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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128화 (128/164)

00128 10. 멈추지 않는 바퀴 =========================

(연참 2/3)

멘델린 공작 부부의 우려는, 결과적으로 옳았다. 이에샤도 ‘집 안에 들어앉아서 내조하는 아내’는 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세 번쯤 죽었다가 깨어나도 현숙한 부인이 못 될 터였다. 엘테르트가 조바심치는 까닭을 알 성싶었다. 부모의 반대에 부딪치니 겁이 났으리라. 이에샤는 황궁에서 주제 파악을 배웠다. 멘델린과 제가 어울리지 않는 줄 알았다. 또한, 엘테르트가 저에게 얼마나 목을 매는지도 알았다.

“왜 갑자기 그런 일이 생겼죠? 우리가 비밀스럽게 만난 건 아니지만 공작 각하와 레이디는 모르셨잖아요?”

“나도 짚이는 구석이 없습니다. 어제 퇴궐하니 두 분 모두 아시는 상태더군요.”

찝찝하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금은 엘테르트를 달래는 일이 먼저였다. 이에샤는 사무실 문부터 닫았다. 문단속도 잊고 엘테르트에게 안겼다 깨달으니, 오싹했다. 석곡궁에서 둘의 사이는 훤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는 사람에게라도 농밀한 접촉을 들키기는 창피했다.

까치발을 들었다. 엘테르트의 머리를 껴안았다. 귓가를 가슴에 눌렀다. 이 방법이 효과가 있는지는 아리송했다. 셈브리온의 품에 파고들면 콩콩, 콩콩 하는 심장 소리가 아늑했었다. 제 가슴은 엘테르트를 안자마자 두방망이질했다. 엘테르트의 머릿속만 어지러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만에야 엘테르트의 숨결이 가라앉았다. 이에샤가 말문을 텄다.

“저, 사실 잘 모르겠어요. 멘델린 경이 왜 이리 불안해 하는지. 예상했던 반응이잖아요?”

“머리로만 생각할 땐 괜찮았습니다. 한데 막상 아버님, 어머님께 맞서고 나니 속이 메스껍고 울렁거려서. 난생처음 부모님께 대든지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와.’

새삼스럽게 놀랐다. 이에샤는 오스터에게 유리잔부터 책, 재떨이까지 갖은 물건을 집어 던졌다. 최근에는 칼부림을 벌였다. 부모와 싸워 보지 않았다니. 희귀종이 따로 없었다. 둘은 참말로 딴판이었다. 엘테르트가 “앨저 경.” 하고 불렀다. 이에샤는 고개를 내렸다. 엘테르트의 정수리에 입술을 붙였다. 듣겠다는 뜻이었다.

“앨저 경이 받아들여 줄 때까지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다 했지만, 사실 난 늘 불안했습니다.”

엘테르트가 성긴 말투로 늘어놓았다.

“가만 보면 앨저 경은 매사에 무관심한 사람 같습니다. 세상하고 거리를 두는 것만 같아요. 미련이라고는 한 톨도 없어 보여서, 귀찮은 반대에 부딪쳤다간 날 좋아하는 일도 후련히 그만둬 버리지 않을까 싶고.”

“제가요?”

“예. 내가 끝까지 기다리더라도 당신 마음이 변하면 우린 순식간에 끝나겠지요. 제발 아버님하고 어머님이 앨저 경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두 분의 존재가 무거워서 앨저 경이 날 떠날까 무섭습니다.”

이에샤는 입을 헤벌렸다. 엘테르트가 이토록 애달파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놀라움 뒤에는 허무감이, 마지막으로 노여움이 잇따랐다. 결 좋은 금발을 한 움큼 쥐어뜯어 줄까 싶었다.

아니, 괜한 화풀이였다. 마음을 다스렸다. 엘테르트의 믿음을 사지 못한 것은 제 잘못이었다. 셈브리온에게만 얽매여서 선을 긋는 버릇이 떨어지지 않았다. 셈브리온이 떠난 지 두 달이 지났다. 그동안 제자리걸음만 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당신 부모님 성가시다고 다 때려치울 거 같다 이거죠.”

“얘, 얘기가 그렇게 됩니까?”

“멘델린 경은 제가 얼마나 미련이 철철 넘치는 사람인지 몰라서 그래요.”

한숨을 내뽑았다. 엘테르트가 느낀 대로 이에샤는, 무언가를 마음에 담아 두는 일이 드물었다. 앙심은 그때그때 갚았다. 짜증이나 슬픔은 넘치기 전에 달아나 버렸다. 그렇다고 미련을 느끼지 못하는가? 틀렸다. 이에샤는 아직도 집에 들어서며 “나 다녀왔어, 세비.” 하고 인사하는 날이 잦았다.

“내가 모드리스 경이랑 결투했던 날, 기억해요?”

“다른 날을 죄 까먹더라도 그날만은 못 잊을 겁니다. 앨저 경이 날 받아 준 날이니까.”

“그럼 그때 뭐라고 말했는지도 기억해요?”

엘테르트는 움찔했다. 대연무장의 빛이 들지 않던 통로를 돌이켰다. 이에샤가 엘테르트를 와락 끌어안았었다.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해 왔다. 그다음 당신의 곁에 있고 싶노라 말했다.

“명예랑 나, 어느 쪽도 포기하지 않고 가지고 싶어졌다고. 하나만 고르면 미련이, 남을 거 같다고.”

“멘델린 경 옆에 있으면 경의 이름에 내가 가려질지도 모르는데, 그런데도 괜찮지 않을까 했어요. 제국 제일의 기사가 되는 것도 당신 연인이 되는 것도 다 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제국 기사단장을 이기기까지 했는데.”

엘테르트가 얼굴을 들었다. 이에샤는 순순히 팔을 거두어들였다. 갈색 눈동자가 빤한 시선을 보내 왔다. 낯이 간질거렸다. 고개를 비끼며 털어놓았다.

“내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었어요. 우습죠?”

“……앨저 경은 정말로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당신 부모님한테 인정받는 날도, 살다 보면 오지 않을까. 아니면 당신 부모님하고 상관없이 우리끼리 잘해 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팔을 뻗었다. 엘테르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슥슥 매만졌다. 손바닥에 엘테르트가 머리 무게를 실어 왔다. 이에샤는 빙그레 웃었다. 드물게 어리광 피우는 모습이 귀여웠다.

“난 최초로 검을 들고 싸우는 여자 기사가 됐고 여자 브링어도 됐잖아요.”

“…….”

“남편 내조 못해 줘도 괜찮은 여자도 될 수 있을지 모르죠. 반대로 멘델린 경이 날 살뜰하게 챙겨 주면,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세심한 남자가 될 거고.”

숨을 들이마셨다. 여태까지도 부끄러웠다. 지금부터 뱉을 말은, 낯가죽이 후끈할 만큼 쪽팔렸다. 엘테르트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다면 무슨 소리든 못 하랴. 이에샤는 엘테르트의 생각보다 엘테르트를 좋아했다.

“당장 힘들어도 지지 말아요. 내가 꼭 행복하게 해 줄게요.”

“정말. 대체 뭡니까, 앨저 경.”

“뭐가요?”

“그런 건 보통 남자 쪽에서 해야 되는 말이잖습니까.”

엘테르트가 토라진 목소리를 냈다. 뺨이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이에샤는 엘테르트의 볼살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잘생긴 얼굴은 잡아당겨도 잘생겼다.

“여자가 말하면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해요?”

“물론, 아니지요.”

“그럼 됐잖아요. 전 당신 앞에서 무릎 꿇고 손등에 키스할 수도 있거든요.”

“그, 그건 좀. 놀리지 마십시오.”

물리치면서도 엘테르트는 싫지 않은 눈치였다. 이에샤는 정말로 레이디 취급해 줄까, 짓궂게 고민했다. 이내 그만두었다. 대신 엘테르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엘테르트가 기다렸다는 듯 허리를 안아 왔다. 다리 사이로 무릎이 파고들었다. 이에샤는 비틀비틀 뒷걸음질했다. 등과 문이 닿았다. 문짝과 엘테르트 사이에 낀 채로 정신없이 매달렸다. 입술을 겹치고 비볐다. 언제 미엘라가 서류를 모아다 올지 몰랐다. 긴장감이 발끝에서부터 짜릿하게 차올랐다.

다행하게도, 둘이 떨어지도록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이에샤도 엘테르트도 숨을 몰아쉬었다. 엘테르트는―이에샤가 과거를 의심할 만큼―달콤하게 키스할 줄 알았지만, 탐하다 보면 평정이 흐트러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에샤가 부어오른 입술을 아래팔로 닦았다.

엘테르트의 몸을 밀었다. 양 뺨의 열기를 식히고자 탁탁 두드렸다. 엄격한 태도를 꾸며 내며 말했다.

“충분히 위안됐겠죠? 이제 일하러 갑시다.”

“앨저 경, 이 순간에 그런 말은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저도 일해야 한단 말이에요. 오전 업무 빨리 끝내야 수련 시간이 늘어난답니다.”

‘검술광’다운 까닭이었다. 엘테르트는―검에 밀렸다는―미묘한 심정이 되었다. 한숨을 쉬었다. 이에샤의 매무시를 가다듬어 주었다. 단추를 풀었던 탓에,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상앗빛 코트를 끌어 올렸다. 자락에 진 주름을 폈다. 이에샤는 기분 좋게 엘테르트의 손길을 받았다.

“음, 있지요, 앨저 경.”

“네, 멘델린 경.”

“오늘 퇴궐하면 어머님과 다시 얘기해 보겠습니다. 오늘 안 되면 내일도. 모레도. 계속.”

당신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뜻이 느껴졌다. 손을 뻗었다. 하얀 크라바트를 붙잡았다. 홱 끌어당겼다. 엘테르트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 맞춰 주었다. 눈을 치켜뜨고 웃었다.

“힘내요.”

한낮이었다. 방 안은 어스레했다. 두꺼운 커튼 틈새로 빛살이 스몄다. 바닥에 하얀 금이 그어졌다. 방의 주인이 해를 싫어한 까닭이었다. 요즈음 밀레나는 밝은 곳을 꺼렸다. 눈이 시리고, 살갗은 타드는 것 같았으므로. 겨울의 첫머리였다. 침대에 드리운 캐노피도 바꾸었다. 그림자 속에서 진주색 새틴이 멀겋게 빛났다. 밀레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허리를 비틀어 엎드렸다. 탈진한 사람처럼 몸이 휘늘어졌다.

협탁에 약그릇이 놓였다. 안쪽으로 약포지를 펼쳐 놓았다. 녹갈색 가루가 소복했다. 지끈지끈한 머리를 부여잡았다. 고개를 털었다. 월경통 때문에 진통제를 지나치게 써, 신세 망친 여자가 드물지 않았다. 남자가 아편쟁이라면 괜찮았다. 여자만이 손가락질당했다. “아이를 낳을 몸으로 중독이 웬 말이냐!” 하며. 아픔에 미칠 지경이었지만 밀레나는 참기로 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포션을 마시지 못하고 진통제에 매달리자니 답답했다. 마력 중독이라고 들었다. 알디온 부부는 이에샤의 서신을 믿지 않았으나, 의사마저 보증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밀레나는 마법과 거리가 멀었다. 드레스룸과 마차와 연회장만 오락가락하는 귀공녀에게 마법은 무용했다. 마력에 중독될 여지가 없었다.

‘도대체 뭐 때문에 나한테 이래. 내가 뭘 어쨌다고.’

설움이 치밀었다. 사교계의 중심에 선 지 열 달도 되지 않았다. 자신이 누릴 명예가 수두룩한데, 몸이 말썽이었다. 모임에 나갈 수가 없었다. 춤을 추기는커녕 다과회에서 맞장구만 치기도 괴로웠다. 이러다가는 다져 놓은 발판이 무너져 버릴 터였다.

엘로나는 이에샤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말했다. 밀레나의 셈이 들어맞았다. 엘테르트와 이에샤가 공고해지기 전에,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어렵게 만든 기회였다. 날려 버려서는 곤란했다. 엘테르트에게 눈도장을 찍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하녀를 불러 치장할 상태가 못 되었다. 일어서기조차 힘들었다. 내일은 괜찮을 거야. 괜찮아질 거야. 밀레나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이를 악물었다.

‘오늘보다 더 아프더라도, 내일은 꼭 황궁으로 가야지. 할 수 있어.’

비단 이불에 얼굴을 박았다.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가려진 낯 밑으로 물기가 어룽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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