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8 11. 파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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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샤는 탁상에 팔꿈치를 붙였다. 손바닥으로 턱을 괴었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겨울에는 강수량이 줄어들었다. 눈은 잦았지만, 비는 보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따뜻한 날에 눈이 내리다가 녹기는 했다. 석곡궁의 우비 결계는 진눈깨비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섬세하기 그지없었다. 오늘도 하늘이 맑았다. 바깥 창틀에서 간밤에 내린 눈이 녹아, 고드름으로 얼었다. 햇살을 받고 반짝이는 얼음이 깨끗했다. 잔잔하게 보내고 싶은 날씨였다.
“앨저 경, 듣고 계십니까? 앨저 경! 애애앨저어어 겨어엉!”
“……들었어. 내 귀 안 먹었어.”
이에샤의 맞은편에는 잔잔함과는 동떨어진 남자가 앉았다. 마르셀은 시더가 접시 가득 내온 쿠키를 5분 만에 먹어 치웠다. 대화할 때는 시작하고 끝나기까지, 시간을 맞추어서 간식이 떨어져야 했다―차는 몇 잔을 비워도 괜찮았다. 그것이 예절이었다. 황실 마법사 마르셀 오티스는 예의가 없었다. 산만한 어린애처럼 구는데도 밉살스럽지 않다는 점이 대단하기는 했다. 대신에 성가셨다.
“듣고 계셨다고요? 정말입니까? 그럼 제가 뭐라고 얘기했는지 읊어 보십쇼!”
“마력 오염은 변이한 자연 마력이 인체에 침투하는 현상이라며.”
“쳇. 특히 부정적인 감정으로 흥분한 사람이 변을 당하기 쉽습니다.”
‘지금 혀 찼지?’
마르셀은 이에샤가 설명을 놓치지 않아, 아쉬운 모양이었다. 대답하지 못했다면 꼬투리를 잡아서 놀렸으리라. 마르셀의 머릿속에서는―현실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장난질이 심했다. 이에샤의 성질을 긁는 짓도 즐겼다. 이에샤가 가만두는 까닭은, 마르셀의 행동이 호의에서 비롯하기 때문이었다. 여동생을 못살게 구는 오라비와 비슷했다. 이에샤로서는 영문을 몰랐다.
“마력이랑 브링은 상극이라 브링어는 마력에 오염당하지 않는다, 라는 게 정설이잖습니까? 아무래도 모드리스 경의 사례는 죽은 렌디드 자작이 원인 같습니다. 정확히는 그가 숨겨 둔 촉매들이.”
“그놈이 그렇게 대단한 마법사였어?”
“자작의 마법이 고매해서라기보다는, 변이한 게 자연 마력이 아니라 인공 마력일 때 브링어한테 통한다고 봐야 합니다. 확실한 증명과 대책을 위해서는 기사단장들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마르셀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마법은 브링어에게 듣지 않지만, ‘인공 마파랑’을 일으키고자 변이시킨 마력은 브링어의 몸도 파고들 만큼 강력하다는 것이었다. 에브라힐에서 벌어질 마파랑은 예년보다 무시무시할지도 몰랐다.
“죽어서까지 번거롭네. 딜란 렌디드.”
“렌디드 자작은 저희 마법부에서 스카우트할 정도로 괜찮은 마법사였습니다만 이상하군요. 인공 마파랑의 촉매는 스승님이 놀라실 만치 정교했거든요. 렌디드 자작의 작품이라기엔 좀.”
“좀?”
“끝내줬다 이거죠. 저도 스승님이 분석하시는 걸 도왔는데 말입니다, 식을 어찌나 예술적으로 짰던지. 솔직히 스승님은 늙으셔서 세련미가 부족하신데 그 마법 무진장 완벽하더라고요. 뭐랄까, 마치 도회지의 콧대는 높지만 가슴속에 정열적인 사랑에 대한 낭만을 간직한 아가씨처럼…….”
“알았어. 그만하자.”
이에샤는 손사래를 쳤다. 마르셀의 수다는 듣기만 해도 진이 빠졌다. 곁에 두어야 하는 엘먼이 불쌍했다. 여자가 셋이면 나무 접시가 들논다고 하지만, 마르셀은 혼자서 도자기 접시도 흔들 수 있는 놈이었다. 이에샤가 여기기에 떠버리에는 남자가 많았다. 루시온과 엘테르트도 설명을 늘어놓는 편이었다. 오스터는 점심때 손님이 오면, 밤이 깊도록 떠들어 댔다. 이에샤는 속담의 부조리를 느끼며, 찻잔을 들었다. 한 모금 홀짝였다.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지? 위험한 실험 같은 건 아니겠지.”
“어이쿠! 저희를 뭐로 보시고요. 세간에 알려진 음험한 마법사 이미지, 그거 다 동화랑 소설이 만들어 낸 뻥입니다 뻥. 물론 공부만 들입다 파느라 음침한 놈들이 많긴 해도 공붓벌레가 아닌 타입도 얼마든지…….”
“제발! 오티스 경.”
참을성이 바닥났다. 곤혹스러웠다. 백화 기사단에는 일이 많지 않았으나, 마법부는 다를 것이었다. 새로운 해를 계획하느라 눈코 뜰 사이 없을 텐데 마르셀은 돌아갈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속에 든 말을 뒤집어 털지 않으면 죽을 사람처럼 떠벌대기만 했다. 이에샤는 불안했다. 저 때문에 마법부 업무가 밀렸다고 트집이라도 잡힐까 봐. 그간의 졸렬한 일들을 돌이키면 가능성 있었다.
마르셀은 좋은 사람이었다. 이에샤에게도, 백화 평기사에게도 예를 지켰다―대화 예절은 엉망이었지만. 남녀를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또라이로 굴었다. 백화 기사의 일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남자는 드물었다. 그러한 면에서 마르셀은 “모든 황궁 여인을 지킨다니, 평화 시대에 나라 지킨다는 제국 기사단보다 고된 일을 하십니다!” 하고 말할 만큼 괜찮은 남자였다.
입만 꿰매면 나무랄 데 없을 터였다.
“우리 본론만 간단하게 말하자. 바쁘지 않아?”
“저 하나쯤 농땡이 피우더라도 유능한 동료들이 수습해 줄 겁니다!”
“그런 무책임한 소리 하지 마. 난 자기 해야 할 일 내던지는 사람 질색이니까.”
“이런, 그건 곤란한데.”
마르셀이 등허리를 폈다.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에샤를 곧게 쳐다보았다. 진심으로 이에샤에게 미움받기 두려워하는 모양새였다. 이에샤는 당황했다. 주의를 시키고 시켜도 그치지 않던 수다가, “네가 싫다.” 한마디에 잦아들 줄이야. 마르셀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말 잘 듣겠으니 화내지 말라고 아양 떠는 꼬마처럼.
“스승님께서 렌디드 자작의 촉매를 분석해 비슷한 틀의 회복 마법식을 세우셨습니다. 그걸 기사단장들에게 써 보고 효과가 나타나는지 지켜볼 겁니다.”
“회복 마법? 관찰하기 어려울 거 같은데. 피로 회복 같은 건 추상적이고, 일부러 상처를 내기도 찜찜하고.”
“걱정 마십시오. 딱 알맞은 마법이 있으니까요. 앨저 경한테는 특히 이로울지도 모르겠군요.”
마르셀이 씩 웃었다. 이에샤는 어리둥절했다. 효과가 눈에 보이고, 저에게 좋을 마법이라니. 헤아리기 어려웠다. 마르셀이 과장스럽게 팔을 벌렸다.
“모근 튼튼! 대머리 안녕! 발모 마법입니다. 일반인한테는 이미 효과를 보았습니다. 스승님은 연구비와 예산을 뻥튀기해 줄 혁신적인 패러다임이라고 자신하셨죠!”
팔아먹기 좋은 마법이라는 뜻이었다.
이에샤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르셀의 생각과는 다르게, 달갑지 않았다. 셈브리온이 떠난 뒤로 머리카락을 추스르기가 까다로웠다. 빠르게 자란다면 곤란했다. 제 손으로는 셈브리온처럼 다듬지 못했다. 이발사의 솜씨도 마음에 차지 않았다. 여자 손님은 흔하지 않았을 테니 당연했다.
“머리가 길어지는 건 좀. 내키지 않는데.”
“아니 왜요? 분명 예쁘실 텐데요.”
“난 짧은 편이 예뻐.”
이에샤는 떳떳하게 말했다. 천하의 마르셀도 말을 잊어버렸다. 드러내 놓고 자기 용모를 칭찬하는 여자 귀족은 드물었다. 친구나 하녀에게 던지는 우스갯소리라면 모를까.
“으음. 전 분명 앨저 경이 기뻐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경이 왜 시무룩해져? 내가 머리를 기르고 싶었으면 번거롭게 때마다 자를 이유가 없잖아. 내버려 두지.”
“하지만 긴 머리 앨저 경도 보고 싶습니다!”
이번에는 이에샤 쪽이 대꾸가 궁색해졌다. 마르셀은 참말로 예의가 없었다. 연인이 있는 여자에게 스스럼없이 추파를 보내다니. 이에샤가 지적하려고 했을 때였다. 마르셀이 한발 앞서서 말했다.
“앨저 경은 돌아가신 저희 어머니랑 참 많이 닮으셨습니다. 머리카락 길이만 빼면 말입니다, 하하.”
“뭐?”
“작위 때문일까요? 어머니도 오티스 여백작이셨거든요.”
이에샤는 마르셀에게, 저에게 호감이 있냐고 묻지 않은 일을 천만다행으로 여겼다. 마르셀이 친밀하게 구는 까닭은 ‘어머니’인 모양이었다. 섣부르게 꼬집었다면 설레발이 따로 없었다. 처음으로 마르셀의 멈추지 않는 주둥이에 감사했다.
마르셀이 오련한 눈빛을 띠었다. 어머니를 떠올리는 듯싶었다.
“아버지를 데릴사위로 들이긴 했지만 작위는 양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티스 백작으로 사시다가 오티스 백작으로 눈감으셨죠. 제가 너무 어려서 아버지가 작위를 이어받으셨고요.”
“그래? 독특한 분이셨네.”
“앨저 경처럼 당차고, 왕성하게 일하시던 모습만이 기억납니다. 아버지는 꼭두각시처럼 어머니가 시키시는 대로 접대나 하고 술이나 마시고 수다나 떨고 그러셨고요. 하하하!”
“……오티스 경, 혹시 부친이랑 사이가 안 좋아?”
“그럴 리가요.”
마르셀은 발랄하게 부정했다. 사실을 말했을 따름이었다. 죽은 오티스 백작은 거래자와 만나는 일만 남편에게 맡기고 실질적인 사업을 쥐락펴락했었다. 이에샤는 몰랐지만, 그러한 일은 드물지 않았다. 사업 감각이 형편없는 남편을 아내가 이리 구슬리고, 저리 구슬려서 재산을 지키는 식이었다. 마르셀의 어머니는 직접 가장 노릇을 했던 점이 유별할 뿐이었다.
“아무튼, 그러다 보니 앨저 경을 보면 전 어머니가 살아 돌아오신 것처럼 가슴이 벅차올라서!”
‘기분 미묘해.’
“어머니처럼 머리를 틀어 올리신 모습도 보고 싶습니다!”
“그렇구나. 싫어.”
이에샤는 깔끔하게 물리쳤다. 마르셀이 철퍼덕 탁상에 엎어졌다. 익살맞은 몸짓이었다. 간절하게 바랐던 것은 아니리라. 이에샤는 피식 웃었다.
“실험에는 협조할 거야. 하지만 끝나자마자 잘라 버릴 테니까 헛꿈 꾸지 마.”
“보여 주시면 닳습니까?”
“닳아.”
마르셀이 입술을 삐죽삐죽했다.
달카닥. 문이 열렸다. 마르셀은 흠칫했으나 이에샤는 놀라지 않았다. 익숙한 남자가 우아하게 걸어 들어왔다. 엘테르트의 금발은 상아색에 가깝게 빛깔이 엷었다. 해말간 겨울 하늘과 어울렸다.
“오티스 경이 아직 있었군. 일찌감치 얘기 끝났을 줄 알았는데.”
“이야, 멘델린 경! 오늘도 신수가 훤하십니다! 앨저 경께 전할 말은 다 전했습니다만 사람이 어떻게 용건만 딱딱 주고받고 살겠습니까? 좀 사사로운 얘기도 하고 그래야 숨통이 트이죠.”
“사사로운?”
엘테르트가 고개를 기웃했다. 이에샤는 이마를 짚었다. 마르셀은 에브라힐을 총괄하는 엘테르트에게, 대놓고 땡땡이를 쳤노라 털어놓은 셈이었다. 순진한 걸까 멍청한 걸까. 고민하다가 결론지었다. 맛이 간 것이었다. 엘테르트가 알 만하다는 낯으로 이에샤를 보았다. 눈길에 연민이 스몄다. 이에샤는 ‘좀 쫓아내 줘요.’ 하는 눈짓으로 답했다.
엘테르트는 웃음기를 가무렸다. 도움을 구하는 이에샤라니.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마르셀에게 어지간히도 시달린 모양이었다. 마르셀은 현자 엘먼의 수제자였다. 마법부를 이끌어 갈 재목이었으므로, 엘테르트도 파악해 두었다. 무지갯빛 정신머리에 관해서도 알았다.
“휴식도 중요하지만 오티스 경, 그대 스승의 건강도 중하지 않겠나? 연로하셨으니 너무 속을 썩이지 말게.”
“으으음. 며칠 전에 제가 보고서로 장미를 접어 드렸더니 얼굴이 시뻘게지셔서 2초쯤 숨을 못 쉬기는 하셨습니다.”
“연초에 황실 마법장을 바꿀 일이 생기면 곤란해. 총무부와 인사국에서 과로사하는 사람이 속출할 테니.”
뚜렷한 축객이었다. 에두르려는 티조차 없었다. 마르셀이라도 멘델린 소공작에게 개기기는 껄끄러운지, 입맛을 다셨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샤에게 깍듯한 인사를 건넸다. 촐랑촐랑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이에샤는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엘테르트가 쓴웃음을 흘렸다. 마르셀이 비킨 의자에 앉았다. 부드러운 눈빛이 이에샤의 얼굴을 간질였다.
“저래 봬도 유능한 사람입니다.”
“무능하면 야단칠 수라도 있죠.”
“하하.”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이에샤가 그리워한. 달아오른 뺨을 감추고자,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찻물은 한 방울도 남지 않은 채였다. 머쓱하게 내려놓았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이 시기에 그냥 오셨을 리는 없고.”
“예. 백화 기사단에 전할 말이 있습니다. 마땅히 보낼 인력이 없다 보니 직접 왔습니다.”
“작년 생각 나네요.”
백화 기사단이 첫발을 디딘 무렵도 연초였다. 황궁이 어지러울 시기. 모든 부처를 돌보는 엘테르트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두 사람 모두, 앙숙처럼 으르렁대기만 했었다. 달콤한 사이가 되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갚회가 깊었다.
엘테르트가 “흠.” 하고 헛기침했다. 볼일을 꺼내겠다는 신호였다. 이에샤도 자세를 조금 고쳤다. 귀를 기울였다.
“달신교에서 이번 신년맞이 무도회 경비로 사제들을 보내 주겠다는 답신이 도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