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9 11. 파국 =========================
(연참 3/3)
굵은 소나무를 깎아 만든 탁자는 칠(漆)도 되지 않았다. 팔을 올리면 긁힐 성싶었다. 머리카락을 바싹 깎은 남자가 의자에 앉은 채, 두 발로 탁상을 밀었다. 의자 앞다리가 들썩들썩했다. 오른쪽 얼굴에 붕대를 싸맨 여자가 “자빠져 콱 뒈지려고.” 하고 핀잔했다. 너무 화내지 마, 앵지. 아고르가 말렸다. 식구끼리 싸우지 말자고. 셈브리온은 벽에 등을 기대섰다. 좌중을 지켜보았다. 낯빛이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눈동자가 검었다. 검회색이나 고동색으로 보이는, 조그마한 차이를 빼면 하나로 묶을 만했다. 대륙 어디에서나 드문 빛깔이었다. 벨체터인이 검은 눈을 타고나는 까닭은 밝혀지지 않았다. 폐쇄적으로 겨레를 지켰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땅에 흐르는 마력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빌버의―누추한―회의실에는 푸른 광양자가 떠다녔다. 아고르는 그를 예비 마력이라고 불렀다. 델페레타 제국 황실 마법부에서 만든 기술을 흉내 낸, ‘마력 저장’ 마법이었다. 옛날 셈브리온은 아고르를 청소와 요리 잘하는 막냇동생 정도로 여겼었다. 이제는 알았다. 아고르 틸트라는 천재였다. 독학으로 마법을 익힌 일부터가 터무니없었다. 셈브리온은 두려웠다. 악심을 먹은 마법사가 이에샤의 나라에 무슨 짓을 벌일지.
밤송이 같은 머리카락의 남자, 엘도르가 기어이 뒤로 넘어갔다. 큰 소리가 울렸다. 익숙한 일이었다. 엘도르는 산만하고 집중력이 없었다. 회의 중에도 장난질을 하기 일쑤였다. 얼굴에 붕대를 감은 랭기디아가 이맛살을 구겼다. 아고르는 엘도르가 자빠지든 고꾸라지든 알 바 아니라는 태도로, 따뜻한 물을 홀짝였다. “아, 좋다.” 하고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랭기디아가 씹어뱉었다.
“염병 진짜. 저러다 골 빠개져서 훅 가지. 됐고, 다른 놈들은 왜 안 와?”
“발바도스는 오늘 안 들어온댔어.”
엘도르가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오시르는 뭐, 뻔하지. 잘걸.”
“레오웰이랑 쟐레 새끼들은?”
“앵지, 저 친구랑 레오웰의 악귀를 한자리에 뒀다가 무슨 피를 보려고 그래?”
셈브리온 쪽으로 턱짓해 보였다. 셈브리온은 쓴웃음을 흘렸다. 레오웰 왕국이 멸망하며 쪼개진 도시 연합, 대도시 일란드의 시장은 브링어였다. 브링어 중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히는. 셈브리온은 일란드와 도시전(戰)을 벌이던 엘버라에 고용된 적이 있었다. 헤놀 시장과도 싸워 보았다. 젊다 못해 어린 브링어는 형편없이 밀렸다. 운이 좋아 무승부로 끝났다. 지금이라면 승리를 점칠 수도 있으리라.
“내가 빠져도 된다만.”
“됐어. 협력 끝나면 입 닦을 외지인보단 동향 친구가 있는 편이 낫겠지. 이제 좀 앉지그래? 붉은 악몽.”
“……창자까지 오그라지는 기분이니까 그렇게 부르지 좀 말라고.”
셈브리온이 벽에서 몸을 떼었다. 탁자로 다가갔다. 랭기디아의 곁에 섰다. 서늘하게 내려다보았다. 2m에 가까운 사내가 그늘을 드리우는데도, 랭기디아는 코웃음을 쳤다.
“다섯 번은 말했을 텐데.”
“성질을 부려도 열 번은 채우고 부리는 게 어떨까? 멍청하고 유치한 남자가 인내심이라도 있어야지.”
굵은 눈썹을 추켜올렸다. 왼쪽만 드러난 눈이 반뜩였다. 랭기디아는 독특하게 생긴 여자였다. 붉은빛이 도는 갈색 머리카락 양옆을 엘도르만큼이나 짧게 깎았다. 가운데에만 수북하게 남겨, 다섯 갈래로 묶었다. 오른 얼굴에는 왕실 기사단이 폭약을 터뜨렸을 때 생긴 흉터가 자리했다. 살갗은 시허연 것을 넘어 푸르뎅뎅했다.
셈브리온은 랭기디아가 불편했다. 생김새나 입담, 성깔 때문은 아니었다. 랭기디아는 빌버의 홍일점으로서 동료에게나, 외세에나 업심당했다. “앵지, 넌 싸움터보다 부엌이 맞지 않겠어?” 따위의 놀림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딸 치고 싼 속옷을 빨아 달라는 희롱까지 당했다. 매 때마다 아지트를 뒤집어 엎기는 했지만. 그 모습이 셈브리온에게 옛날, 즐겁지 못한 기억을 돌이키도록 했다. 랭기디아는 눈매마저 힐가와 닮았다.
“레오웰에서 일부러 이 덩치를 피하는 거라면 기다려 봤자잖아. 쟐레도 우리보다 레오웰이랑 가까우니까 같이 씹는 건가? 누린내 나는 남부 놈들.”
“오늘은 중요한 얘기가 있다고 전했는데. 하여간 이놈이고 저놈이고 말 참 안 듣지.”
아고르가 투덜거렸다. 아고르는 델페레타를 무너뜨리려는 계획의 주축이었다. 그렇기에 사람이 심심찮게 얼어 죽는 벨체터가 연합의 본산이 되었다. 빌버의 우두머리는 셈브리온이 용병이던 시절 선배였으나, 회의를 소집하고 이끄는 일은 아고르가 맡았다. 조직원에는 용병이나 못 배워 먹은 비렁뱅이 출신이 태반이었다. 아고르만 한 지식인이 없었다.
컵 안의 물을 남김없이 들이마셨다. 양철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댕그랑, 소리가 났다.
“안 온 놈들한테는 나중에 통보하지 뭐. 자기가 안 나온 거 딴소리하면 죽여야지.”
스산한 우스개였다. 원칙을 깬 마법사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았다. 기적적인 힘으로 사람을 해칠 수 있었으니까. 랭기디아마저 움찔했다. 아고르는 개의치 않고 집게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태도는 잔잔했으나, 골머리를 썩는 듯이 보였다.
“델페레타 일에 차질이 생겼다.”
“뭔 개소리야? 멀쩡히 잘 나가던 거 아니었어?”
“우리의 친애하는 고(故) 협력자가…….”
셈브리온은 그동안 얻은 정보를 떠올렸다. 델페레타인 마법사가 ‘인공 마파랑’ 마법의 초안을 아고르에게 넘겨주었다고 들었다. 그는 얼마 뒤, 황궁에 마파랑을 일으키려다가 붙잡혔다. 짚이는 점이 있었다. 이에샤가 신년맞이 무도회에서 공을 세웠던―보너스 급료를 받아 왔던―일. 이에샤가 막아 냈던 미친놈은, 자기가 실패하더라도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손써 놓고 죽은
것이었다.
“남기고 간 선물이, 발각돼서 모두 치워졌어.”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마파랑이고 뭐고 쫑난 거?”
엘도르가 멍청히 물었다. 아고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이 까다로워졌을 뿐이었다. 그르치지는 않았다. 아고르의 흐릿하게 질린 입술에 비웃음이 걸렸다.
“어차피 사태는 쐐기만 박아 넣으면 될 정도로 진행된 뒤야. 박아 넣어야 할 쐐기가 커졌을 뿐이지. 그래서 일정이 조금 바뀔 거라고 전하려 했는데.”
“얼마나 미뤄진 거지?”
“우와, 이브론. 그렇게 대놓고 반가워하면 나 섭섭하다.”
셈브리온은 입을 다물었다. 아고르의 눈초리가 따가웠다.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형제나 다름없던 아고르. 딸과 같은 이에샤. 어느 한쪽만 고르려니, 속이 뒤숭숭했다. 하나 아고르가 이에샤의 삶을 위협하게 둘 수는 없었다.
아고르는 셈브리온이 무슨 생각을 하든 부질없다는 양 말했다.
“혼자만 평화가 너무 길었지, 델페레타는. 슬슬 독차지하던 영예를 우리한테도 나눠줄 때가 되지 않았어?”
벨체터의 내란은 잦아드는 중이었다. 오래지 않아 왕실이 무너질 터였다. 귀족파에서 새로운 왕을 옹립하면, 남는 것은 폐허가 된 나라였다. 벨체터에는 수탈할 땅이 필요했다. 식량난을 겪는 레오웰과 해적과의 싸움이 끝나지 않는 쟐레 또한 마찬가지였다.
“너도 벨체터의 부흥을 바라잖아. 10년을 넘게 살았을지언정 제국은 네 나라가 아니야.”
“…….”
“기사단장 서너 명만 맡아 주면, 네 제자라는 계집은 빼돌려 줄게.”
“그래. 약속한 거다.”
셈브리온은 무뚝뚝이 대답했다. 아직 시간은 남았다. 여차하면 제 손으로 아고르를 해쳐서라도 막을 셈이었다. 벨체터의 희망을 꺾는 짓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애꿎은 나라를 결딴내지 않더라도, 내란이 끝나면 벨체터는 나아질 터였다. 그렇게 믿었다.
그러니까 아고르가 말하는 ‘계집’이야말로, 제국의 기사단장이라는 이야기는 덮어 두었다.
* * *
델피르력 753년 12월 20일.
연말에는 온 에브라힐이 바빠졌다. 백화 기사단은 개중 나은 편이었다. 마력 오염 사건을 맞닥뜨린 날, 한 해의 결산 보고서를 총무부에 올렸으므로. 더는 할 일이 없었다. 여느 때처럼 보내면 되었다. 이에샤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이 희멀겠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오늘뿐 아니라 며칠째 저기압이 이어졌다.
‘백화 기사단장이 제국 제3 기사단장을 죽였다’. 그러한 소문이 퍼져 나갔다. 나쁜 이야기는 발이 빠른 법이었다. 어처구니없었다. 이에샤는 문초실로 끌려가기는커녕 시말서도 쓰지 않았다. 황실이 이에샤의 결백을 보증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에샤가 앙심을 품고 글렘을 해코지한 듯이 떠들어 댔다. 추문이라면 익숙했지만, 이번에는 속이 쓰렸다. 글렘의 기습으로 위험했던 쪽은 자신이었다.
“앨저 경, 간식 드세요!”
“뭐야? 레몬 냄새 나네.”
“맞아요. 타르트로 만들었어요. 드셔 보세요, 아주 시지는 않을 거예요.”
시더가 왜건을 밀고 들어왔다. 이에샤의 책상에 접시를 옮겼다. 왜건이 빈 것으로 미루어, 다른 기사들에게 먼저 들른 모양이었다. 가장자리를 꽃 덩굴 무늬가 에워싼 도자기 접시에 레몬 타르트 다섯 조각이 놓였다―접시 크기가 타르트 한 판도 올라갈 법했다. 한 해 동안 시더는 이에샤의 먹성을 꿰뚫었다.
이에샤는 곁들여 나온 머랭부터 포크로 떠먹었다. 단맛이 혀를 감쌌다.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출장 가정부 알리사도 요리 솜씨가 좋았지만, 군음식은 시더가 맛있게 만들었다. 석곡궁으로 오기 전에는 주방 하녀였다고 들었다. 백화 기사단의 식사는 다른 별궁에서 보내 왔다. 그를 물리고 시더에게 별식을 해 달라 부탁한 적도 있었다.
옛일이었다. 이제는 시더에게 요리를 시키지 않았다. 보다 못한 미엘라가 시더는 석곡궁의 잡일을 도맡았으며, 부엌일에 얼마나 품이 들어가는지 일장 연설을 펼친 까닭이었다. 셈브리온이 살림을 만만히 보지 말라고 했을 때는 웃어넘겼었다. 그러나 재료 손질부터 뒷정리까지, 전직 하녀의 입에서 쏟아진 과정은 이에샤를 질리게 했다. 가로베기만 천 번을 하는 편이 쉬울 성싶었다.
“이렇게 본격적인 디저트는 오랜만이네. 무슨 바람이 불었어?”
“미엘, 아니, 올센 경이 그때는 좀 과장해서 말하신 부분도 있어요. 제가 좋아서 만드는 건 그렇게 안 힘들거든요.”
“결국 그동안 내가 시켜서 한 일은 힘들었다는 뜻이잖아.”
타르트 시트 속에 들어찬 레몬 크림을 크게 갈라 먹으며 투덜거렸다. 시더는 헤헤 웃기만 했다. 이에샤는 시더의 낯을 물끄러미 보았다. 저보다 한 살 어린데도, 느긋하고 밝은 인상이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얘, 시더. 너도 이거 먹었니?”
“만들면서 맛 정도는 보죠. 세 조각은 다른 분들 드리고 나머지 다 앨저 경 드렸는데, 이 정도로 만족해 주실 순 없을까요?”
“아니, 양이 부족하다는 게 아니라. 내가 무슨 돼지야?”
말할까, 말까. 포크를 든 채 고민했다.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이에샤의 입이 떨어졌다.
“같이 먹자고.”
“예?”
후작 영애로 태어나 백작이 되었다. 이에샤는 뼛속들이 귀족이었다. 하녀 따위에게 겸상하자고 말하는 데는 거부감이 따랐다. 하나 시더는, 글렘과 관련한 소문 때문에 곤두선 이에샤를 위로해 주었다. 답답하게 가슴을 치기도 했다. 동료도 아니고 사용인인 시더가 분개해 준 것은 뜻밖이었다. 어림짐작이었지만, 오늘의 레몬 타르트도 이에샤를 북돋우려고 만든 성싶었다.
“거기 앉아. 한 조각은 너 먹으렴. 자기가 만들었는데 맛만 겨우 보면 아깝잖아.”
이에샤는 겸연히 둘러댔다. 시더에게 자리를 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