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0 11. 파국 =========================
분위기가 수그러들었다. 엘테르트의 낯빛이 굳었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엘테르트는 이에샤의 발 치수에 맞추어 만든 부츠를 내려다보았다. 오늘의 선물들을 마련하는 데 큰돈이 들기는 했다. 멘델린 공작가의 금궤는 열지 않았다. 사사롭게 벌어들인 재산으로 족했을 만큼, 이만한 소비는 엘테르트에게 별것 아니었다. 이에샤는 어떨까. 엘테르트는 마차가 들어서지도 못하는 피올라 거리를 떠올렸다. 작년 이맘때 이에샤는 드레스를 살 수 없어, 황태자의 무도회 초청을 거절했었다.
이에샤는 귀족치고 모자라도, 궁핍하지는 않았다. 사치하지 못하는 나날을 슬퍼한 적이 없었다. 셈브리온이 곁에 있기만 해도 만족하며 살아왔다. 엘테르트가 저에게 연민을 품었다고는 상상치 못했다. 진심으로, 어려운 곳에 기부라도 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백화 기사들로 말하자면 지겨워했다. ‘또 시작이네.’ 하고. 본인은 모르는 듯했으나, 이에샤는 자신감이 떨어졌다. 검술 솜씨를 뽐내면서도 ‘검술만 가지고 뭘 해?’ 하고 겁먹고 말았다. 기록상 최연소 브링어에 첫 여자 브링어. 그 비범함을 실감하지 못했다. 황궁 남자들에게 거듭해서 짓눌린 탓일까. 부하이자 동료로서 안타까웠다.
엘테르트의 선물도 그러했다. 제삼자가 보기에, 두 사람의 사이는 이에샤에게 기울대로 기울었다. 엘테르트는 이에샤를 잃을까 봐 두려워했다. 이에샤의 마음이 바뀔세라 전전긍긍했다. 이에샤는 달랐다. 슬프지만 안 되면 말고. 깔끔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엘테르트로서는 이에샤를 사로잡을 수 있다면 성 한 채라도 사다 바쳐야 했다. 이에샤는 도도한 얼굴로 엘테르트의 예물을 굽어살피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사람의 감정을 사는 일이란 그만큼 어려운 법이었다.
침묵을 깬 사람은 엘테르트였다.
“앨저 경은 굉장히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 알아요.”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답답했다. 이에샤의 머릿속에 박힌 사양을 뿌리 뽑고 싶었다. 엘테르트는―멘델린 소공작이라는 지체에 견주면―소탈한 편이었다. 하나 연인은 누릴 수 있는 만큼 누리기를 바랐다. 이에샤가 제 이름으로 어음을 뿌려도 좋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우스웠지만, 참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뼛속에 검소가 새겨졌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내 말은, 부자 애인 두고 아낄 필요가 없다는, 아니, 이게 아니라.”
이에샤가 눈썹을 꿈틀했다. 노여워서는 아니었다. ‘부자 애인’이라는 적나라한 표현이 쑥스러웠다.
“설령 앨저 경한테 사치벽이 있다고 해도 나는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고 할까요. 이 정도로 낭비라고 생각하면 섭섭합니다.”
“당신한테 기대 살기는 싫다고 했잖습니까? 남자한테 이런 비싼 물건들 받는 거, 여자라 쉽게 얻는 거 같아서 자존심 상해요.”
“얘기가 왜 그렇게 됩니까!”
엘테르트가 울컥하여 외쳤다. 이에샤는 움찔 놀랐다. 엘테르트가 목청을 돋우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네세라, 스란, 미엘라는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저 커플에게는 사람을 속 터지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까닭 대부분은 이에샤에게서 비롯했다. 연인은커녕 친구조차 없었던 이에샤는 내성적이면서도 극단적이었다. 혼자서 폭주하는 일이 잦았다. 이번에도 그러했다. 기꺼이 선물을 풀다가, 갑작스럽게 아깝지 않으냐니. 다이아몬드로 연마재를 만든 남자에게 거리낄 것이 있겠는가? 네세라가 팔로 이에샤와 엘테르트 사이를 가르며 끼어들었다.
“아휴, 앨저 경은 공평함에 너무 집착해서 탈이라니까요.”
“페리튼 경.”
이에샤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네세라의 이야기는 많은 때에 옳았다. 하나 지금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공평을 중요하게 여겨서 나쁠 것은 없었으므로.
“들어 주세요, 앨저 경. 멘델린 경하고 또 싸우고 싶으세요?”
“우리가 왜 싸워?”
“금방 앨저 경이 멘델린 경의 호의를 거절했으니까요.”
“거절한 게 아니야. 난 똑같이 갚아 줄 수가 없다는 거지.”
일맥상통하는 소리였다. 자리에 있는 모두가 곤란하게 생각했다.
“사람들이 사귀는데 항상 공평하고 공정하기는 어렵잖아요. 아니, 불가능하죠. 주고받는 사람부터가 똑같지 않은데 주고받는 물건이 어떻게 똑같겠어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이해가 안 돼.”
“멘델린 경의 선물이랑 앨저 경이 멘델린 경께 제공하는 형체 없는 감정이 같은 무게를 지닌다는, 아우! 저도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원.”
네세라는 고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칼 같이 나눌 수는 없다.’ 하는, 간단한 이치를 설명하려니 막막했다. 미엘라에게 눈짓했다. 도와 달라는 뜻을 담아서.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 이야기하는 재주는 미엘라가 뛰어났다. 그때, 스란이 툭 말했다.
“앨저 경, 정확하게 공평한 관계라면 경은 이미 실패했습니다. 저랑 대련하실 때 온 힘을 다하신 적이 있습니까?”
“뜬금없이 뭐야? 내가 전력으로 싸우면 스란 경은 죽어.”
“그겁니다, 그거. 저는 죽을 둥 살 둥 덤비는데 앨저 경은 왼손으로 상대하겠다거나 한 손만 쓰겠다거나 하는 조건을 달기까지 하시죠. 이게 공평합니까?”
“실력이 다른데 똑같이 싸우는 거야말로 불공평……, 아.”
실웃음이 나왔다. 검술로 예를 드니 알아듣는 이에샤가 황당하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했다.
“세상사 비슷비슷합니다. 멘델린 경은 앨저 경하고 가진 게 다르니 서로 쓰는 돈의 수준도 다른 거죠.”
“스, 스란 경. 그런 식의 비교는 좀.”
미엘라가 발을 굴렀다. 스란은 에두르는 법이 없었다. 수준이라느니 씀씀이가 다르다느니, 드러내 놓고 뱉어 버렸다. 듣는 이의 자존심이나 열등감을 건드릴지도 모르는 낱말이었다.
이에샤는 스란의 말꼬리를 잡지 않았다. 인상을 썼다. 고민에 잠겨 들었다. 검술 승부와 인간관계를 대치해 보았다. 한참 만에야, 자신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나하나 갚지 않아도 돼?”
“앨저 경, 옛날에 사무 작업 잘 못하실 때 제가 사소한 부분들 많이 도와드렸죠. 앨저 경은 그걸 전부 갚겠다고 생각하셨나요?”
“그렇지는 않지.”
“마찬가지예요.”
미엘라가 산뜻하게 매듭지었다. 이에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석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받아칠 말이 없었다. 돌이켜 보니, 부하들의 호의는 갚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엘테르트와는 동등해지려고 기를 썼으면서. 어느 쪽이 보편적인지는 뚜렷했다.
지켜보던 엘테르트가 “앨저 경.” 하고 불렀다. 네세라가 사이에서 빠져나갔다. 엘테르트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아왔다. 새로운 꾸러미를 끌렀다. 챙 넓은 모자가 나타났다. 처음으로 실용성을 따지지 않은 잡화였다. 군청색 줄무늬가 들어간 리본이 크라운을 감싸고, 우아하게 늘어졌다. 모자를 조심스럽게 이에샤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이에샤가 눈을 깜빡였다.
“이건 일종의 뇌물입니다.”
“뇌물?”
“이만큼 드릴 테니 날 좀 어여삐 봐 달라는,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한테 바치는 물건이요.”
엘테르트는 모자챙의 양끝을 붙잡았다. 푹 눌러 버렸다. 이에샤의 눈가가 가려졌다. 무슨 짓이에요? 이에샤가 투덜거렸다. 엘테르트는 보기만 해도 아까운 듯이, 엄지손으로 이에샤의 뺨을 쓸었다. 맞닿은 살갗이 달아올랐다. 분홍빛 낯이 귀여웠다.
“여기에 있는 여러분은 스스로 돈을 버는 여성이죠. 하지만 많은 여인이 가장에게 허락을 구하고 재산을 타서 씁니다.”
“갑자기 그 얘기는 또 왜요.”
“반면에 남자들은 자유롭습니다. 그러니까 남자가 여자한테 선물로 성의를 표하는 건 당연하고, 형평에 맞으며, 관습으로 굳어진 구애 방식인 겁니다.”
네세라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흐뭇했다. 연인에게 돈을 아끼는 남자란 소인배에 지나지 않았다. 네세라로서는 남자와 엮이지 않는 편이 으뜸이었지만, 엮인다면 최고의 대접을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여자에게는 정사(情事) 말고도 고달픈 문제가 많았다. 사랑마저 피곤하고 우울하게 할 까닭이 없었다.
이에샤는 제 머리에서 모자를 벗겨 냈다. 잔머리가 부스스하게 일어났다. 뾰족한 눈초리로 엘테르트를 흘겨보았다.
“이건 여름 모자잖아요.”
“다가올 여름에도 나랑 함께해 달라는 뜻입니다. 봄가을용 야유회 드레스도 한 벌 준비했습니다.”
“가을까지 당신이랑 만나라고?”
“예. 그리고 겨울에, 다음 봄에도. 언제까지나.”
엘테르트가 회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차분하게 눌러 주었다. 이에샤는 턱을 긁히는 고양이처럼, 눈을 감은 채 손길을 받아들였다. 미엘라가 황홀한 표정으로 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네세라와 스란은 ‘잘들 논다.’ 하는 뜨뜻미지근한 눈빛을 띠었다.
시선을 느끼고 엘테르트가 멈칫했다. 머쓱하게 웃었다. 이에샤와 있을 때는, 이에샤에게 집중하느라 주변을 잊고는 했다. 부끄러우면서도 즐거운 일이었다. 백화 기사들을 휘 둘러보았다.
“사실은 여러분한테도 작게나마 준비한 물건이 있는데.”
“저희한테요?”
“백화 기사단은 작년에 태어난 부처니까, 한 해를 무사히 났다는 축하의 의미로 말입니다.”
선물을 옮길 때, 마지막으로 들어온 상자 세 개를 곁눈질했다. 자그마한 벨벳 케이스들이었다. 백화 기사단 모두가 호기심을 품었다. 이에샤의 반지나 귀걸이 따위일 줄 알았으므로. 엘테르트가 케이스 하나를 집었다. 미엘라에게 건네주었다. 미엘라가 엘트르트의 눈치를 살폈다. 엘테르트는 풀어 보아도 좋다는 뜻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든 물건은 브로치였다. 금테두리 가운데에 루비를 끼워 만든 라운드 실드, 그와 엇갈리는 검 한 자루. 손잡이에는 긴 끈이 매여 휘날리는 모양으로 세공되었다. 글귀 무늬도 붙었다. ‘A hundred flowers’라는 글자가 필기체로 이루어졌다. 백화 기사단 정복에 달면 훈장처럼 어울릴 성싶었다.
“이건 우리 기사단 정식 표식이 아니네요?”
“앨저 경이 무시당하는 기분이라고 했던 게 떠올라서, 기사다운 느낌으로 디자인해 봤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진짜 멋있어요. 감사합니다, 남작님!”
미엘라는 신이 나서 코트에 브로치를 꿰었다. 네세라와 스란도 만족스러워했다. 자기들 몫의 케이스를 갈무리했다. 이에샤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다스렸다. 엘테르트의 팔을 잡았다.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곁에 선 미청년이 제 연인이라는 사실에 뿌듯해졌다.
“브로치, 제 것도 있겠죠?”
“물론입니다.”
스치듯이 했던 이야기를 기억해 주어서 기뻤다. 엘테르트가 만들어 온 브로치는 백화 기사단의 표지―꽃송이 위로 솟아난 단검―보다 훨씬 멋들어졌다. 이에샤는 해처럼 웃었다. 엘테르트의 마음이 부시도록 환한 미소였다.
“고마워요. 제일 마음에 들어요.”
엘테르트는 휘어진 입술에 키스하고 싶다는 충동을 눌러 참았다. 구경꾼이 있어서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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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파트는 이제 그만...
다음 편에는 오랜만에 셈브리온 쪽 얘기가 나오겠네요.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