송장 같은 모습이었다. 커다란 인형처럼 보이기도 했다. 요요한 미모가 비현실적인 느낌을 더했다.

아고르가 셈브리온의 어깨를 두드렸다. 셈브리온이 돌아보았다. 목에서 찌걱찌걱 소리라도 날 듯싶었다. 아고르는 셈브리온의 놀라움을 알아채지 못하고, 쾌활하게 말했다.

“예쁘지? 뜻밖의 수확물이야.”

“수확물이라고? 이 새끼야, 어디서 납치해 온 아가씨냐? 딱 봐도 귀족인데.”

“납치라니! 제대로 동의 받고 모셔 왔어. 병든 몸으로 먼 거리 건너뛰었더니 곧 죽을 거 같길래 재워 놨을 뿐이야.”

셈브리온의 눈썹이 치솟았다. 병들었다니. 셈브리온이 알기로 밀레나는 건강했다. 이에샤가 쫑알대기를 살결이 고와지고, 얼굴색이 좋아졌다고도 했다. 그러나 눈앞의 밀레나는 중환자처럼 보였다. 가냘픈 몸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말랐다. 코르셋을 받치지 않아도 드레스가 들어갈 것 같았다. 살갗 아래로 정맥이 훤하게 비쳤다.

“어디가 아픈 아가씬데?”

셈브리온은 밀레나를 모르는 척 물어보았다. 아고르가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마력에 중독됐어. 아니, 내가 중독시켰다고 해야 하나?”

“뭐? 그럼 어떻게 되는데? 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나도 고의는 아니었다고.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 텐데, 밀레는 이미 때를 놓쳐서 가망이 없어. 자는 동안에만 증세가 멈추도록 눌러 놓은 거야.”

“밀레……?”

아고르가 여동생이라도 부르듯이 밀레나를 불렀다. 젊은이 같은 모습이어도, 위화감이 컸다. 셈브리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알디온 저택에 머무르던 무렵을 돌이켜 보았다. 독단적으로 상냥한 밀레나가 꺼림칙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이에샤처럼 미워하지는 않았다. 셈브리온은 딸뻘인 소녀를 적대하기에는 어른스러웠다. 이런 식으로 밀레나를 맞닥뜨리니 속이 뒤숭숭했다.

“내가 썼다가 튕겨 나간 마법 있잖아.”

“멈추지 않는 뭐시기?”

“바퀴, 이브론. 바퀴. 좀 기억해 줘라. 그 마법에 걸린 여자애야.”

“뭐라고?”

움찔했다. 가슴은 까무러칠 듯이 놀랐다. 사람을 파멸로 이끈다는 마법, ‘멈추지 않는 바퀴’. 처음에 아고르는 이에샤를 노렸다. 브링과 부딪혀 비껴가지 않았더라면 큰일 났을 것이었다. 이에샤 대신 표적이 된 이가 밀레나였다니. 기막힌 일이었다. 자매의 지독한 악연에 감탄마저 나왔다.

아고르가 밀레나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었다. 스르륵 들어 올렸다. 벌꿀 색 금발이 추레한 풍경 가운데에서 기이하리만큼 깨끗했다. 아고르는 밀레나의 머리카락을 장난감처럼 만지작거렸다. 설명을 이어 나갔다.

“처음엔 호기심이랑 심심풀이로 말을 붙여 봤는데, 이게 웬걸. 밀레, 이 고운 얼굴 뒤에 감춘 분노가 어마어마하더라고.”

“분노? 이 아가씨가?”

“분노. 울화. 진절머리. 뭐 그런 것들. 안 어울리지? 가뜩이나 쌓인 게 많았는데 장님이 되고는 배가됐어. 이렇게까지 세상을 저주하는 인간도 찾기 힘들어.”

셈브리온은 거듭하여 놀랐다. ‘눈이 멀었다고?’ 하고 되씹었다. 밀레나 알디온은 영욕에 죽고 사는 족속이었다. 손가락질당하느니 자결을 고를. 몸에 장애를, 본디는 없던 장애를 안고는 견디지 못했을 터였다. 셈브리온은 밀레나의 절망감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세상 모든 것과 신마저 원망하고 몸부림쳤으리라.

“안 그래도 기폭제가 마땅치 않아서 고민이었는데, 덕분에 모든 게 갖춰졌어.”

“기폭제라니. 아고르, 역시 너 관둬. 내란만 종식되면 벨체터는 평화롭게 재기할 수 있다고!”

“하하! 말려도 소용없어, 이브론. 이미 계획은 내 손을 떠났으니까. 델페레타 황궁의 마력은 엉킬 대로 엉켰다. 도화선에 불만 붙이면 돼.”

셈브리온은 입을 악물었다. 답답했다. 헤쳐 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빌버는 이실리아 황후를 죽이고자 했었다. 제국인의 공분을 사기 위해서. 넘실대는 감정을, 마파랑을 일으키는 데 써먹을 셈이었다. 그러나 황후 살해는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차선책으로 에브라힐 궁전에 남았을―딜란 렌디드가 고안하고, 아고르가 완성한―인공 마파랑의 촉매가 떠올랐다. 수도 전체를 뒤집지는 못하더라도 황궁은 가치 있는 희생물이었다. 남은 재료는 하나였다. 기폭제로 삼을 만한 ‘부정적인 감정에 파묻힌 사람’. 찾아 헤매던 차에 우연이 겹치고 겹쳐, 아고르가 밀레나를 손에 넣었다.

델페레타는 대륙의 반이 넘는 땅덩어리를 가졌다. 그만한 영토가 몽땅 휘황할 수는 없었다. 수도와 중부 지방은 눈부셨으나, 동서남북 네 지방은 딴 나라 같이 한갓졌다. 사람과 문화와 물자가 중부로만 몰려들었다. 군사력인 제국 기사단이 국경을 지키지 않고 수도에 머무르는 것만 보아도 훤했다. 에브라힐, 나아가 수도, 중부 지방만 쑥대밭으로 만들면 되었다. 그다음에는 숨죽였던 소국들이 사이좋게 나누어 먹는 일만 남았다.

셈브리온은 눈감을 수 없었다. 델페레타는 이에샤의 나라였다. 이에샤가 중부에서, 수도에서, 황궁에서 힘차게 살아가는 중이었다. 이에샤를 지키려면 빌버가 무너져야 했다. 셈브리온은 스산한 눈초리로 밀레나를 내려다보았다.

‘차라리 아가씨를 없애 버리면…….’

“아, 이브론. 행여라도 우리 소중한 기폭제한테 손쓸 생각은 않는 게 좋아.”

“갑, 자기 무슨 소리야.”

“밀레를 쓸 수 없게 되면 앵지가 대신하겠다고 자원했어. 자기도 한 울분 한다면서. 참 화끈한 여자 아니야?”

인상이 구겨졌다. 힐가와 닮은 여자, 랭기디아는 벨체터가 일어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겠노라 떠들어 댔다. 셈브리온 또한 조국에 애환을 품은 사람이었다. 랭기디아를 저버리기 힘들었다. 동향인과 외국 귀족의 가치를 잰다면, 무거운 쪽은 정해졌다.

아고르가 문가로 향했다. 방을 나가려는 모양이었다. 아고르는 셈브리온에게 계획을 흘리고는 했다. 네가 어찌해도 막을 수 없다고 상기시키는 짓이었다. 셈브리온이 단념하기를 바라는 듯했다. 델페레타에서 뿌리쳤던 일의 앙갚음인지도 몰랐다. 원래도 성격이 좋은 녀석은 아니었다.

“더 구경하려면 하고 나와.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낯바닥이지?”

아고르가 킬킬거리며 떠나갔다.

셈브리온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헝클어졌다. 무거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밀레나의 얼어붙은 얼굴을 힐끗했다. 뜯어보아도 이에샤와는 닮은 구석이 없었다.

“미안, 아가씨.”

결국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말았다.

신년맞이 무도회가 열닷새 앞으로 다가왔다. 이에샤는 드물게, 바쁘게 일했다. 달신교 때문이었다. 성직자 대부분은 평민이었다―귀족이 종교에 귀의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다. 무도회 날 달신교 사제의 안전과 권한을 보장하려면,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했다. 여러 부처에 서류를 보내고 결재받아야만 했다. 엘테르트는 황궁에서 가장 바쁜 사람에 들었다. 이에샤를 도와줄 겨를이 없었다. 이에샤는 미엘라, 네세라와 머리를 맞대고 사무에 파묻혔다.

오늘은 모처럼 일이 적었다. 여유가 났다. 황금 같은 시간을 흘려보내기는 싫었다. 이에샤는 아등바등하며 5분 만에 옷을 갈아입었다. 연무장으로 뛰쳐나갔다. 칼자루를 한 번 쥐어 보기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연무장은―순찰 말고는 일이 없는―스란이 깔끔하게 정돈해 둔 채였다. 스란은 뜻밖에 잡일을 잘했다. 먹고살려고 갖은 일을 전전한 경험이 빛났다.

이에샤는 연무장 가운데에 섰다. 책상에 앉을 때 말고는, 허리에서 떼어 놓지 않는 롱소드를 끌렀다. 희멀건 겨울 햇살이 검신에 내려앉았다. 까만 칼날에서 광채가 반뜩였다. 마음속이 가라앉아 갔다. 검을 들 때와 들지 않을 때는 감각의 날카로움이 달랐다.

허공을 베기 시작했다. 팔을 떨지 않으며, 곧게 뻗은 채 자리만 일자로 밀어냈다. 완벽한 직선이 그어졌다. 가로와 세로를 번갈아들었다. 신묘한 움직임이었다. 십자 모양 궤적을 따라서 브링이 튀어 올랐다.

눈에 보이는 브링의 빛깔은 사람마다 달랐다. 이에샤는 푸르렀고, 글렘은 녹색이었다. 문득 생각했다. 가장 아름다운 색은 빨강이라고. 불꽃처럼 날름거리는 브링을 돌이켜 보았다. 오싹오싹한 살기가 뿜어 나왔었다. 배 속의 장기가 오그라드는 기분마저 느꼈다.

이에샤는 자기도 모르게 셈브리온의 상을 그려 냈다.

기억 속의 셈브리온이 달려들었다.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하게 가르는 검로를 펼쳤다. 이에샤는 허리를 수그려 피하는 자신을 상상했다. 내리치는 공격을 막아 낸다면 바보짓이었다. 이에샤는 아직은 셈브리온의 완력을 쫓아가지 못했다.

‘세비라면, 다음은…….’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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