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수는 검 한 자루-127화 (127/164)

00127 10. 멈추지 않는 바퀴 =========================

(연참 1/3)

엘테르트는 다짐을 굳혔다. 잘되었는지도 몰랐다.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었으니까. 때를 재며 준비해 놓은 말도 있었다. 애버토스와 곧게 마주했다. 세기 시작한 머리카락이 눈에 밟혔다. 초로에 접어든 아버지와 부딪치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에샤가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을 때부터 고민해 왔다. 함께할 길, 이에샤가 바라는 것, 어떻게 하면 두 사람 모두 흡족할 수 있을지……. 엘테르트는 이에샤가 좋았다. 다듬어지지 않은 기개가. 명예를 얻고자 남을 돕는, 이기적인 이타심이. 눈을 빛내며 엘테르트의 꿈에 공감해 주는 순진함이. 검을 다루는 솜씨마저도. 괴로운 기억이 이에샤 앞에서는 날아갈 만큼 반해 버렸다.

이에샤는 엘테르트와 헤어지더라도 털어 낼 수 있으리라. 엘테르트는 이에샤를 잃고 견딜 자신이 없었다.

“아버님. 저는 헌신적인 아내를 필요로 한 적 없습니다. 제 앞가림쯤 제가 알아서 합니다. 아버님께서 그리 가르치셨으니까요.”

“배우자한테 전혀 기대지 않고 너 혼자 사회를 헤쳐 나가겠다고? 오만하구나.”

“아니요.”

고개를 설레설레했다. 이에샤가 행복해지려면 자기 힘으로 싸우고, 영광을 거머쥐어야만 했다. 엘테르트는 드물게 명예욕이 적은 귀족이었다. 만사가 평화롭게 어우러질 수 있으면 족했다. 남자로서의 지위와 권력과 기회를 이에샤에게 넘겨도 아쉽지 않았다. 이에샤가 만족하여 곁에 남아 준다면 엘테르트도 좋았다.

“제가 앨저 경한테 헌신할 겁니다.”

“……!”

“여인만 남편을 도우라는 법이 있습니까? 사내가 부인을 도와서는 안 되나요? 아버님, 전 앨저 경이 하고 싶은 일, 가지고 싶은 것 무엇 하나 포기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녀가 저 때문에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럼 너는! 엘테르트, 넌 여자 한 명 때문에 네 것을 죄 포기할 셈이냐?”

“왜 앨저 경을 돕는 일이 제 손실로 이어집니까.”

손깍지를 엮었다. 허벅지에 바르게 얹었다. 등허리를 곧추세웠다. 정신을 다잡으려면 자세부터 똑발라야 했다.

“하루라도 못 보면 숨이 막힐 만큼 그녀를 원하는데.”

“엘테르트, 얘야.”

“어느 쪽도 희생하지 않는 관계가 되겠다는 겁니다. 남의 시선에 완벽한 부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행복한 연인으로. 제발 제 뜻을 알아주십시오, 아버님.”

애버토스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대들고 맞서 오는 엘테르트가 낯설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머릿속에는 ‘그 여자는 안 된다.’ 하는 생각이 들어찼는데, 받아칠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말마따나 부부가 어느 한쪽만 받들지 않고 나란할 수 있다면 최선이리라. 하지만 애버토스는 그러한 내외간―또는 연인 사이―을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왜. 너는 왜 그렇게 항상, 이상만 좇는 게냐.”

“아버님께서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훨씬 약빠르고 세속적인 아이로 키울 걸 그랬다.”

엘테르트는 힘겹게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지쳐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에 가슴이 뜨끔거렸다. 후회하지는 않았다. 물러서서는 안 될 문제였으므로. ‘자식 이기는 부모란 없다’. 지금은 상투적인 말만이 희망이었다.

* * *

이에샤는 알리사가 “드셔 보세요.” 하고 내민 쿠키를 오도독하며 출근했다. 브링 탓으로 먹어도 배부르기 어려운 몸이었다. 군것질은 대환영이었다. 역마차를 탄 동안 손바닥 두 개만 한 봉투가 비었다. 종이봉투를 접고 접었다. 엄지가락 크기로 만들며 걸었다. 석곡궁 지붕에 아침 해가 걸린 채였다. 건물로 접어들었다. 코트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일주일 전에 치른 회의에서 미엘라가 말한 대로, 에브라힐 남쪽에서 딜란 렌디드의 유작(遺作) 다섯 개가 발견되었다. 마력 오염 사건도 잦아들었다. 루시온은 크게 기뻐했다. 미엘라에게 훈장이 내려질지도 모른다며 웃었다.

그럼 이제 마파랑은 걱정할 필요 없습니까? 이에샤가 물어보자 루시온은 침울해졌다. 무심코 던진 물음이건만, 속을 쓰리게 한 모양이었다. 엘먼은 숨었던 촉매가 공기 중의 마력을 들쑤셔 놓았다고 했다. 늦든지 빠르든지, 한두해 안으로 마파랑은 벌어질 것이었다. 에브라힐 궁전이 진원지가 되어서.

싱숭생숭했다. 마파랑이라니. 끔찍한 재앙이라는 것 말고는 아는 바가 없었다. 관련 자료를 읽어 보았으나, 해마다 형태와 규모가 천차만별이었다. 감이 잡히지 않았다. 브링어가 마파랑 진압의 주축이 된다고 했다. 스무 살도 안 된 이에샤로서는 망연스러웠다.

‘세비…….’

셈브리온은 다른 왕국에서 일어난 마파랑을 진압했었다고 했다. 헤어지기 전에 캐물어 볼 것을 그랬다. 셈브리온을 떠올리자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걷잡을 새가 없었다. 보고 싶었다. 손잡고 싶었다. 품에 파고들어서 어리광 피웠으면 했다. 언제쯤 돌아올까? 정말로 돌아와 줄까? 조마조마했다.

고개를 털었다. 셈브리온 한 사람에 쏠린 의식이 어른스러워지도록, 다듬겠다고 마음먹지 않았는가. 노력해야 할 성싶었다.

사무실에 다다랐다. 문고리를 비틀려다가, 멈칫했다. 안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어리둥절했다. 미엘라나 네세라가 오전 업무를 가져오기에는 일렀다. 시더가 청소 중인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문을 밀어 열었다.

“멘델린 경?”

“아, 앨저 경. 왔습니까.”

엘테르트가 사무실 가운데에서 서성이던 중이었다. 이에샤를 보고 반색했다. 문가로 다가왔다. 양손으로 이에샤의 뺨을 감쌌다. 겨울바람에 맞아 얼어붙은 살갗을, 더운 손으로 문질러 주었다. 이에샤가 반사적으로 코를 훌쩍였다. 엘테르트는 발그레한 콧등을 사랑스럽게 들여다보았다.

“저기, 경? 왜 제 사무실에 계세요? 아침부터.”

“보고 싶어서요.”

엘테르트의 답은 산뜻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앨저 경이 너무 보고 싶어서, 새벽에 왔습니다.”

“어, 음. 새벽에요?”

“앨저 경은 내가 보고 싶지 않았습니까?”

이에샤는 도리질만 쳤다. 바빠서 하루에 한 시간도 보지 못하는 연인이었다. 그립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엘테르트가 웃었다. 꽃송이가 벌어지듯이, 활짝.  밝고 아름다워서 도리어 부자연스러웠다. 이에샤는 당황했다. 엘테르트의 손목을 붙들었다. 제 얼굴에서 떼어 놓았다. 미심쩍은 눈길로 엘테르트를 살펴보았다.

“왜 그래요?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아뇨.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냥, 안 하던 행동을 하시니까.”

엘테르트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에샤와 눈을 마주쳤다. 시선이 근질근질하게 얽혀 들었다. 이에샤가 부끄러워졌을 무렵이었다. 엘테르트가 툭, 뱉듯이 말했다.

“부모님이랑 싸웠습니다.”

“네?”

“특히 어머님이랑 크게 싸워서, 속상합니다. 앨저 경으로 위안하고 싶었습니다.”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뜻밖의 이야기였다. 이에샤는 헛숨을 터뜨렸다. 엘테르트는 두드러지게 시무룩했다. 멘델린 부부와 큰일을 치른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이에샤가 엘테르트의 뺨을 어루만졌다. 희고―저보다도―보드라운 살결이 파르르했다. 엘테르트는 이목구비를 떨며 괴로워했다.

“무슨 일이길래 그래요? 어머니랑 왜 싸우셨는데요?”

“그냥요.”

“그냥 싸워 놓고 왜 울려고 해요? 거짓말 마세요.”

“정말입니다. 그냥 서로 의견이 안 맞아서, 아버님하고는 그래도 잘 이야기했는데 어머님은 절대 안 된다고 하셔서. 싸우다 보니 동이 트더이다. 성에 있기는 싫고 앨저 경은 보고 싶어서 무작정 뛰쳐나왔지요.”

엘테르트는 “하하.” 하고 싱거운 웃음소리를 냈다. 지난밤부터 새벽까지를 돌이켰다. 애버토스는 엉성하게 물러섰다. 반대는 그만두었다. 받아들여 주지도 않았다. 엘로나만 안달이 났다. 눈초리를 세우고 달려들었다. 당장에 끝내거라, 화내기도 했고 애원하기도 했다. 그 아가씨는 안 된다고만 되뇌었다. 이에샤를 깔아뭉개는 말은 오가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태도만으로도 엘테르트는 상처받았다. 피곤했다. 몇 시간이나 ‘너와 이에샤는 안 된다.’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진이 쭉 빠졌다.

이에샤는 갈팡질팡했다. 고민스러웠다. 엘테르트를 북돋워 주고 싶어도, 이에샤에게는 멀쩡한 부모가 없었다. 부모 자식 간에 싸웠을 때 어찌해야 하는지 몰랐다.

“멘델린 경. 저기, 아!”

말끝을 잇지 못했다. 엘테르트가 이에샤를 부둥켜안았다. 날씬한 몸은 한 품에 들어왔다. 이에샤는 고개만 움직거렸다. 엘테르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셈브리온과 검을 부딪쳐 온 이에샤에게, 엘테르트의 팔심은 하잘것없었다. 하나 뿌리치지 않았다. 격려조차 할 줄 모르는 저였다. 엘테르트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긴 손가락이 이에샤의 등뼈를 훑으며 내려갔다. 이에샤는 흠칫 놀랐다.

“멘델린 경! 여기서는 좀. 부하들이 올지 몰라요. 이러는 거 보이면 안 되잖아요.”

“앨저 경.”

“네?”

“나는 세상 사람 모두가 우리 사이를 알고, 우리가 무슨 짓까지 하는지도 알면 좋겠습니다.”

이에샤의 낯빛이 얼어붙었다. 엘테르트가 무엇을 바라는지 닿아 왔으므로. 들러붙고 비비는 꼴을 들킨다면, 혼삿말이 다 오갔노라 떠드는 셈이었다. 이에샤가 엘테르트의 가슴팍을 밀었다. 엘테르트는 버티지 않고 떨어져 나갔다.

“기다려 주기로 했잖아요.”

“예, 그랬죠.”

“나라면 당신 서른 살도 되기 전에 해낼 수 있을 거라면서요. 왜 갑자기 이래요?”

물음에 가시가 돋쳤다.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멘델린 부부의 반대를 알리면 이에샤가 상처받을 것 같았고, 알리지 않자니 믿음을 잃어버릴 성싶었다. 먹먹했다. 숨통이 옥조이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치정극의 주인공처럼 우리 도망갑시다, 할 수 있다면 좋을 터였다. 이에샤는 황궁에 남아야만 했다. 기사로서 이름을 날리기 위하여.

엘테르트는 또다시 생각했다. 저는 이에샤밖에는 사랑할 자신이 없었다. 반면에 이에샤는 꿈과 미래를 고르고, 엘테르트를 쳐낼 여인이었다. 애가 달았다.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샤에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미안합니다. 내가 잠시 흥분해서,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멘델린 경.”

“오늘 같은 일은 다시 없을 겁니다.”

“당신 혹시 나 때문에 공작 부부와 다퉜나요?”

이에샤의 잽싼 눈치가 원망스러워졌다. 짙푸른 눈동자에 괴로워하는 남자가 담겼다. 엘테르트는 하룻밤 사이에 초췌해졌을 몰골을 걱정했다. 윗사람의 낌새가 우중충하면 아랫사람도 고달픈 법이었다.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에샤는 침착하게 물어보았다.

“제 뭐가 문제였죠?”

“……당신이.”

“네. 제가.”

“나를 잘 내조할 수 없는 여자라서, 우린 안 된다고.”

대답하는 소리가 가냘팠다. 이맛살을 찌푸렸다. 엘테르트가 죄라도 지은 양, 고개를 떨구었다. 이에샤는 “으음.” 하고 침음했다. 골치가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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