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2 10. 멈추지 않는 바퀴 =========================
찻잔의 바닥이 보일 즈음에야, 싸움이 멎었다. 엘먼은 잉크병을 들고 씩씩거렸다. 이걸 던져, 말아? 갈등이 이에샤에게까지 전해졌다. 마르셀이 평상시에도 속을 팍팍 썩이는 모양이었다. 우아하던 노신사가 술 취한 늙다리처럼 날뛰는 꼴을 보아 하니. 이에샤는 탁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엘먼과 마르셀의 눈길이 이에샤를 향했다.
“죄송하지만 공, 저도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아, 앨저 경을 너무 붙잡아 뒀군. 미안하네. 아무튼 요즘 에브라힐 돌아가는 낌새가 수상쩍으니 조심하게. 부하들한테도 주의시키고. 더 궁금한 거 없나?”
“없습, 아! 한 가지 있습니다.”
알 수 없는 점이 떠올랐다. 리오르 영식이 끈덕지게 미엘라만을 노린 까닭. 이성을 잃었다면 가까이에서 막아서는 이에샤부터 공격해야 옳았다. 이에샤가 물어보자 엘먼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경이 브링어라 그래. 마력이랑 브링은 상극이거든.”
“상극이요?”
“표본이 워낙 적어서 확실치는 않지만. 정설은 천연과 인공의 힘이 충돌한다는 걸세. 브링어는 온갖 이로운 마법이 안 듣는 대신 마력에 중독될 위험도 없지. 그래서 제국 기사단장들은,”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멈칫했다. 이에샤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에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엘먼의 눈초리가 뾰족해졌다. 수염이 노여움에 차 바들거렸다.
“몹쓸 것들! 언제 한 번 총무부를 뒤집어 엎어야겠군.”
“예? 엘먼 공,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마력 영향을 덜 받는 기사단장들은 마파랑 진압의 주축이야. 정말로 이번 사태가 마파랑의 조짐이라면 경은 아주 귀중한 전력일세. 브링어한테 이런 중요한 일을 전달하지 않다니!”
이에샤도 싫증을 느꼈다. 남자란 무어가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를 가리지 못하는 족속 같았다. 여자를 따돌리는 데에만 급급했다. 이에샤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계집 주제에 사내의 일터에 끼어들었으니 무시당해 마땅하다는 것인가? 기사와 관리가 하나 되어 이에샤를 내치는 꼴은 겁에 질린 듯이 보이기까지 했다. 여자에게 자리를 허락하는 순간 저희는 밀려나리라 생각하는지.
뺨을 긁적였다. 엘먼은 여자 기사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부당한 대우를 받아서도 안 된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이를 젊은 남자보다 ‘낫다’라고 말해야 할까. 헷갈렸다. 엘먼의 태도를 추어올리기는 싫었다. 짓누르려는 자도, 짓누를 가치조차 없다 하는 자도 이에샤에게는 잔인했다.
어쨌든지 기회는 써먹기로 했다.
“실은 총무부에서 백화 기사단에만 공문 전달을 빼먹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답니다. 엘먼 공께서 총무대신께 잘 좀 말씀해 주세요. 꼭이요.”
“염려 붙들어 매게! 내 그놈이 갓 입궁했을 때 이미 부마법장이었으니.”
이에샤는 활짝 웃었다. 백화 기사단장이 총무부를 물갈이하려 들면 월권이었지만, 마법장이 그리한다면 ‘훈계’가 될 터였다. 남의 권위로 찍어 누르는 모양새가 되더라도 좋았다. 백화 기사단이 없는 곳 취급당하는 일부터 잡아야 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공, 날이 쌀쌀하니 풍한에 조심하십시오. 오티스 경도 만나서 반가웠어.”
“조심히 들어가게.”
“반가웠습니다, 앨저 경! 리오르 영식의 망령이 들러붙지 않기를 저도 빌어 드리겠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방금 그 말 때문에 찝찝해졌어.”
한숨이 넘쳐흘렀다. 마르셀은 생글생글할 따름이었다.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드러낸 이마에, 딱 한 번만 손가락을 튕겨 주고 싶었다.
붓꽃궁을 나섰다. 마법부는 황실에서 두 번째로 인원이 적은 부처였다―첫 번째는 물론 백화 기사단이었다. 누구도 만나지 않고 정원을 벗어날 수 있었다. 마력의 나비들은 기막히게 붓꽃궁 터에서만 맴돌았다. 마지막으로 나비 떼를 한 번 돌아보았다.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석곡궁으로 가려면 부용궁을 지나쳐야만 했다.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에샤는 부용궁을 지날 때마다 시비에 휘말렸으므로. 제국 기사단의 본부답게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공기에 땀 냄새가 밴 듯했다. 이에샤의 날카로운 귀는 남자들의 잡담 소리마저 잡아냈다. 부용궁에서도 마주치는 사람이 없었으면 하며 걸었다. 후회가 들었다. 이동 마차를 잡아탔어야 했다.
“아.”
감탄사가 새었다. 오늘은 저주받은 날이 틀림없었다. 불운이 이에샤에게만 몰려든 것 같았다. 다리를 멈추었다. 부용궁을 나오던 제국 제3 기사단장 글렘 모드리스도 얼어붙었다. 이에샤는 욕지거리를 삼켰다. 다른 기사단장은 모두 대연무장에 있을 줄로 알았다.
“네년…….”
“오랜만이군, 모드리스 경. 방금 같은 직위에 있는 사람한테 쓰기엔 부적절한 호칭을 들은 듯한데.”
“여기에는 뭣하러 왔냐.”
“지나가는 길이었을 뿐이오.”
글렘이 콧방귀를 뀌었다. 믿지 않는 티가 뚜렷했다. 이에샤가 나쁜 목적이라도 품고 어슬렁거린다 여기는 성싶었다. 이에샤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패배자의 피해 망상에 어울려 줄 셈은 없었다. 글렘이 부용궁에서 나와 어리둥절하기는 했지만, 까닭은 궁금하지 않았다.
“그럼 난 가던 길 마저 가지.”
성큼성큼 걸었다. 글렘을 스쳐 지났다. 글렘은 제자리에 붙박인 듯이 섰다. 고개만 돌려 이에샤를 노려보았다. 짧은 잿빛 머리카락으로 뒤덮여, 복슬복슬해 보이는 뒤통수가 멀어져 갔다. 이에샤 앨저는 어깨가 벌어지지 않았다. 허리며 다리도 날씬했다. 연약한 인상은 아니지만 굳세 보이지도 않는, 흔해 빠진 계집. 글렘은 제가 이에샤에게 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사람들의 눈총이 따가웠다. 오늘도 1차 시험이 끝나자마자 도망했다. 개인 사무실에 틀어박혔다가, 2차 시험을 심사하고자 소철궁으로 돌아가려던 차였다. 번거롭게 오락가락해야 하는 것도 이에샤 때문이었다. 이에샤가 그 많은 사람 앞에서―황제와 황태자의 앞에서 저에게 굴욕을 안겨 준 탓이었다.
시건방진 백화 기사단장만 없었어도 자신은 웃음거리가 되지 않았다. 평생을 검술의 대가로 떠받들리며 살아온 제가 이토록 초라한 신세가 된 것은 전부, 전부, 전부…….
이에샤는 반사적으로, 허리띠에 걸린 검을 쥐어뜯듯 끌러 냈다. 칼날에 푸른 빛이 맺혔다. ‘콰과광’하는 소리가 터졌다. 비틀비틀 뒷걸음질쳤다. 급하게 모은 브링으로 기검을 받아치느라 무리해 버렸다. 온몸의 근육이 놀랐다. 찌르르한 아픔이 느껴졌다. 손목이 후들거렸다.
“뭐, 뭐야? 이게 무슨 짓이야!”
“너―여기사―――너―너―너――네가―.”
“모드리스 경?”
멍청한 목소리로 글렘을 불렀다. 글렘의 흰자위가 뻘겋게 물들었다. 실핏줄이 터진 모양이었다. 눈초리에서 주르륵,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 낯이 익었다. 이에샤는 두어 시간 전에 저러한 사람과 맞닥뜨렸었다.
‘말도 안 돼!’ 하는 생각부터 떠올랐다. 엘먼은 마력이 브링어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몸에 거는 마법도 무용했고, 중독도 되지 않았다. 오염은 다른 것일까? 아니리라. 브링어가 마력 오염에 속수무책이라면 마파랑 진압을 주도할 리도 없었다. 하나 글렘의 모습은 리오르 영식과 똑같았다.
이에샤는 이를 악물었다. 글렘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브로드 소드가 녹색 브링을 머금었다. 이에샤는 당황을 추슬렀다. 검을 올려 그었다. 글렘이 내리친 검을 튕겨 냈다. 윽! 짧게 신음하며 물러섰다. 이성을 잃은 탓일까? 글렘의 힘은 무시무시했다. 셈브리온을 앞지르는 듯싶었다.
‘재수가 없으려니 별일이 다 생겨!’
정면으로 부딪쳐서는 위험했다. 충돌이 이어지면 제 손목은 걸레짝이 될 터였다. 글렘의 움직임은 크고 거칠었다. 빈틈을 노려서 찌르는 편이 좋을 듯했다. 이에샤는 부용궁에서 누군가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글렘을 해코지한 것이 아니라, 정당방위로 싸웠을 뿐임을 증명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글렘은 맹수 같았다. 울부짖다가, 다물고 끄르륵대기도 했다. 섬뜩한 몰골이었다. 이에샤는 입술을 옥깨물었다. 글렘의 공격을 피하거나 비스듬하게 흘려 냈다. 구경꾼이 몰려들 때도 되었다. 어째서일까? 부용궁은 잠잠했다.
‘아, 그렇구나.’
이에샤는 깨달았다. 제국 기사단은 글렘을 감싸는 것이었다. 얼굴에 먹칠을 했어도 브링어였다. 자기네 윗전이었다. 글렘의 성깔을 생각하면, 이에샤를 덮치는 일쯤이야 유별해 보이지도 않으리라. 둘의 싸움을 평범한 다툼으로 여기고 모르는 체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글렘을 해쳤다가는 이번에야말로 죄인이 되고 말 터였다.
절박한 마음으로 소리쳤다―그 와중에도 글렘의 검에 옆구리를 베일 뻔했다.
“모드리스 경이 마력에 오염됐다! 제국 기사들은 나와서 그대들의 단장을 제압하라!”
바람을 타고 “거짓말.” 하는 중얼거림이 들려온 것 같았다. 기분 탓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에샤는 절망감을 느꼈다. 글렘이 기검을 쏘아 보냈다. 이에샤는 다리가 꼬여, 휘청했다. 한 손으로 땅을 짚었다. 공중제비를 넘어서 달아났다. 자세를 바로잡았다.
야비한 새끼들! 욕이 튀어나왔다. 이에샤는 기다리기를 그만두었다. 비겁자 무리에 매달리지 않아도 살아날 구멍은 있었다. 엘먼이 “기사단 입단 시험에 대비해서 탐지망을 펼쳐 놓았다.” 하고 말했었다. 글렘의 이변을 알아차리고 사람을 보내올지도 몰랐다. 지금이라면 마르셀 같은 놈만 일곱 명이 와도 반가울 것 같았다.
칼자루를 고쳐 쥐었다. 방어전이 아니라면 어렵지 않았다. 죽이지만 말고 몰아붙여, 황실 마법사가 도착했을 때 글렘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으면 되었다. 이에샤는 돌진하는 글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폼멜로 가슴팍을 찍었다. 글렘이 쿨럭거렸다. 목구멍에서 핏덩이가 올라왔다. 몸이 망가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마법사가 올 때까지만 살아남아 달라고.’
이에샤는 속으로 빌었다. 비틀거리는 글렘의 오른 팔뚝에 칼끝을 박아 넣었다. 글렘이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질렀다. 죽 그어서 팔을 자를 수도 있었으나, 이에샤는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검을 거두어들였다. 글렘의 오른팔이 덜렁덜렁했다. 쩽그렁! 브로드 소드가 바닥을 굴렀다.
‘다리도 마저 끊어 놓을까.’
숨을 몰아쉬며 궁리했다. 그때, 글렘이 허리를 수그렸다. 검을 주우려고 했다. 맨몸으로 덤벼들 줄 알았건만 뜻밖이었다. 이성은 없어도, 공격 수단을 고를 만큼의 지능은 남은 모양이었다. 브링어―검술사의 본능인지도 몰랐다. 이에샤는 "어딜!" 하고 투덜거렸다. 글렘에게 다가붙었다. 검의 넓적한 쪽으로 어깨를 후려갈겼다. 날카롭게 벼린 검신이 글렘의 소매를 찢었다.
한쪽 무릎을 구부렸다. 몸을 낮추었다. 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칼끝과 검신 일부분이 근육질인 정강이를 베었다. 글렘은 무게중심을 잃었다. 푹 고꾸라졌다. 전경골근이 끊어졌으리라. 이에샤는 쓰러지는 덩치를 피하여 물러났다. 그때였다.
“흐, 아, 아, 아아아!”
“이게 대체 무슨 폭거란 말이오, 앨저 경!”
“앨저 경, 괜찮으십니까!”
글렘의 괴성. 뒤늦게 화들짝한 제국 기사의 항의. 달려오는 마르셀의 외침.
상황은 순식간에 흘렀다. 이에샤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부용궁에서 뛰쳐나온 무리를 쏘아보았다. 비상사태를 모르쇠 잡고, 윗사람인 백화 기사단장의 명령을 듣지 않고, 저희의 상관인 글렘이 초주검이 되도록 방관한 놈들이었다.
이제는 이에샤의 손아귀에 제국 기사단을 몰아붙일 구실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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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