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3 10. 멈추지 않는 바퀴 =========================
본궁에는 크고 작은 회의실이 있었다. 2층 복도를 서너 분쯤 걸어가면 쌍여닫이가 나타났다. 문짝은 떡갈나무로 짰고, 검게 칠하여 나뭇진을 발랐다. 포도나무가 자란 덩굴시렁을 양각했다. 중(中)회의실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안에는 삼십여 개의 의석이 갖추어졌다. 제국 기사단장과 그 부관, 몇몇 중신이 모이기에 알맞았다. 중요한 일을 논해야 하나 총회의실(의결권을 지닌 모든 귀족을 수용할 수 있는 회의실)을 열기는 무엇할 때 쓰이는 방이었다.
의장석에는 황태자가 앉았다. 예술품처럼 미끈한 얼굴이 굳어진 채였다. 짓궂은 웃음이 머무르던 평소와는 딴판이었다. 황태자 곁은 멘델린 소공작이 지키고는 했으나, 오늘의 부의장은 프리드 엘먼이었다. 엘먼은 루시온을 곁눈질했다. 눈알을 굴려 엘테르트도 보았다. 저는 두 청년이 갓난아이일 적부터 황궁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같이 노여워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백화 기사단장이 두 남자의 총애를 받는다는 소문은 유명했으니까. 엘먼이 느끼기에도 루시온과 엘테르트가 이에샤에게 보내는 호의는 보통이 아니었다.
정작 이에샤의 낯빛은 찌뿌둥했다. 이에샤는 루시온과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회의실의 공기가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제3 기사단장 마력 오염 사건의 중요 참고인으로 참석했지만, 누구도 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루시온과 엘테르트의 눈치만 살필 따름이었다. 짜증이 났다. 화내야 할 사람은 이에샤였다. 마력 오염에 관한 공문을 빼먹은 총무부와 글렘의 폭주를 내버려 둔 제국 기사단에 책임을 묻는 사람도 이에샤여야 했다. 지체 높은 남자들의 애정에서 비롯한 분노가 아니어도, 이에샤에게는 범행자를 나무랄 권리가 있었다.
‘막말로 자기네가 당한 일도 아니면서 왜들 저런담.’
속으로 투덜거렸다. 글렘과 싸우다가―공중제비를 넘을 때―긁힌 손바닥을 만지작거렸다. 아프지는 않았다. 손 가득 박인 굳은살 덕분이었다.
고요했다. 누구 하나 말문을 트지 못했다. 이에샤가 따분해서 미간을 찡그렸을 즈음, 루시온의 입이 떨어졌다.
“에버렛 경.”
“……예, 전하.”
“변명해 봐라.”
체사로는 묵묵했다. 근위 기사단은 여섯 제국 기사단 가운데 으뜸이었다. 그 우두머리인 체사로는 제국 기사의 꼭대기였다. 루시온은 아랫사람을 다스리지 못했다고 힐난하는 것이었다. 회의실에 있는 모두가, 체사로가 이에샤에게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나 혼자만 봐주기에는 사건이 심각했다. 기사단장 한 사람이 죽었다. 평기사들이 돕기만 했어도―찍어 누르고 팔다리를 묶는다든가―이에샤가 사생결단을 낼 필요까지는 없었다. 글렘을 되돌리지는 못했겠지만, 산 표본을 얻는다는 데에 뜻이 깊었다. 마파랑이 닥칠지도 모르는 마당이었다. 글렘은 브링어도 마력에 오염될 수 있다는 특수한 예이기까지 했다. 다시없을 기회를 놓쳐 버린 셈이었다. 체사로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고달픈 목소리로 말했다.
“드릴 말씀도 존안을 뵐 염치도 없습니다. 벌해 주소서. 직위에서 물러나라 하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그리 쉽게 탄복하다니. 경도 꽤 지친 모양이야.”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루시온은 헛숨을 터뜨렸다. 체사로가 근위 기사단장이 되고 4년 동안 애썼다는 것쯤은 알았다. 체사로는 어고트 프리슬리가 망가뜨려 놓은 기강부터 바로잡아야 했다. 질서를 심고자 아등바등했다. 망나니 같은 기사들을 어르고 달래 가며 이끌어 왔다. 친우에게 이에샤를 부탁받기까지 했다. 지금 상황이 맥 풀릴 수밖에 없으리라. 체사로의 낯에는 ‘될 대로 되라.’ 하는 빛이 번졌다.
“발테른 경.”
“예.”
“이번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경의 의견도 듣고 싶군.”
루시온이 화살을 2 기사단장에게로 돌렸다.
“외람되지만 이벨리오노 전하. 공문에는 브링어라면 마력에 오염되지 않노라고 똑똑히 적혀 있었습니다. 저희 기사들이 백화 기사단장의 구조 요청을 허투루 들은 것은 분명 상급자의 명령에 불복했음입니다. 하나 마력 오염 사태를 방기했다고 죄를 묻는다면 부당하다 여겨집니다.”
“부당해?”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 발테른은 움찔했다. 루시온의 태도는 의장으로서 지나치게 오만하고 독선적이었으나, 지은 죄가 있었다. 들고일어나기는 어려웠다. 루시온은 집게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마력이고 브링이고 죄 미지의 힘이건만 글 한 줄 달랑 읽고 아 그렇구나, 브링어는 괜찮구나, 헬렐레 마음을 놔 버려 놓은 주제에 죄가 없다?”
“전하, 그 점은.”
“그 안이함 때문에 제국은 브링어를 하나 잃었고, 재수 없었으면 둘을 잃을 뻔했지. 그래서, 죄가 없으시다?”
말소리가 뱀처럼 서늘하고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이에샤가 글렘에게 당하거나 공멸했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이에샤를 연모해서가 아니라, 델페레타의 황태자로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엘테르트가 오른손을 들었다. 좌중의 눈길이 엘테르트에게 쏠렸다. 아름다운 얼굴이 희게 질린 채였다. 브링어 여섯이 모였으니 고역스러울 만도 했다.
“아뢰겠습니다, 전하. 이번 일의 시발점은 기사단보다는 총무부가 아닐까 합니다. 총무대신 크로프트 공을 추궁해야 하지 않을까요.”
“멘델린 경! 그게 무슨 소리요!”
“총무부 연락망에서 백화 기사단이 누락되었고, 마력 오염 사태를 마주쳤을 때의 지침 또한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앨저 경이 모드리스 경을 생포하거나 변이 마력의 확산을 막지 못한 건 그 때문입니다. 지침만 숙지했더라면 제국 기사의 도움 없이도 앨저 경만의 저력으로 모드리스 경을 제압했을 겁니다. 그는 이성을 잃은 상태였으니까요.”
“멘델린 경의 말에도 일리가 있군.”
총무대신은 상다리를 걷어차고 싶다는 충동을 억눌렀다. 이만 득득 갈았다.
엘테르트는 드러날락 말락 한숨지었다. 지금 제국 기사단을 몰아붙여서는 곤란했다. 마력 오염 사태―나아가 마파랑까지 일어났을 때 도움되는 쪽은 문관보다 무관이었다. 구역질이 나도, 구슬려서 써먹어야 했다. 총무부의 잘못만이라도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이에샤를 볼 낯이 없었다.
지켜보던 이에샤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루시온과 엘테르트가 제 억울함을 풀어 주려 하는 것은 고마웠다. 그러나 끼어들 틈이 없었다. 방금의 엘테르트처럼 손을 들어 올렸다. 루시온이 이에샤 쪽으로 고갯짓했다. 사람들이 이에샤를 돌아보았다.
“저도 감히 한 말씀 아뢰어도 되겠습니까? 전하.”
“허락하지.”
“이 비상사태에 시시비비를 따지다니 참으로 지엽적이고 비효율적이지 않습니까? 이번 일의 당사자는 저와 제 기사단이니, 제 의사를 존중해서 일을 처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에샤는 침을 모아 삼켰다. 머릿속으로 낱말을 골랐다. 가슴 한편에 품어 온 의문점이 있었다. 백화 기사단을 업신여기는 제국 기사와 관리―남자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저는, 제 목소리가 무시당한 까닭을 알고 싶습니다.”
“음?”
“그것만 서면으로 정리해서 석곡궁에 보내 주시면 저는 더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단, 그 내용이 타당해야만 합니다. 백화 기사단에만 공문이 누락된 일. 제국 기사들이 제 명령을 듣지 않은 일. 그 죄들을 덮을 수 있을 만한 이유를 반드시 알고 싶군요.”
몹시 궁금했다. 드러내 놓고 “왜 여자를 무시하느냐?” 묻는다면 “여자라서.” 하고 답할 자가 있을지. 뭇사람이 여성은 남성보다 뒤떨어진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에샤 앨저는 숱한 남자가 해내지 못한 일을 이루었다. 브링어라는, 눈에 보이는 경지에 올라섰다. 그러한 이에샤 앞에서도 여자는 안 된다는 소리가 나올까. 부끄러움을 안다면 그럴 수는 없었다.
네세라가 웃으며―비웃으며―말했었다.
「사실 세상의 이치란 너무나도 당연해서, 남녀노소 누구나 자연스럽게 깨닫는 거예요. 동생을 때린 꼬마한테 네가 방금 무슨 행동을 했는지 입으로 읊어 보라 하면 어떨까요? 아이는 냉큼 대답하지 못해요. 자기가 잘못한 줄을 아니까. 달신교 성서에 이런 구절이 있답니다. 태양이 비추는데도 인간은 죄를 지으니, 달신의 세계는 고통으로 가득하도다.」
네세라의 이야기를 들은 뒤 줄곧 요구하고 싶었다. 너희가 저지르는 짓을, 너희 스스로 설명해 보라고. 이에샤는 차가운 눈초리로 제국 기사단장들과 총무대신을 훑었다.
“만약 합당한 이유가 없다면 전 사건 당시 부용궁에 남았던 모든 제국 기사, 마력 오염에 관한 공문 발송을 담당한 총무부 관리들을 고발하겠습니다. 그만큼으로 이번 일을 덮으면 어떻습니까?”
“앨저 경! 정말, 겨우 그 정도로 괜찮겠습니까?”
“괜찮아요.”
엘테르트가 당황해서 나섰다. 이에샤는 빙그레 웃었다. 백화 기사단장으로서 일하며 깨달은 점이 있었다.
백화 기사란 여자를 지키는 기사였다. 여자를 지키려면, 여성의 목소리를 키우는 방법이 제일이었다. 눈앞에 드러난 폭력만 막아서는 모자랐다. 뿌리부터 바꾸어 나가야만 참된 안위를 얻을 수 있었다. 여자도 신념을 담아 소리지를 줄 안다고, 남자에게 가르쳐 주어야 했다. 이에샤는 사명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셈브리온이 떠나 버렸다. 이에샤에게는 나날을 버틸 원동력이 필요했다. 그것을 어디에서 얻어야 할까? 알 수 없었다. 제가 몸담은 백화 기사단의 취지로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당사자의 뜻이 이리 확고하니 어쩔 수 없군. 좋다. 당장은 에버렛 경과 크로프트 공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
“전하의 하해와 같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감사, 드립니다.”
체사로는 흥미로운 듯이 이에샤를 흘깃거리며 인사했다. 총무대신은 못마땅하게 씹어뱉었다. 루시온이 어깨를 으쓱했다. 장난스러운 태도가 돌아왔다.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지.”
똑똑!
때맞추어 노크 소리가 울렸다. 루시온은 문가를 힐끗했다. 서기를 맡은 시종이 개인 책상에 앉았다가, 스르륵 일어섰다. 출입문을 열었다. 땋아 내린 갈색 머리카락이 출렁였다. 뛰어들어 온 미엘라가 숨을 할딱거렸다.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아차.’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기억해 낸 모양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올센이라고 합니다. 백화 기사단장님의 부관 자격으로 참석을 명받고 왔습니다.”
‘올센 경이 오기로 했구나.’
이에샤는 미엘라에게 미소를 보내 주었다. 미엘라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네세라가 오지 않을까 했는데, 미엘라도 반가웠다. 미엘라의 머리는 겁을 집어먹었을 때조차 실수하는 법이 없었으니까.
============================ 작품 후기 ============================
음...
사이다 기대하셨을 분들께는 면구스럽네요...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려면 도저히 시원한 복수극 역전극을 쓸 수가 없어서 늘 죄송합니다...
루시온이 엄청 오랜만에 나온 듯한 기분이 드네요...
내일은 쉽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