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6 10. 멈추지 않는 바퀴 =========================
엘로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이 달아난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밀레나가 엘테르트의 짝으로 물망에 오르기는 했지만, 엘로나와 사사로운 친분은 없었다. 다른 후보감들은 사교계에서의 인기가 달릴지언정, 집안이 쟁쟁했다. 출생도 떳떳했다. 엘로나는 밀레나를 ‘아들이 한 번 무도회 파트너로 삼았던 영애’쯤으로 보았다. 오늘의 만남을 받아들인 까닭도 가벼운 변덕이었다. 다짜고짜 남자가 싫다고 털어놓을 사이가 못 되었다.
“영애가 남자를 싫어하는 거랑 나한테 하고 싶다는 부탁이 무슨 상관일까요?”
“미리 사죄드릴게요. 고귀한 피를 타고나신 분과 제까짓 계집애를 감히 같은 선 위에 두려는 게 아니에요. 다만 레이디 엘로나, 레이디께서는 남성에게 혐오감을 느껴 본 적이 없으신가요?”
밀레나는 조곤조곤 늘어놓았다. 여러 가지 기억이 다발적으로 되살아났다. 가슴이 파인 드레스를 입은 날, 인사하면서 눈동자를 아래로 굴리던 남자. 발코니로 나가자 따라 들어와 문을 잠그던 남자. 밀레나의 배와 엉덩이를 훑어보며 “풍만하고 아름다우시니 나중에 건강한 아들을 보겠군요.” 하고 지껄이던 남자. 구두 굽 때문에 비틀거리자 부축하는 척 어깨와 허리를 끌어안던 남자……. 밀레나는 술기운이 돌 때조차 걸음새에 흔들림이 없도록 용써야 했다.
남자. 남자. 남자! 지긋지긋했다.
남자를 쥐락펴락하는 짓은 재미있었다. 그동안 당한 희롱들을 갚아 주고 싶다는 마음에서 우러난 흥이었다. 사로잡아 놓은 다음 “만나서 즐거웠어요. 안녕히.” 하고 몸을 돌렸을 때, 터져 나오는 한숨은 밀레나의 조그만 복수였다. 그 복수에는 과정으로 남자에게 아양을 떨었다는 자괴감이 뒤따랐다. 이에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은 웃음을 팔아먹어 버티는 처지였다.
그렇기에 엘테르트가 필요했다. 엘테르트 앞에서는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웃음이 나왔다. 감정을 죽이고, 껍데기를 가꾸지 않아도 되었다. 엘테르트와 대화할 때는 편안하게 아름다울 수 있었다. 멘델린 공작가의 그늘도 탐났다. 남의 눈치를 볼 필요조차 없게 만들어 줄 테니.
엘로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요람에 누웠을 적부터 그이―공작님을 알았어요. 나와 공작님은 철들기도 전에 우리가 함께할 운명임을 깨달았고, 누구도 나를 넘보지 못했죠. 남성을 꺼릴 만한 불미스러운 일은 내게 없었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점이,”
밀레나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엘로나는 밀레나가 포식자처럼 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저한테는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으리라고 알아차리고 대답하시는 점이, 레이디께서 제게 공감하신다는 반증 아닐까요.”
“…….”
“레이디 엘로나. 절 좀 도와주세요.”
엘로나는 밀레나가 이야기하는 바를 꿰뚫었다. 왜 모르겠는가? 선황제의 외딸이자 황제가 졸졸 따랐던 누나인 저마저 무도회에 나가면, 지저분한 욕망이 깃든 눈길에 시달렸다. 사생아였던 밀레나라면 더할 터였다. 밀레나가 무엇을 바라는지도 들여다보였다.
“내 아들을 원해요?”
“누구보다도 간절히.”
“영애의 언니를 쳐내고 에르디의 원망을 사더라도 무릅쓸 만큼?”
“제 잘난 언니는 남자한테 웃음 팔아먹지 않고도 살 수 있노라 당당하게 말한 사람이고, 엘테르트 님은 천성이 다정하시죠. 미움을 오래 끌고 가실 만한 분이 못 돼요.”
엘로나는 등받이에서 몸을 떼었다. 허리를 곧추세웠다. 우중충한 낯빛을 띠었다. 밀레나 알디온은 자신과 놀라우리만큼 닮았다. 동시에, 연인이 자연스럽게 배우자가 된 자신과 정반대이기도 했다. 마음이 복잡했다. 다리에 힘을 주었다. 밀레나는 따라 일어서지 않았다. 눈으로만 엘로나를 좇았다. 엘로나는 밀레나를 안타깝게 내려다보았다.
“유감이지만 내가 영애 편에 서서 에르디와 다리를 놓아 줄 일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레이디께서는 방금 저를 이해하셨죠. 어쩌면 연민하셨을지도 모르고요.”
“……그래요. 영애가 며느릿감으로서 내 마음에 들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진 않겠어요.”
밀레나는 모자람 없는 아가씨였다. 아름답고 어질었으며―오늘은 뜻밖의 면모를 보였지만―노력가였다. 출생의 굴레도 뛰어넘고 사교계를 휘어잡았다. 집안의 권세도 괜찮았다. 부모의 됨됨이만 아니었다면 아무런 빈틈도 없는 신붓감이었으리라.
“에르디를 설득하는 건 영애 스스로 하세요. 그리고.”
엘로나는 ‘매혹’이 아니라 ‘설득’이라고 말했다. 엘테르트는 제 아들이었다. 누구보다 잘 알았다. 여자를 만나라, 만나라 들볶아도 모르쇠 잡지 않았던가. 연인이 생겼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릴 턱이 없었다. 밀레나는 오늘 자신에게 한 것처럼 엘테르트의 마음이 아니라, 생각을 움직여야 했다.
엘로나의 머릿속에 누군가가 그려졌다. 회색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여인. 한숨이 넘쳐흘렀다.
“적어도 멘델린이 영애의 언니를 식구로 받아들이는 일 또한 없을 거예요.”
엘테르트는 퇴궐하자마자, 푸른 사자 성의 4층으로 올라갔다. 애버토스의 응접실로 향했다. 집사가 코트를 받아 들며 소곤거린 까닭이었다. 도련님, 각하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엘테르트는 고개를 기울였다. 애버토스는 엘테르트가 정무에 익었을 무렵부터 거리를 두었다. 찾거나 부르는 일이 드물어졌다. 새끼를 독립시키는 짐승처럼. 엘테르트도 섭섭하지 않게 받아들였다. 애버토스는 아버지이기 이전에 멘델린 공작이었다. 저는 후계자였고. 평범한 부자지간 같을 수는 없었다.
응접실로 들어섰다. 따뜻한 공기가 끼쳐 왔다. 타닥타닥! 벽난로에서 불씨가 튀었다. 애버토스가 부지깽이로 장작을 뒤적거렸다. 엘테르트는 멈칫했다. 아버지가 그런 일을 하니 기분이 묘했다. 애버토스는 추위에 강했다. 망토만으로 되었다고 여겼다가, 뒤늦게 엘테르트를 떠올린 것이 틀림없었다.
“아버님. 지금 돌아왔습니다.”
“……빠르구나. 밤늦게야 올 줄 알았다.”
“예. 부끄럽지만 시간이 늦을수록 추워져서 일찍 퇴궐했습니다.”
“그런 점은 엘로나 님을 닮지 않길 바랐는데. 나도, 엘로나 님도.”
엘테르트는 계면쩍게 웃었다. 저는 이오르가 “꼭 누님 홀로 낳은 자식 같도다.” 하고 농할 만큼 엘로나를 빼다 박았다. 입맛이나 체질마저 비슷했다. 엘로나는 속상해했다. 십여 년 전까지는 당신을 닮은 아이도 가지고 싶다, 졸랐으나 애버토스가―부드럽게―물리쳤다. 엘로나가 엘테르트를 배었을 적에 크게 고달파했기 때문이었다. 아들을 낳는다면 후계 문제로 두 아이가 다칠까 봐 걱정한 탓도 있었다.
애버토스가 의자에 앉았다. 엘테르트도 애버토스의 왼쪽, 비스듬한 자리를 골랐다. 투명도 높은 벽안이 불그림자에 군청색으로 물들었다. 엘테르트는 까닭 모르게 불안해졌다.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자 불려온 것은 아닌 성싶었다. 애버토스가 무거운 목소리로 “엘테르트.” 하고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아버님.”
“네가 백화 기사단장이랑 깊은 사이라는 게 사실이더냐.”
엘테르트는 눈을 끔뻑했다. 말을 잊어버렸다. 무슨 물음을 받았는지, 곧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천천히 머리가 굴러갔다. 무릎을 꽉 움켰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어디서 그런 말을 들으셨습니까? 대체 누구한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애버토스는 얼버무리기를 싫어하는 성미였다. 대답을 피한다면 이유는 정해졌다. 엘테르트는 답지 않게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어머님이 사람이라도 붙이셨습니까?”
“엘테르트.”
“그래서 제가 그녀랑 함께 있는 모습이라도, 전해 들으셨답니까?”
“엘로나 님이 그러실 분이 아니라는 거 알지 않느냐. 어리석게 굴지 마라. 우연히 들으셨을 뿐이다.”
애버토스가 옳았다. 엘로나는 아들에게 뒷조사를 붙일 정도로 품위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결혼을 다그치기는 했지만, 억지로 일을 진행하지는 않았다. 성년을 넘기도록 기다려 주었다. 엘테르트는 숨을 몰아쉬었다. 흥분을 누르기 어려웠다.
“죄송합니다. 못난 모습을 보여 드렸습니다.”
“알면 됐다. 네 반응을 보니 헛소문은 아닌 모양이구나.”
“…….”
“헛소문이기를 바랐건만.”
괴롭게 마른세수했다. 이리될 줄 알았다. 어찌 사랑하는 부모에게, 사랑하는 여자를 소개하고 싶지 않겠는가. 이에샤가 미움을 살까 봐 두려웠다. 차근차근히 설득해 갈 셈이었다. 두 무릎 꿇고 빌 각오도 세웠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들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여인입니다.”
“사랑만 하거라. 아내로 맞아들이겠다는 소리는, 알겠지, 들어줄 수 없다는 거.”
“아버님.”
“네가 딸이었다면 성안에 가둬서라도 고집을 꺾었을 거다. 다행히도 사내애구나. 결혼 전에 스쳐 간 여자 하나쯤 있다고 문제되지는 않을 테지. 그러니 사랑만 하거라.”
“아버님!”
비명처럼 부르짖었다. 애버토스는 주춤했다. 아들이 이토록 화내는 모습은 본 적 없었다. 큰소리를 내는 데 익숙지 못한 엘테르트는 목을 쥐고 헐떡거렸다. 애버토스는 가라앉은 눈길로 엘테르트를 보았다. 속이 뒤숭숭했다. 엘테르트에게 모진 소리를 늘어놓기는 처음 같았다. 그는 엘테르트가 한 번도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던 덕분이었다.
“넌 나와 엘로나 님이―우리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아들이다. 우리는 네가 아무런 결함도 없는 여자를 짝으로 얻길 바란다.”
“앨저 경한테 결함이 있다고요?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아버님께서 그녀를 얼마나 보셨다고.”
애버토스는 입을 다물었다. 이에샤는 생기롭고 매력적인 아가씨였다. 백화 기사단을 훌륭하게 이끈다고 들었다. 신년맞이 무도회에서 벌어질 뻔한 참사를 막아 냈고, 이실리아 황후의 생명을 구했다. 제국에 열네 명뿐인―글렘이 죽었으므로―브링어이기도 했다.
무엇 하나 ‘안주인’으로서는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결함이란 사람한테 생기는 게 아니다. 뭇사람의 눈에 씌워지는 게 결함이다.”
“멘델린이 남의 시선을 두려워할 만한 이름입니까?”
“멘델린이기에 두렵다.”
맹세컨대 엘테르트는 심장을 뽑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아들이었다. 거리를 두더라도 귀여웠고 사랑했다. 엘테르트에게 제 모두를 바칠 수 있는 배우자가 생겼으면 했다. 하지만 이에샤 앨저의 삶은 지나치게 치열했다. 엘테르트만을 위할 수 있는 여인이 아니었다. 애버토스는 한 번뿐인 만남에서 알아보았다.
“멘델린의 인상은 완벽해야 한다. 가장 고귀한 피의 하나뿐인 충신으로서.”
“어째서 앨저 경이 그 인상을 해친다고만 생각하십니까?”
“너야말로 틀을 깨는 자는 완벽할 수 없다는 걸 왜 모르느냐? 그녀는 물론 의미 있는 사람이지.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노력을 살아생전에 인정받을 수는 없을 게다. 멘델린의 일원으로서 사랑받고 존경받을 수가 없는 여자야.”
엘테르트는 입술을 악물었다. 애버토스의 말대로였다. 이에샤는 사랑보다 질시(疾視)받았고, 존경보다 외면받았다. 현숙한 귀부인이 되기에는 거칠었다. 멘델린 공작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 모진 삶이야말로 엘테르트의 마음을 잡아끌었다. 부딪치고 깨지며 나아가는 모습에 사로잡혔다. 애버토스는 상상조차 못 하리라. 이에샤와 엘테르트의 사이에서 핵심은 어느 쪽인지. 누가 고삐를 쥐었는지.
“앨저 경이 제 반려로서 사람들에게 어찌 보일지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엘테르트!”
“제가 앨저 경의 반려로서 무얼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죠.”
============================ 작품 후기 ============================
* 예약 등록한 글입니다.
휴양하러 섬 여행을 계획하게 되어서, 떠나기 전에 밀레나 이야기를 진전시켜 놓고 갑니다. 이번 챕터는 아직 한참 남아서 마음이 조급하네요.
맨날 쉰다고 해 놓고 어영부영 써 올렸는데 이번엔 진짜 쉬니 걱정 마세요:D 트위터 @kipapa22 에 이따금 근황 전하겠습니다.
batkong 님, 아띠미리 님 후원 쿠폰 감사합니다!
+) 오전 9시, 내용을 조금 가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