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4 10. 멈추지 않는 바퀴 =========================
미엘라는 안절부절못했다. 자신이 본궁 회의실에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다. 괜스레 코트 섶을 만지작거렸다. 이에샤는 미엘라를 안쓰럽게 보았다. 연초까지 말단 하녀로 일했던 소녀가 높은 양반이 우글우글한 자리에 끼었으니, 얼어붙을 만도 했다. 루시온에게 고개를 끄떡했다. 양해를 구했다. 의자에서 일어났다. 미엘라에게 다가갔다.
“애, 애, 앨저 경. 저는 어디에 앉아야 하나요? 아니, 앉아도 되나요? 서 있는 게 낫지 않을까요?”
“경이 아직도 하녀인 줄 알아? 이리 와.”
직사각형 모양의 테이블에서, 짧은 변 한쪽은 루시온과 엘먼이 차지했다. 맞은편이 이에샤와 부관의 몫이었다. 이에샤는 부드럽게 미엘라를 에스코트했다. 의자를 빼 주었다. 앉는 모습을 보고 저도 엉덩이를 내렸다.
미엘라는 눈알을 되록되록 굴렸다. 참석자들의 낯을 살폈다. 기사단장은 모두―대화한 적은 없어도―아는 얼굴이었다. 저마다 오른편에 부관을 낀 채였다. 총무대신도 망초궁에 들렀을 때 몇 번 보았다. 황태자와 멘델린 소공작은 익숙했고, 루시온 옆자리의 노인은 초면이었다. 그 밖에도 낯선 이가 두 명 있었다. 미엘라의 머리가 빠르게 굴렀다. 사건의 종류―마력 오염 사태―로 미루어 부의장은 황실 마법사이리라. 나이를 따지면 마법장이 틀림없었다. 엘먼 가까이의 남자는 서른 살도 안 되어 보였다. 이러한 자리에 끼기에는 일렀다. 마찬가지로 특수한 관리인 마법사일 성싶었다. 나머지 한 사람은 꼼꼼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사망자가 생겼다고 들었다. 의료원에서 검시관이 나왔을 터였다.
생각을 마쳤다. 미엘라는 귀족을 무서워하기는 해도, 소극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제 두뇌와 판단력에 자부심을 품었다. 이번에도 파악한 바가 맞으리라 믿었다. 실지로 정확하게 들어맞혔기도 했다.
총무대신이 눈을 번뜩였다. 화풀이할 상대가 필요하던 차였다. 바짝 졸아든 어린 계집이 들어왔으니, 잘되었다. 총무부에 찾아와서 자기 부하들에게 쩔쩔매던 백화 기사가 아닌가. 혀끝으로 입술을 축였다. 목을 가다듬었다. 위엄 있는 목소리를 꾸며 냈다.
“백화 기사단은 황태자 전하의 권위가 우스운가? 회의 시작이 언제였는데 기사단장의 부관이라는 자가 어찌 이리 늦어? 벌써 안건 하나가 지나갔다.”
미엘라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꾸지람당한 까닭을 알 수 없었다. 한 부처의 수장에게 맞서기는 겁났으나, 제 곁에도 이에샤가 있었다. 기사단장이 대신보다 한 급수 낮다고 해도 괜찮았다. 이에샤는 책임감을 갖춘 상관이었다. 부하가 부당한 일을 당하도록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지켜 줄 것이었다.
“저, 제가 회의 도중에 끼어들어 흐름을 끊은 점은 정말 죄송합니다. 하오나 크로프트 공, 백화 기사단은 줄곧 인력난에 시달려 왔습니다. 평기사 한 사람 한 사람이 단장 부관의 업무를 나누어 수행해야만 해서, 인사국에서 지정한 정식 자리가 빈 채예요. 참석할 사람이 명확치 않다 보니 명령을 전달한 총무부와 의견을 조율하느라 지각했습니다. 저희 기사단에서는 만장일치로 저 올센을 내세웠는데……, 총무부에서는 황태자 전하께서 여시는 회의에 준귀족의 참석은 적절치 않다며 페리튼 자작 영애를 보내도록 버텨서요. 그런 충돌이 있었습니다. 대신께서는 저, 그게, 총무부의 월권 행위를 지탄함이 옳으시지 않을까 하는데요.”
미엘라의 입에서 반박이 터져 나왔다. 총무대신은 할 말을 잊어버렸다. 자기네 부하 때문에 늦었다는데, 물고 늘어질 수는 없었다. “허참!” 하고 헛숨만 터뜨려 댔다. 이에샤가 탁상 아래로 미엘라의 옆구리를 찔렀다. 미엘라는 흠칫했다. 조마조마하게 이에샤를 보았다. 이에샤는 엄지손을 치켰다. 미엘라의 낯빛이 환해졌다.
짝짝짝! 손뼉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아주 똑 부러지는 부하를 두셨군요, 앨저 경! 마치 스승님과 저를 보는 것 같습니다.”
마르셀은 황태자를 앞에 두고도, 머릿속에 꽃밭이 펼쳐진 사람처럼 굴었다. 어찌 보면 굉장했다. 이에샤는 질린 눈빛을 띠었다. 엘먼의 입매가 부들거렸다. 펜으로 마르셀의 정수리를 찍어 버리고 싶다는 모습이었다. 마르셀에게 엘먼 쪽으로 눈짓해 보였다. 입을 벙긋거렸다. 분위기 파악 좀 해. 이에샤의 소리 없는 충고를 무어라 받아들였는지, 마르셀이 찡긋 윙크했다. 속이 터졌다.
“조용! 올 사람도 다 왔으니 정말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지. 이번 마력 오염 사태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엘먼 공.”
“예, 전하. 우선 모드리스 경 일입니다. 그가 죽기 전 제 제자들이 현장에 도착해서, 적게나마 변이 마력의 표본을 채취할 수 있었습니다. 만들어 둔 약을 다 써 버려서 시독(屍毒)은 막을 수 없었지만,”
엘먼이 마르셀을 째려보았다. 마르셀이 리오르 영식의 시신을 추스르지 못해, 비싼 약이 날아간 일을 탓하는 모양이었다.
“전화위복이라고 하지요. 모드리스 경을 오염시킨 마력이 현장 공기에 남아서 추가적인 연구가 가능할 성싶습니다.”
“이변의 원인은 아직도 깜깜하오?”
“예. 부끄럽지만 현자로서의 지식을 동원하고도 황궁에서만 일이 벌어지는 까닭은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벌해 주소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시는군. 공이 모르는 일이라면 그 어떤 마법사도 알아낼 수 없지.”
루시온이 투덜거렸다. 엘먼은 흐릿하게 웃었다. 제 수염을 잡아당기며 놀던 황태자가 장성해서 중신 회의를 이끄니―때에 어울리지 않게―흐뭇함이 피어올랐다. 루시온은 무사히 제위를 이어받아야만 했다. 델페레타의 광영이 깨지지 않도록, 마파랑 같은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었다. 인간의 힘으로 자연재해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하나 마파랑은 대비가 가능한 재해였다. 마법부를 지휘하여 마력 변이 방지 마법진을 설치하고, 대피 체제를 세워서 이번 위험도 이겨 내리라.
하지만 에브라힐 궁전에서만 마력에 오염되는 사람이, 두 명도 많을진대 다섯 명이나 생긴 까닭만은 알 수 없었다. 마파랑의 조짐이 맞는지조차 헛갈렸다. 무언가를 놓친 듯하다는 생각이 가시지 않았다.
마르셀이 오른손을 들었다.
“시기적으로 마파랑이 터질 때가 되긴 했습니다만, 형세가 영 괴상하지 않습니까? 외부 요인도 의심해 봐야 하지 싶습니다.”
“마르, 아니, 오티스 경. 내 방금 그 요인을 못 찾았다고 말했네만.”
“스승님, 저희 그동안 황궁 내 자연물만 살펴봤잖습니까. 혹시 인위적인 소행일 수도…….”
“오티스 경!”
엘먼이 성을 냈다. 마르셀의 주장은 화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마법사가 사람들을 오염시킨다니. 원칙에 어긋났다. 마법의 원칙은 마법사의 자존심과 같았다. ‘지혜와 지식을 인간에게 이롭게만 쓰고, 삿된 싸움은 멀리하겠다.’ 하는, 양심과 긍지를 건 맹세. 어기는 마법사가 없지는 않았다. 변절자를 엄격하게 배척함으로써 마법학계는 굴러왔다.
델페레타 제국의 궁전에 변절한 마법사가 있다? 황실 마법장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차고도 넘쳤다.
“하하! 너무 열내지 마십쇼, 스승님. 쓰러지십니다. 세상에 미친놈―아이고, 죄송합니다, 전하. 이상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원칙을 또박또박 지키고 살겠습니까? 그러시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니까요?”
“그게 지금 마법사로서 할 소린가!”
“마법사는 뭐 사람 아닙니까.”
이에샤는 ‘그럴싸하잖아?’ 하고 생각했다. 일흔일곱 살의 마법사인 엘먼에게는 맹랑한 의심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뭇사람이 듣기에는 일리 있었다. 어느 마법사가 역심을 품고, 황궁에 장난질을 거는 것이라면? 선례도 있지 않은가. 딜란 렌디드 자작.
나머지 참석자도 동감하는 모양이었다. 엘먼은 노여움을 숨기지 못했다. 마르셀은 스승의 속을 들쑤신 일이 뿌듯한지, 어깨를 으쓱했다. 저놈도 참 난놈이야. 이에샤는 실없이 감탄했다.
눈치만 보던 미엘라가 손을 들었다. 마르셀의 행동으로 미루어, 중회의실에서 발언하려면 이리해야 하는 듯했다. 맞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뺨이 달아올랐다. 루시온이 뜻밖이라는 눈길로 미엘라를 보았다.
“발언해 보도록. 올센 경.”
“가, 감사하옵니다. 저, 여러분, 다들 올 1월 25일―신년맞이 무도회를 기억하시는지요?”
“잊었을 리가 없지. 그렇게 화끈하게 말아먹은 무도회는 흔치 않으니까.”
미엘라는 어설프게 입꼬리만 끌어 올렸다. 살 떨리는 우스갯소리였다.
“그때 전 서향궁에서 바르벨로샤 공주님의 하녀로 있었습니다. 그날도 수레국화궁이 아니라 황자 저하와 공주님이 여시는 소년 영년 파티 쪽을 맡았는데, 늦저녁에 마법부 관리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때는 왜인지 이유를 몰랐지만요.”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얘기를 그따위로 지리멸렬하게밖에는 못 하는가?”
“죄, 죄송합니다! 최근 제 개인적인 흥미로 황실 법정의 753년 상반기 판례집을 빌려 읽었습니다. 렌디드 자작 일도 실려 있었어요. 일은 수레국화궁에서 벌어졌는데, 버들궁까지 사람이 온 연유를 마법장님께 여쭤도 되겠습니까?”
총무대신이 도중에 윽박질렀다. 미엘라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엘먼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엘먼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설명했다.
“그거야 렌디드가 수레국화궁만이 아니라 버들궁이랑 유채궁에도 촉매를 설치해 놔서……, 가만?”
“아까 석곡궁에 찾아오신 총무부 관리께 들었습니다. 다섯 건의 마력 오염 사건은 전부 망초궁, 부용궁, 제3 하인 기숙사에서 벌어졌다지요? 에브라힐 남쪽에 몰려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수레국화궁, 버들궁, 유채궁은 북쪽 별궁들이죠.”
“자네의 결론을 어서 말해 보게.”
“에브라힐은 넓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에샤는 미엘라의 뜻을 읽지 못했다. 엘테르트와 엘먼의 낯빛이 바뀌었다. 미엘라가 무언가 중요한 점을 짚어 냈음은 틀림없었다. 생각에 잠겨 들었다. 차근차근히 따져 보았다. 렌디드 자작이 마파랑을 일으키겠다며 촉매를 둔 별궁은 북쪽. 마력 오염 사태가 벌어진 곳은 남쪽 별궁들. 에브라힐은 넓다……. 중얼거림이 튀어나왔다.
“폭발물을 이중으로 설치했다?”
“물론 수레국화궁을 중심으로 탐색을 펼쳤으니 남단에 있는 하인 기숙사까지는 못 닿았네. 비용도 무진장 깨졌을 거고, 렌디드의 자백에도 촉매를 더 숨겼단 소리는 없었으니까.”
“저는 1월 25일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버들궁에 오신 관리께서 하시는 말을 우연히 들었습니다. ‘보아 하니 이 촉매, 열 달쯤 가겠어’. 틀림없이 이리 말씀하셨습니다.”
============================ 작품 후기 ============================
Q. 밀레나는 마력에 오염된 게 아닌가요?
밀레나는 오염이 아니라 중독되었습니다.
마법에 과하게 노출돼서 몸에 쌓인 마력이 건강을 망친다=중독
마력의 돌연변이에 휘말려서 이성 없는 괴물이 된다=오염
마력 오염 현상이 개인이 아니라 국지적으로 벌어지면 마파랑입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