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수는 검 한 자루-133화 (133/164)

00133 11. 파국 =========================

(연참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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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 기사단이 첫발을 떼고 정확히 1년째였다. 새로운 해가 열렸다. 새벽부터 눈이 내렸다. 이에샤가 잠에서 깨어나 창문을 열자, 진눈깨비가 뚝뚝 떨어지는 중이었다. 우중충한 하늘빛이 허물어져 쏟아질 것처럼 무거웠다. 이에샤는 제 삶에서 가장 바빴던 해가 끝났음을 깨닫지도 못했다. 마네킹에서 정복 코트를 걷어 냈다. 앞섶을 여몄다. 단추를 채우는 손길이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머릿속에서 네세라의 말소리가 흘렀다. 물에 잠긴 양 먹먹하게 뭉그러지며.

「마력 중독의 초기 증세가 시력 감퇴래요. 극도로 쇠약해진 몸에 계속 심한 자극을 가해서 의사가 도착했을 땐 굉장히 위험한 상태였다고 해요. 만약 영애가 잘못됐다면 앨저 경 기분은 어떠셨을 거 같아요?」

고소하리라 생각했다. 즐겁게 비웃어 줄 자신이 있었다. 제가 힘들었던 만큼 밀레나도 괴롭기를 바랐다. 악의에 부끄러움이나 죄책감은 없었다. 원수를 용서하지도, 갚지도 않고 데면데면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적어도 이에샤는 아니었다.

그리고 정말로 밀레나의 세상이 어둠에 잠겼다.

‘사교계를 쥐락펴락하던 밀레나 알디온이 맹인이 되었다’. 소문은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허둥지둥 달려온 네세라가 의료진에게 입단속을 시켰건만, 걷잡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더 오를 곳이 없으리만큼 인기를 누리던 귀공녀가 곤두박질쳤다는 이야기에 열광했다. 드러내 놓고 흥미를 보이지야 않았다. 모두가 밀레나의 불행을 안타까이 여기는 체했고, 뒤돌아서 쏙닥거렸다. 알디온 후작가는 며칠째 대문을 걸어 잠갔다.

이에샤는 기뻐할 수 없었다.

“……찝찝해…….”

그날 밀레나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하녀 여럿이 사지를 붙들고 침대에 묶어야만 했다. 이에샤는 이것 풀라고, 죽을 거라고 날뛰는 밀레나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눈부신 레이디는 온데간데없었다. 산발한 채 목이 터지라 악쓰는, 앞 못 보는 여자가 남았을 따름이었다. 반가움도 달가움도 들지 않았다. 이에샤의 머릿속을 메웠던 생각은 ‘왜 이런 일이 생겼지?’였다.

밀레나는 마취제를 들이마시고 휘늘어져, 집으로 보내졌다. 그다음 어떻게 되었는지는 몰랐다. 찾아가 볼까. 내가 뭣하러. 상태가 궁금하니까. 알 바 아니잖아. 이에샤 안에서 여러 가지 마음이 부딪쳤다.

‘아침 먹어야 하는데.’

알리사의 출근이 늦었다. 길이 미끄러울 터였다. 걷든지 마차를 타든지 힘들 날씨였다. 어제 야식을 먹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부엌으로 들어갔다. 조리대에 바구니가 놓였다. 삼실로 짠 보를 걷었다. 동그란 밀빵 사이를 으깬 감자, 미트 소스로 채운 요리가 담겼다. 내키지 않는 손길로 집어 들었다. 입안에 욱여넣었다. 목구멍이 깔깔했다. 놀랍게도, 요즈음 이에샤는 입맛이 없었다. 싱숭생숭하여 식욕이 돋지 않았다.

공책―셈브리온의 가계부―을 찾았다. 한 장 부욱 찢었다. 알리사에게 보내는 글귀를 적었다. 오늘은 장을 보지 말고 청소만 해 놓으라는 내용이었다. 현관문 앞 계단의 아래쪽 화단, 깨진 벽돌을 들추면 열쇠가 나왔다. 셈브리온이 쓰던 것이었다. 집이 비었을 때 알리사가 사용하도록 일러 두었다. 알리사가 늦는 듯이, 이에샤의 출근은 당겨졌다. 마차 속도가 굼뜰 터였다. 한 시간 빠른 역마차를 타기로 했다.

코트 위에 비옷을 둘렀다. 엘테르트에게 받은 지우산도 꺼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매사가 귀찮았다. 힘이 나지 않았다. 날짜를 셈해 보았다. 달거리 때가 가까웠다. 터덜터덜 집을 나섰다.

“우산은 왜 안 가지고 나옵니까?”

“……어?”

“너무 반가워서 말을 잊기라도 했나요.”

고아한 낯에 웃음이 번졌다. 엘테르트가 돌계단을 디뎠다. 두 칸 위에 선 이에샤를 바라보았다. 양팔을 뻗었다. 이에샤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자기 쪽으로 이끌었다. 이에샤는 얼떨결에, 엘테르트의 품에 안겼다.

“깜짝 놀란 얼굴입니다. 앨저 경.”

“그야 문을 열었는데 멘델린 경이 있으면 놀라죠. 놔 줘요. 출근해야 해요.”

“일부러 그럽니까? 새해 첫날 정도는 에스코트를 받아 주시죠.”

눈을 홉떴다. 엘테르트를 얄밉게 흘겼다.

엘테르트는 망토를 꽉 여민 차림이었다. 붉은색 양모직에, 끝단에 여우 털이 달린 망토는 이에샤의 월급보다 비싸 보였다. 엷은 금발에 물기가 송골송골했다. 자디잔 유리구슬을 뿌려 놓은 것만 같았다. 추위에 달아오른 뺨이 이에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만져 보고 싶었다. 엘테르트도 제 뺨에부터 손대지 않았는가. 이에샤는 엘테르트의 한쪽 볼을 쿡쿡 찔러 댔다.

“뭘 합니까. 어린애처럼.”

“얼마나 기다리셨어요? 평소엔 말랑말랑한데 얼어서 촉감이 별로예요.”

“그다지 기다리지는……. 다른 날 앨저 경의 출근 시간을 생각하면 이때쯤 나올 줄 알았습니다. 마차를 대기시키고 걸어오는 길이 추웠나 보지요.”

멘델린 공작가의 마차를 떠올렸다. 눈부신 육두마차는 피올라 거리에 들어서기는커녕, 어귀의 갈림길을 지나기조차 빠듯했다. 엘테르트가 처음 바래다준 날, 낭패하던 모습이 우스웠었다. ‘우왕좌왕하는 엘테르트’는 흔한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엘테르트의 마차를 타려면 역마차 정거장보다 더욱 걸어가야 했다. 승차감을 따져 보면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이에샤는 기껍게 받아들였다.

엘테르트가 마중 온 일이 생뚱하지만은 않았다. 새해의 첫 아침을 함께하고 싶다, 청했었으므로. 이에샤는 인상을 구기며 “말일에 같이 자자는 건가요?” 하고 물어보았다. 엘테르트는 마시던 차를 뿜을 뻔했다―뼛속에 새겨진 예법으로 참아 냈다. 에스코트를 받아 달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이에샤가 올해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이 저였으면 했다. 이에샤는 엘테르트의 설명을 듣고야, 얼굴을 폈다. 미안하거나 부끄럽지는 않았다. 엘테르트 쪽이 표현을 야릇하게 해서 오해한 게 아닌가.

연인은 진눈깨비가 내리는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앨저 경.”

“말씀하세요.”

“아까 끌어안아 보니 좀 마른 것 같습니다. 경이 예전에 브링어는 순식간에 살이 빠진다고 했죠. 식사, 제대로 하고 있습니까?”

“아, 요 며칠 빠지긴 했을 거예요. 이제부터 조절할 테니 괜찮아요.”

엘테르트의 물음에는 우려가 가득했다. 이에샤는 예사롭게 답했다. 끼니는 거르지 않았다. 식사량이 조금 줄었을 따름이었다. 밀레나 때문에 속이 개운하지 못했다. 하나 몸이 상할 정도는 아니었다. 바쁘게 연초를 나다 보면 잊어버리리라. 이에샤는 선연이든 악연이든, 아는 사람이 변을 당하면 께름칙한 줄 모르고 살았다. ‘아는 사람’이 몇 되지 않았으니까. 가슴이 놀랐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의료원에서 본 광경이 너무 뜻밖이라 그래요. 머릿속에 콱 박혀서. 밀레나 걔는 정말……, 항상 완벽한 숙녀처럼 굴었거든요.”

밀레나가 미치광이처럼 악쓰던 꼴이 눈에 선했다. 재미있는 그림이 못 되었다. 통쾌한 그림도. 개를 싫어하는 사람이 투견판에 가면, 욕지기를 느끼는 것과 비슷했다. 딱 그만큼의 흔들림. 이에샤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뒷공론으로 사람 물이나 먹이던 계집애니 천벌 받은 거지 싶기도 하고. 평생 떠받들리며 산 애가 하루아침에 눈병신이 됐다니 묘한 기분도 들고.”

“삿된 말 좀 쓰지 마십시오. 어휘는 그 사람의 인품을 나타냅니다.”

“이런 때에까지 훈계할 기분이 들어요?”

“잘못된 일은 즉시 바로잡아야지요. 남의 불행에 대고 눈병신이 뭡니까.”

엘테르트가 타일렀다. 이에샤는 뚱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테르트의 말이 옳기는 했다. 셈브리온 덕분에 망나니 같은 입담을 얻었으나, 황실 기사단장은 품위를 지켜야 했다. 욕설에 익어서야 곤란했다. 말씨를 부드럽게 가꾸어야 할 성싶었다.

새하얀 마차에 다다랐다. 갈기가 길고 덩치 큰 담황색 말들은 한 필 한 필이 멋들어졌다. 이러한 마차가 공작 부부의 몫까지 두 대는 더 있을 터였다. 이에샤는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엘테르트가 내민 손이 멋쩍어졌다. 바지를 입은 채였다. 도움 따위 필요하지 않았다. 엘테르트는 한숨을 짓고, 따라서 탔다.

한 해 전, 이곳에서 둘은 반대편 끝과 끝에 앉았다. 이제는 나란하게 붙었다. 세상사 모르는 법이었다. 이에샤가 엘테르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마차가 달가당달가당 나아갔다. 부드러운 승차감은 탈 때마다 감탄스러웠다.

“새해 아침부터 절 만나러 오는데 공작 부부께서 반대하지 않으셨어요?”

“못마땅한 눈치시긴 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방임주의라.”

“억지로 막지는 않는다는 거네요.”

“한때의 치기라고 여기시는지도 모르고요.”

엘테르트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답답한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그럴 수도 있겠군.’ 하고 생각했다. 멘델린 부부에게 앨저 백작은, 준귀족이나 평민 여자와 다르지 않을 터였다. 엘테르트가 제정신을 차리면 저버릴 상대.

애버토스와 엘로나는 아들을 제법 이해하는 부모에 들었다. 하지만 엘테르트와 이에샤의 사랑은 ‘상식적으로’ 터무니없었다. 아닐 거야. 괜찮겠지. 마음 한구석에 어렴풋한 기대와 안도가 도사렸다. 엘테르트는 진지하게 닿지 못하는 처지가 서글펐지만, 기회로 받아들였다. 두 사람이 강경하게 나오기 전에 설득해 볼 셈이었다.

애당초 허락이 떨어지더라도 이에샤와 함께할 날은 까마득했다. 당사자가 “꿈을 이루기 전까지는 안 돼요.” 하고 물리치는데 어찌하겠는가. 멘델린 부부는 엘테르트가 고르는 입장일 줄로만 알았다. 선택받고자 매달린다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옛날에는 엘테르트도 똑같이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교만이었다. 귀족의 결혼이 집안끼리 맺는 약속이라고, 멋대로 여성을 침실에 밀어 넣는 짓은 바보스럽지 않은가. 엘테르트는 이에샤를 간절하게 바랐다. 이에샤 또한 저를 바라 주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앨저 경. 작년 오늘도, 내가 당신을 황궁으로 데려갔었죠.”

“그러네요, 딱 1년 전이네. 그때 멘델린 경 진짜 재수 없었는데.”

“……앨저 경은 뭐 예뻤던 줄 압니까.”

“뭐라고요?”

한숨이 나왔다. 이에샤를 처음 만난 무렵은 삶에서 가장 부끄러운 기간이었다. 브링을 느끼고도 어린 여자가 브링어이리라 생각지 못하고, 덮어놓고 꺼렸던 얼간이가 기억났다. 요즘은 제국 기사단장들과 자리를 가져도 식은땀이 흐르지 않았다. 이에샤를 끌어안으며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이에샤가 아니었다면 평생을 과거에 사로잡혀 살았을지도 몰랐다.

“농담입니다. 앨저 경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멋집니다.”

“진즉 그러면 좀 좋아요? 우리 스승님은 항상.”

이에샤는 셈브리온에게 들은 칭찬들을 읊으려고 했다. 말허리가 꺾어졌다. 붉은 머리카락이 망막에 새겨진 듯 뚜렷했다. 웃고 떠들다가도, 잔향처럼 그리움이 사무쳤다. 목구멍이 메었다. 새아침인데 셈브리온은 제 곁에 없었다. 힘겹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항상, 제가 최고라고 했답니다.”

“앨저 경.”

“멘델린 경도 잘 알아 두세요.”

이에샤의 나이도 스물이 되었다. 더는 보호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알디온 후작과 엮일 빌미도 깨끗하게 사라졌다. 성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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