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5 11. 파국 =========================
어째서 사람을 사귀어야만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좋아하는 이들과 둘러앉으면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웃음보가 터져 나왔다. 높고 또랑또랑한 소리가 듣는 귀마저 시원하게 했다. 네세라가 윗몸을 숙였다.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댔다. 손바닥으로 턱을 괴었다. 술기운이 깃든 눈으로 이에샤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웃으시니 보기 좋아요. 올해에는 오늘처럼 크게 웃을 일이 많아야 할 텐데.”
“내가 평소에 안 웃었던가?”
“소리까지 내시는 일은 드물었죠.”
스란이 말끝을 달았다. 이에샤는 미엘라와 시더가 만든 카나페를 집었다. 반쯤 베어 먹었다. 얹은 재료는 토마토와 치즈뿐이었다. 간단한 만큼, 무던하게 맛있었다. 크래커 부스러기 몇 조각이 떨어졌다.
생각에 잠겼다. 부하들의 말대로 크게, 활짝 웃은 적이 드물었던 것도 같았다. 그동안 깨닫지 못했다. 셈브리온 앞에서는 기쁨을 억누르지 않았으므로. 혼자가 되고는 지금처럼 희색을 비친 일이 손에 꼽았다. 이에샤의 입술이 벌어졌다. 말소리 대신 가락이 흘러나왔다. 백화 기사들은 놀랐지만, 잠자코 들었다. 술과 흥에 취한 사람의 노래는 예삿일이었다.
속삭이듯이 노랫말이 이어졌다. 제국어가 아니었다. 모음의 쓰임이 단조롭고, 한 마디에 여러 음절이 빠르게 지나갔다. 이에샤의 목소리는 고운 편이었다. 도자기 종처럼 투명하게 울리는 음색이 매력적이었다. 기교라고는 없이 목으로만 흥얼거리는데도 듣기 좋았다.
노래는 길지 않았다. 이에샤가 입을 다물었다. 안락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표정이 느른했다.
“오늘 많이 즐거워서.”
“벨체터 민요죠? 가사만 책에서 보고 멜로디는 처음 들었어요. 앨저 경은 어떻게 아신 거예요?”
“어릴 때 스승님이 자장가로 불러 줬거든.”
셈브리온과 예술은 개미핥기와 하프물범만큼이나 동떨어졌다. 하지만 어머니를 여의고, 밤잠도 없이 우는 어린애를 달래려면 음률이 필요했다. 셈브리온은 힐가가 부르던 노래를 서투르게 흉내 냈었다.
이에샤가 늘어지라 하품했다. 눈초리에 배어난 눈물을 훔쳤다. 등받이를 씌운 벨벳에 비비적댔다. 미엘라가 스란에게 소곤거렸다.
“저보다 앨저 경이 취한 거 같은데요.”
“이상하군. 이렇게 빨리 취하는 사람이 아닐 텐데.”
“분위기에 휩쓸렸나 보죠……, 어라?”
네세라가 황당한 낯빛을 지었다. 탁자에 놓인 와인병을 집어, 빈 잔을 채우려던 참이었다. 병 주둥이를 기울였으나 호박색 포도주는 흐르지 않았다. 물방울만 서넛 떨어져 내렸다. 휴게실이 조용해졌다.
“앨저 경, 우리 수다 떠는 새에 그걸 다 마신 거예요?”
“이거 13도는 될 텐데.”
백화 기사들의 눈길이 이에샤에게 쏠렸다. 이에샤는 고른 숨을 쉬며 잠든 채였다. 들뜨기는 들뜬 모양이었다. 시더가 휴게실에 갖추어진 숄을 집어 왔다. 이에샤의 몸에 덮어 주었다.
조금 뒤, 스란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이제 술은 없는 건가?”
“작작 마셔요. 술고래.”
미엘라가 질린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 * *
델피르력 754년 1월 4일.
이에샤는 제국 기사단과 총무부의 경위서를 호랑가시궁으로 가져갔다. 이러한 건은 총무부를 통해서 황실 내무 법정으로 넘겨야 했다. 하나 총무부 전체가 피고이니만큼, 황태자가 굽어보게 되었다. 눈코 뜰 새 없는 때에 일을 얹어 주려니 송구스러웠다. 어영부영 넘어가기는 싫었다. 루시온은 기미가 낀 얼굴로 고발장을 건네받았다. 경위서―라고 부르기 민망한 것―들도 읽어 보았다. 감상은 딱 한 마디였다. 개새끼들. ‘바빠 죽겠는데 일거리를 만들어?’ 하는 뜻이 담긴 욕설에, 이에샤는 쾌재를 불렀다. 루시온이 내리는 처벌은 가볍지 않으리라.
오전 수련을 걸렀다. 오후에 보아야 할 서류들을 당겨서 결재했다. 미엘라와 네세라에게 빈틈없다는 확답도 받았다. 이에샤도 사무가 몰라보게 늘었다. 점심을 먹고, 퇴궐하기로 했다. 오늘은 밀레나를 찾아가기로 한 날이었다. 석곡궁을 나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에샤는 궐문 밖 역마차 정거장으로 가지 않았다. 에브라힐의 마차 대기소로 향했다.
알디온 후작가의 마차는 멘델린만큼은 아니어도 고급스러웠다. 지붕이 반원형으로 파인 군청색 차체에 물결무늬 은장식을 둘렀다. 아비가 같은 말 두 필이 매였다. 시내에서 육두마차를 타고 다니는 멘델린은 보통이 아니었다. 알디온 같은 집안에서도 쌍두, 많아야 삼두를 부렸다. 이에샤는 엉뚱한 알디온으로부터 멘델린의 위용을 느끼며, 마차에 올라탔다.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제가 알디온 후작 영애였던 일곱 살 뒤로 처음 타 보는 마차였다. 군식구로 얹혀사는 동안은 얼씬도 하지 못했다. 걷거나 역마차를 써야만 했다. 성년이 되어, 아버지와 연결 고리가 끊어지고서야 들어앉다니.
마부가 “이럇!” 하고 말을 몰았다. 차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스터와 셀더리가 마차를 보내 주었을 리는 없었다. 밀레나의 배려일 터였다. 늘 그러했다. 밀레나는 비치는 모양새만은 어연번듯하고자 했다. 허울 좋은 마음씨를 자랑했다. 보지 못하는 곳에서는 어려운 사람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이에샤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마차는 한 시간 남짓 달렸다.
“도착했습니다, 앨저 백작님.”
바깥에서 문이 열렸다. 마부는 이에샤를 아가씨라고 부르지 않았다. 주의를 들은 모양이었다. 이제야 똑바로 구는군. 이에샤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마부가 발판을 놓기도 전에 뛰어내렸다. 낯익은 정원이 펼쳐졌다. 알디온 후작저는 오랜만에 보았는데도, 어제 본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 새겨지기라도 한 양. 기분이 더러웠다.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마중하는 하녀조차 없었다. 고요가 저택을 휘감았다. 이에샤는 현관으로 다가갔다. 문고리를 쥐었다. 힘주어 당겼다. 현관문은 잠기지 않은 채였다.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로비가 휑뎅그렁했다. 빈집에라도 들어온 것 같았다. 하나 이에샤의 감각에는 인기척들이 잡혔다. 사용인들을 숙소에서 나오지 못하게 한 성싶었다.
밀레나의 방은 3층이었다. 저택에서 볕이 가장 잘 드는 곳에 자리했다. 이에샤는 성큼성큼 걸었다. 중앙 계단을 올랐다. 복도를 나아갈수록 들이치는 햇살이 따뜻해졌다. 목적지가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이에샤의 다리가 멈추었다. 방문 앞에 선 오스터가 고개를 돌렸다. 이에샤가 빼다 박은, 짙푸른 눈이 희번덕거렸다. 며칠 밤을 새운 모양새였다.
“왔느냐.”
“별로 오고 싶지 않았지만.”
“되바라진 년.”
익숙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에샤는 어깨만 으쓱했다. 오스터는 꽥꽥 소리나 질러 대지, 저를 해코지할 수는 없었다. 딸을 힘으로 이기지 못하는 아버지란 시시껄렁했다.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문을 열려고 했다. 오스터가 팔을 뻗었다. 이에샤의 손목을 낚아챘다. 이에샤는 반사적으로 뿌리쳤다. 오스터의 몸이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당신이 감히 어딜 잡아.”
“밀레는, 내 딸은 마력에 중독될 건더기가 없었다.”
“……그래서 치료하지 않았어? 목숨보다 사랑하는 딸이라면서?”
“마법사 여덟을 불렀지만 하나같이 자기 힘으로는 못 고친다고 했어! 그래서 포기하고 좋은 혼처라도 찾아 주려 했는데, 이렇게 빨리!”
눈살을 찌푸렸다.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치료하려고 했으나 헛일이었다니. 뜻밖이기는 해도, 제 알 바가 아니었다.
“황실 마법사라도 불렀어야지.”
“안 불렀을 거 같으냐?”
입을 다물었다. 말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우스웠다. 이에샤나 밀레나나 오스터의 친딸이었다. 생김새는 이에샤 쪽이 피붙이다웠다. 오스터는 두 살배기 이에샤가 열병에 걸렸을 때, 에이릴리를 밀치고 임신한 셀더리에게 갔었다. 지금의 모습은 무엇인가. 절망에 찬 낯빛이 가증스러웠다. 이에샤는 피식 웃었다.
“그러게. 불렀을 거란 생각을 내가 못 했네.”
화풀이를 받아 줄 셈은 없었다. 밀레나의 방문을 밀었다. 안쪽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손을 놓았다. 문짝이 스르륵 돌아가 닫혔다. 사방이 컴컴했다. 커튼이 유리창을 뒤덮은 채였다. 이에샤는 어둠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밀레나에게로 다가갔다. 침대에 오도카니 앉은 밀레나가 이에샤 쪽을 돌아보았다.
눈동자가 또랑또랑했다. 기능을 잃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리만치. 값진 아쿠아마린도 밀레나의 눈 앞에서는 초라해질 것 같았다. 밀레나는 조금 누레진 얼굴빛 말고는 이전처럼 아름다웠다.
“누구 왔어요?”
“…….”
“어머니? 아니면 아버지세요?”
“나야.”
밀레나의 입에서 헉하고 놀란 소리가 새었다. 이에샤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밀레나에게는 응접실과 파우더룸, 휴게실까지 따로 있었다. 침실에는 의자를 두지 않았다. 별수 없었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양털과 솜을 채운 매트리스가 출렁였다. 밀레나는 움찔 놀랐다.
“하고 싶은 말 있댔지? 빨리 해. 오래 있기 싫으니까.”
“이에샤 언니.”
입매를 휘려 했다. 눈이 멀었을 뿐인데, 얼굴 근육까지 망가진 양 웃기 힘겨웠다. 이에샤는 어설프게 비뚤어진 이목구비를 보았다. 즐겁지는 않았다. 동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옛날과는 다르구나.’ 하는 감상만 떠올랐다. 부모가 평생 금이야 옥이야 보살펴 주지 않겠는가. 밀레나 알디온은 저와 달랐다.
밀레나는 미소 짓기를 포기했다. 양팔을 들어 올렸다. 더듬더듬 움직였다. 이에샤를 찾는 몸짓이었다. 이에샤는 일부러 기척을 죽였다. 밀레나의 손끝이 스치기라도 하면 찝찝할 터였다. 밀레나는 시무룩하게 손을 거두어들였다.
“저기, 엘테르트 님은 나에 대해 아무 말씀도 안 하셔?”
“너 귀찮았다더라.”
엘테르트는 “일이 바쁘다고 둘러대도 찾아와서 난처했습니다. 그렇지만 알디온 영애에게 일어난 일은 참으로 유감입니다.” 하고 이야기했다. 이에샤는 골자만 전달했다. 밀레나가 쿡쿡, 소리 내서 웃었다. 이에샤는 미친 사람 보듯이 밀레나를 쳐다보았다.
“뭐가 웃겨?”
“그냥. 언니한테는 진심을 털어놓는구나 싶어서. 나한테는 번드르르한 말밖에 안 해 주시거든.”
“그건 너도 잘하는 짓 아니야?”
자제가 되지 않았다. 뾰족한 말들이 튀어나왔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하면서도 참기 어려웠다. 해묵은 미움은 비극 앞에서도 무뎌지지 않았다. 밀레나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리하면 앞이 보이기라도 할 것처럼. 후천적으로 맹인이 된 사람의 덧없는 버릇이었다.
“언니 말이 맞아. 나도 남한테 번드르르한 말밖에 안 하지. 화내지 마, 내까짓 게 엘테르트 님이랑 똑같다는 얘기 아니니까.”
“그런 생각 한 적도 없어.”
“하지만 언니 지금 화났잖아.”
이에샤는 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불편했다. 자신은 밀레나가 어찌 되었는지 궁금했을 따름이었다. 밀레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어두운 방에서 해사하게 빛나는 얼굴이 거북살스러웠다.
“난 널 보면 그냥, 언제나 화가 나.”
“…….”
“내 인생에서 알디온이라는 이름을 좀 지워 버리고 싶은데 가만히 놔 두지를 않는구나.”
한숨이 밀레나의 입술을 비집었다.
밀레나는 멍청하지 않았다. 둔치도 아니었다. 자기 행동이 이에샤에게 어떻게 돌아갈지 알았다. 이에샤를 몰아붙이기란 쉬웠다. 뒷공론할 필요조차 없었다. 밀레나는 인덕을 쌓고자 애썼고, 이에샤는 사람들을 쳐 내기만 했다. 밀레나와 마주치기만 해도 쌍심지를 켜던 이에샤는 자연스럽게 고립되었다. 밀레나가 한 일이라고는 어여쁘고 나긋나긋하게 군 것뿐이었다. 그리하다 보면 이에샤가 고집을 꺾으리라 여겼다. 저처럼 숙녀의 몸가짐을 익혔으면 했다.
오래전의 밀레나는 이복언니를 좋아했다. 장래를 염려해 주었다. 어울려 살아가기를 바랐다. 그 마음이 이에샤의 목을 졸랐더라도, 진심이었다.
“있잖아, 이에샤 언니. 언젠가부터 내가 내가 아닌 것만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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