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2 11. 파국 =========================
건포도가 박힌 쿠키를 먹으며 담소하던 차였다. 출입문이 빠끔히 열렸다. 앳된 얼굴이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란델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머리카락이 길었다. 흰색 리본으로 머리 꽁지를 묶은 채였다. 뜻밖의 손님이었다. 이에샤는 인기척의 크기로 미루어 라제카일 줄 알았다. 란델이 휴게실로 들어섰다. 미엘라가 잽싸게 일어났다. 나머지도 예를 갖추려고 했지만, 란델이 “앉아 있어. 난 괜찮아.” 하고 가로막았다.
“저하! 어떻게 오셨어요? 혼자 오신 건가요?”
“응. 열흘만 지나면 나도 열네 살이잖아. 형님처럼 혼자서 다녀 보고 싶었어.”
“시종장께 말씀은 하셨고요?”
“당연하지. 허락받고 왔으니까 걱정 마. 내가 없어지면 다들 힘들어질 테니까, 그러면 비행(非行)인걸.”
란델의 말본새는 애교스러웠다. 반면에 말씨는 점잖았다. 교육을 잘 받은 티가 났다.
라제카도 떼 부리거나 제멋대로인 성미는 아니었다. 그러나 란델은 신기하리만치 순했다. 이실리아를 보게 해 달라고 조를 때만 빼면, 여기저기 들이쑤시고 다니는 라제카를 말리는 처지였다. 어린아이 특유의 식탐도 없었다. 정찬에서 라제카가 좋아하는 음식은 죄 양보할 정도였다. ‘동생’이 원수의 다른 말인 이에샤로서는 황손 쌍둥이가 낯설었다. 밀레나와 제가 멀쩡한 집안에서, 또는 한배에서 태어난 동기였어도 사이좋았을까.
란델이 이에샤를 바라보았다. 눈길을 느끼고 이에샤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무래도 란델은 저에게 볼일이 있는 것 같았다.
“저하? 저한테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으응, 앨저 경. 급하게 전해 줄 얘기가 있어서 온 거야.”
란델의 고개가 숙어졌다. 집게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였다. 난처한 모습이었다. 이에샤는 어리둥절해졌다. 무슨 까닭으로 망설이는지 짚이는 바가 없었다. 란델은 갈색 눈동자를 되록되록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들었어? 알디온 후작 영애가 본궁 앞에서 쓰러졌단 소식.”
“……예? 그게 무슨.”
“퇴궐하려고 마차 대기소로 가는 길이었나 봐. 일단은 의료원으로 호송했어.”
이에샤는 눈매를 비뚤어뜨렸다. 송악궁에서의 일이 되살아났다. 밀레나가 까무러쳐도 이상할 것 없는 몰골을 하기는 했었다.
사람 몸에 마력이 쌓이면 고치기 까다롭다고 들었다. 치료 마법이나 포션은 중독에 박차를 가할 따름이었다. 의술로는 마력을 씻어 낼 수 없었다. 뛰어난 마법사를 불러들여서―자연물에서 마력을 얻듯이―뽑아내야만 했다. 큰돈이 들겠으나, 알디온의 재력이라면 어렵지 않을 터였다.
‘마력 중독 말고도 어디 문제 있나?’
한숨이 넘쳤다. 알디온 집안과 엮이지 않고 남남처럼 살았으면 싶건만, 자꾸 일상에 밀레나가 파고들었다. 란델이 멋쩍은 얼굴로 이에샤의 눈치를 보았다.
“경이 동생하고 사이가 나쁜 건 알아. 지난번에 누님이랑 하는 말 들었으니까. 하지만 이 일은 백화 기사단의 소관이라고, 형님께서.”
“이벨리오노 전하가 그 자리에 계셨습니까?”
“응. 백화 기사 한 명을 의료원으로 보내 영애가 깨어나면 마차 대기소까지 배웅하라 하셨어.”
“왜 전령을 시키지 않고 귀하신 저하께서 이런 일을…….”
란델의 뺨이 붉어졌다. 이에샤는 눈치를 차렸다. 자기가 심부름을 보내 달라고 조른 것이 틀림없었다. 존경하는 형에게 누나처럼 도움이 되고 싶다, 말하고는 했으니까. 귀여운 이유였다. 밀레나가 불러일으킨 짜증도 잊고 웃음이 나왔다.
그때, 네세라가 귀 옆으로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이에샤는 의아쩍게 네세라를 보았다. 뭔가 할 말 있어? 네세라가 팔을 거두어들이며 대답했다.
“제가 갈게요. 알디온 영애한테.”
“페리튼 경이?”
“네. 앨저 경이 가긴 껄끄러우시잖아요. 올센 경은 귀족 앞에서 압박감을 받고. 저 아니면 스란 경을 보내시는 게 적절하지 않겠어요?”
이에샤는 생각에 잠겼다. 네세라의 말대로였다. 미엘라가 살뜰하기는 해도, 귀족을 대할 때는 움츠러들었다. 까다로운 귀부인을 수행한 이튿날 앓아누웠을 정도였다. 스란은 환자를 챙기기에 무신경했다. 네세라가 적격이었다. 이에샤는 “알았어.” 하며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엘테르트의 사무실에 깃들었던 향수 냄새가 떠올랐다. 엘테르트에게 물어볼 셈이었지만, 연말이었다. 엘테르트가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시기. 귀찮게 하기는 미안했다. 밀레나에게 들어도 될 일이었다. 어차피 밀레나는 저와 엘테르트의 사이를 알았다. 손잡는 모습을 보았을 테니.
이에샤는 마음을 굳혔다.
“아니야. 내가 가야겠어.”
모두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백화 기사들은 이에샤가 얼마나 밀레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는지 알았다. 자신이 보살피러 가겠다니, 뜻밖이었다. 괜찮으시겠어요? 미엘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에샤는 쓴웃음을 흘렸다.
“걔랑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아픈 사람 구박하고 오진 않을 테니 염려 붙들어 매.”
“우린 그런 걸 걱정한 게 아니에요, 앨저 경.”
미엘라 대신 네세라가 말했다. 저희의 기사단장은 잘못을 타이르면, 받아들이고 고쳐 나가는 사람이었다. 업무에 감정을 섞으면 위험하다는 사실도 깨달았을 터였다. 이에샤가 밀레나를 괴롭힐 걱정은 하지도 않았다. 미엘라가 네세라의 말끝을 달았다.
“앨저 경이 알디온 영애랑 만나면 속상하실까 봐요. 무리하시면 안 돼요.”
이에샤는 입을 다물었다. 부하들이 제 심정을 헤아려 주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털어놓은 과거를 진지하게 들었다는 뜻이었다. 쑥스러움이 차올랐다.
“알았어. 나 괜찮아.”
“잘 다녀오세요.”
고개를 끄덕였다. 안락의자에서 일어났다. 란델의 곁에 섰다. 빙그레 웃어 보였다.
“말씀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하. 황태자 전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정말?”
“정말요. 나중에 가서 자랑하세요. 오늘은 바쁘실 테니 참고요. 제가 나리궁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란델의 별궁과 의료원은 방향이 같았다. 란델이 이에샤의 손을 답삭 잡았다. 이에샤는 흠칫했으나, 뿌리치지는 않았다. 란델은 남성과 여성의 몸이 함부로 닿으면 안 된다는 의식이 모자랐다. 누이와 각별하고, 하녀를 놀이 동무 삼아 자란 까닭이었다. 16살이 되기 전까지는 크게 문제될 일도 아니었다.
이에샤와 란델은 백화 기사단 휴게실을 뒤로했다.
밀레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 기울이려고 했다. 자각은 불이 켜지듯이 찾아왔다. 제 몸이 느껴지지 않았다. 팔다리를 움직이겠다고 마음먹어 보아도,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의식만 둥실둥실 어둠 속을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온 세상이 새카맣다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정말로 암흑에 갇힌 채였다.
‘아, 꿈이구나.’
황궁의 마차 대기소로 향하던 참이었다. 눈앞이 깜빡거렸다. 기절해 버린 모양이었다. 비명을 지르는 몸을 악으로 가누던 터였다. 쓰러졌어도 놀랍지 않았다.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잔잔했다.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냉철하게 판단까지 할 수 있었다.
드르르…….
익숙한 소리가 났다. 요즈음 밀레나를 괴롭힌, 무언가가 구르는 듯한 환청. 쓰러져서까지 이 소리를 들어야 한다니. 신물이 났다. 몸이 없어서 귀를 틀어막기도 불가능했다. 현실에서도 귀마개를 한다고 환청이 줄어들지는 않았지만.
드르르, 드르르, 드르륵.
여기가 아니야. 다른 사람이야. 맞는 곳으로 가야 해.
모르는 남자의 속삭임에도 익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목소리가 중얼거리는 말은, 제국어가 아니었다. 낯선 언어인데도 뇌리에 닿으며 통역이 되었다. 뜻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외국어에 밝은 학자를 불러서 물어보았었다. 학자는 밀레나가 가 본 적도 없는 나라의 이름을 댔다. “발음을 맞춰 보니 벨체터어 같군요.” 하고.
누가 킬타로스를 죽였지?
‘몰라, 그런 거.’
밀레나는 한숨을 쉬려 했다. 제게 코도 입도 없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답답했다. 어서 깨어나고 싶었다. 눈을 뜨면 에브라힐 궁전일까, 알디온 저택일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걱정할 터였다.
최근 오스터는 사윗감을 찾는 데 혈안이 되었다. 밀레나가 “엘테르트 님이 아니면 싫어요.” 하고 대들어도 헛일이었다. 알디온 부부는 애가 달았다. 서둘러 밀레나를 번듯한 집안에 내주어야 했다. 결혼식도 누구나 부러워할 만하게 치르고. 저희 사랑의 결실이 행복해지는 모습을 세간에 보여 주고 싶었다. 마력에 중독되었다고 알려지기라도 하면 끝장이었다.
그러니까 걱정할 것이 틀림없었다.
얼마나 어둠에 파묻혔을까. 억센 손아귀에 붙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밀레나는 세게 틀어잡힌 채, 위로 위로 끌려갔다. ‘삐이이’하고 이명이 울렸다. 직감이 들었다. 꼭대기가 곧이었다.
의식이 물낯에 부딪힌 것처럼 크게 첨벙했다.
“……알디온 영애, 정신이 드세요?”
“앨저 경, 이제 들어오셔요! 알디온 영애가 깨어나셨어요.”
“영애, 기분은 좀 어떠신가요? 머리가 아프거나 울렁거리거나 하지는 않으세요?”
밀레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목이 옆으로 구부러졌다. 손가락을 쥐었다가 펴 보았다. 발가락도 꼼지락거렸다. 몸이 있었다. 감각이 살아났다. 정신을 되찾은 것이었다. 누군가가 밀레나의 왼 어깨를 어루만졌다.
“알디온 영애? 말씀하기가 어려우세요?”
어째서일까.
세상이 캄캄했다. 어둠이 가시지 않았다. 밀레나는 제가 어떠한 자세를 했는지 헤아려 보았다. 뒤통수부터 종아리까지 푹신한 요에 싸였다. 침대에 누운 모양이었다. 몸이 가뿐했다. 드레스를 벗고 환자복으로 갈아입었으리라. 거듭해서 말을 거는 여자들은 의료원의 간호사나 하녀 같았다.
양손을 들었다. 얼굴을 매만졌다. 보드랍고 매끈한 살결을 따라, 이목구비를 훑었다. 귀. 여러 사람의 소리가 뒤엉켜 시끄러웠다. 코. 약 냄새가 짙게 풍겼다. 입.
“눈이,”
목소리도 나왔다. 눈가를 주물러 보았다. 눈도 말짱하게 달렸다. 눈이, 이상하게도, 낯가죽에 달리기만 했다.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까뒤집었다. 손끝 뭉뚝한 부분이 눈알을 건드렸다. 소름 끼치게 말캉하고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밀레나를 둘러싼 어둠에는 한 점 흔들림조차 없었다.
“아, 아.”
손을 확 거두었다. 욕지기가 솟구쳤다. 믿을 수 없었다. 저에게 이토록 끔찍한 일이 생겼음을 믿고 싶지 않았다. 아니, 믿어서는 안 되었다. 거짓말이었다. 모조리 허깨비였다. 아직도 꿈을 헤매는 것이 틀림없었다. 악몽. 그래, 악몽이었다.
입술이 헤벌어졌다. 억누를 새도 없이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했다.
“아아아아아악!”
“알디온 영애, 진정하세요!”
말리는 소리가 귀찮았다. 날뛰지 못하도록 붙잡는 손길이 짜증 났다. 지긋지긋했다. 살아온 나날도, 살아갈 나날도. 보이지 않는 눈에서 눈물이 넘쳐흘렀다.
순간 어렴풋하게 성이 아니라 이름으로 불린 듯싶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밀레나는 오래전부터 그 목소리의 주인이 싫었다.
============================ 작품 후기 ============================
선추코 감사합니다!
했네했어 님 후원 쿠폰 감사합니다!
주말은 쉽니다.
+) 오후 9시 20분, 내용을 조금 가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