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8 10. 멈추지 않는 바퀴 =========================
밀레나는 파리하게 시들었다. 내리덮인 눈꺼풀에 기미가 끼었다. 뺨에 푸른 핏줄이 비쳤다. 가련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에샤의 머릿속에는 밉살스럽게 지껄이던 목소리가 또렷했다.
「난 언니네 어머니 때문에 다섯 살까지 사생아로 살았어. 아버지께 복수할 속셈으로 6년이나 이혼 안 해 줬다는 거 알아. 참 독하시지.」
망발하는 상이 병색 위로 덧씌워졌다. 구역질이 났다. 그때 느낀 분노는 흐려지지조차 않았다. 어떻게 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악다구니가 터질 듯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어머니가 알디온 부부의 딸에게 업신여김당한 것이, 자기가 못나서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울화를 삭이기 힘들었다.
“난 밀레나를 보기만 해도 화가 나. 역겨워서 참을 수 없어. 경들은 아무리 그래도 자매인데 내가 심했다고 생각하나? 말했잖아. 난 쟤를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아.”
“그, 그래도 앨저 경. 오늘 알디온 영애께서는 경을 걱정해서 찾아오셨다고…….”
“그 걱정, 내가 바라지 않아. 난 그냥 알디온 집안이랑 남처럼, 서로 없는 사람들처럼 지내고 싶다고. 밀레나가 걱정이랍시고 들이대는 관심이 나한테는 숨이 막혀.”
미엘라의 말허리를 잘랐다. 딱딱하게 씹어뱉었다. 서슬이 시퍼렜다. 미엘라는 토 달지 못했다. 이에샤는 회색 머리카락을 헤집어 댔다. 속이 시원해지기는커녕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 설명을 거듭해 보아야, 피붙이에 대한 증오는 이해받을 수 없는 걸까?
구질구질하게 매달릴 마음은 없었다. 백화 기사들이 저를 매몰차고 막돼먹은 인간으로 여기든지 말든지. 차분하게 과거를 털어놓은 일만 해도 이에샤로서는 애쓴 것이었다.
네세라는 고민에 잠겼다. 이에샤의 심정은 낯설지 않았다. 자신은 남자 탓으로 망가진 가정들을 접해 왔다. 가족끼리 물어뜯는 꼴쯤이야 숱하게 보았다. 네세라가 느끼기에 잡아다 족쳐야 할 상대는 오스터 알디온 후작이었으나, 이에샤가 밀레나를 미워하는 마음이 커다랄 만도 했다. 어머니가 모욕당했는데 제정신일 수 있을까.
“휴! 이런 얘기는 때가 됐을 때 차분하게 주고받아야 하는 법인데, 어쩌다 보니 변론 시간처럼 돼 버렸네요.”
“페리튼 경은 여전히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한숨이 나왔다. 이에샤의 사고는 서투르고 극단적이었다. 내 편이 아니면 적. 오른쪽이 아니면 왼쪽. 중간 지점이 없었다. 아니, 살아온 환경으로 미루어 타협하는 방법을 배우지도 못했으리라.
“알디온 영애가 정말로 위험했는데도 상관없다고 말씀하신 점은요. 아, 이건 가족으로서 잘못했다는 게 아니에요. 상식적으로 빈축을 사기 쉬운 반응이라는 거죠.”
“그건, 나도 알아.”
“다만 앨저 경, 백화 기사단장으로서 앨저 경이 명심하셔야 할 게 있어요.”
이에샤는 고개를 기울였다. ‘백화 기사단장으로서’. 앨저와 알디온 간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네세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샤에게 다가갔다. 자신보다 큰 이에샤를, 부드러운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이에샤는 어제 라제카가 네세라의 품에 안겨 들던 모습을 떠올렸다. 편안해 보였었다.
“백화 기사단은 선례를 만드는 중이라는 거예요.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죠.”
“선, 례?”
“우리는 달신교 다음으로―종교가 아니라 황실 차원으로 따지자면 최초로. 여성을 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예요. 우리가 행하는 일 하나하나가 훗날의 포석이 되는 거죠. 첫 단추는 세심하게 끼워야만 해요. 기사단에서 구성원의 사감으로 당장 도움이 필요한 여성을 소홀히 대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대답하지 못했다. 기사단장인 이에샤가 밀레나를 몰아쳐 잘못되게 했다면, 모든 황궁 여인을 지킨다는 취지에서 어긋나 버렸다. ‘역시 여자는 맡은 일 하나 제대로 못 한다.’ 하는 비난이 쏟아졌을지도 몰랐다. 네세라가 격렬하게 들고일어난 까닭이 이해되었다. 네세라는 방긋이 웃었다. 손을 뻗었다. 이에샤의 뺨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어루만졌다.
“우리 소중한 단장님. 싫은 사람한테 친절하도록 강요하면 누구나 싫을 거예요. 저한테도 섭섭하셨죠.”
“……응.”
“사정 모르고 앨저 경을 나쁘게 본 점은 저도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하지만 백화 기사단이 단순히 일하는 여자의 집단이 아니라, 사람을 지키는 기사단이라는 걸 잊으시면 안 돼요.”
이에샤는 눈을 내리깔았다. 엘테르트는 백화 기사단이 출범할 적부터 함께했다. 이에샤의 실수를 몰랐을 턱이 없었다. 그런데도 꼬집어 꾸짖지 않았다. 편들어 주겠노라 말했다. 이에샤가 스스로 깨달으리라 믿은 성싶었다. 그러한 사람이었다.
이에샤는 네세라의 손목을 잡았다. 살며시 내려놓았다. 친근하게 문질렀다. 설움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모자란 자신을 이끌어 주어서 고마웠다. 미엘라가 발딱 몸을 일으켰다.
“저, 저도 사과드릴게요! 생각해 보니 앨저 경 입장에서는 영애가 싫을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전 당연히 가족을 사랑해야 한다고만 배워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앨저 경 기분을 상하게 했습니다.”
“그래도 여동생 눈이 멀어도 알 바 아니라는 소리는 어디 가서 하지 마십시오. 좋은 시선 못 받습니다. 저희 앞에서만 하시죠.”
스란이 무뚝뚝하게 말끝을 달았다. 이에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란의 이야기인즉슨, 자신은 이에샤를 나쁘게 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백화 기사들은 어설프게나마 받아들여 주었다. 이복 동생을 가족으로 여기지 않아도 된다고. 이에샤는 입가를 가렸다.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웃을 상황이 아니건만, 웃음이 배어나려 했다. 셈브리온이 있었다면 “나 오늘 알디온이랑 관련된 일을 흥분하지 않고 대화로 풀었어!” 하고 자랑했을 텐데.
그때였다.
“아, 으으.”
작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밀레나에게 쏠렸다. 밀레나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등받이에서 윗몸을 떼었다. 머리를 두리번두리번했다. 눈앞이 흐릿한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조마조마해졌다. 밀레나의 시력에 문제가 생겼다면 큰일이었다. 다행하게도 밀레나는 이에샤 쪽을 바라보았다. 새파란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이에샤, 언니.”
“일어났니?”
이에샤는 쌀쌀맞게 들리지 않도록, 사무적인 목소리를 꾸며 냈다. 밀레나는 고개를 수그렸다. 손가락으로 머리를 눌렀다. 두통이 가시지 않았다. 이에샤는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렸다. 다그칠 수는 없었다.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 되었다.
한참 만에 밀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책상에 걸터앉은 이에샤를 멍하니 보았다. 흐려졌다 밝아졌다 하던 머릿속이 다잡혔다.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에샤와 손을 붙들고 떠나던 엘테르트의 모습. 하……! 한숨과도 닮은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실, 짐작은 했었다. 설마설마했다. 엘테르트가 제 이복 언니를 마음에 두었노라 믿고 싶지 않았다.
애써 왔던 일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다른 여자라면 괜찮았다. 엘테르트의 마음을 돌릴 자신이 있었다. 부인 자리를 얻고 애인 자리만 넘겨주는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이에샤 앨저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에샤는 한 번도 밀레나의 뜻대로 움직인 적 없는 사람이었다. 미소와 눈물로 다가붙어도 시큰둥하기만 했다. 싸움은커녕 구슬릴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비효율적이었다.
옛날부터 밀레나의 가슴에는 무력감이 자리했다. 이에샤는 두드리고 잡아당겨도 열리지 않는 문과 같았다. 이에샤와 마주할 자신 따위, 사라진 지 오래였다. 곁을 맴돌거나 쇠귀에 말 붙이는 심정으로 부딪친다면 모를까. 같은 선에 서서 겨루려 해 보아야 헛일이었다. 무시만 돌아올 것이 뻔했다. 밀레나는 제 안에서 ‘엘테르트 멘델린’을 지웠다. 대신에 ‘엘로나 멘델린’을 공고히 했다.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귀가 아프도록 울리던 드르르, 드르르 소리가 그친 채였다. 몸도 가벼워졌다. 드레스 자락을 모아 쥐었다. 바닥을 디뎠다. 소파에서 벗어났다.
“나, 갈게.”
“뭐? 얘! 지금 일어나 놓고 어딜 가겠다는 거야?”
“이제 괜찮아. 내가 기절했던 사이에 의사가 왔다 간 거지? 더 있어 봐야 언니 기분만 상하게 할 거 같으니까 가 볼게. 혼자 갈 수 있어.”
비척비척 문가로 걸어갔다. 이에샤는 눈썹을 치켰다. 밀레나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끈질기게 버티더니, 왜 갑자기 가겠다는 것인지 몰랐다. 백화 기사들도 당혹했다. 잡아야 하나, 보내야 하나 헛갈렸다. 밀레나가 문을 당겨 열었다. 복도로 나가 버렸다.
이에샤는 “뭐람?” 하고 투덜거렸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느낌이 나쁘다며 찾아온 일도, 깨어나자마자 홀린 사람처럼 떠나 버린 일도. 미엘라가 벽에 걸린 선반을 손가락질했다.
“영애의 머리랑 드레스 장신구들 다 저기 있는데요. 어떡하죠?”
“마력 중독에 관해서도 얘기해 줘야 하지 않나요? 본인은 모르는 눈치던데.”
네세라가 거들었다. 이에샤는 한숨을 쉬었다. 사람을 성가시게 하는 데 뭐가 있는 계집애였다. 더는 밀레나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쫓아가 데려오기도 무엇했다. 절레절레 손사래를 쳤다.
“물건이랑 전갈 합해서 나중에 알디온으로 부치지 뭐. 스란 경, 일단 따라가서 밀레나가 무사히 자기 마차로 돌아가는지만 확인해 줄래?”
“알겠습니다.”
스란이 명령을 받았다. 사무실을 나섰다. 스란의 걸음이라면 밀레나를 따라잡을 수 있을 터였다. 이에샤는 찝찝한 기분을 갈무리했다.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겠지만―알고 싶지도 않았지만―밀레나의 상태가 이상한 것만은 틀림없었다. 오스터 알디온에게 보내는 편지에 ‘딸 좀 제대로 챙기십시오.’ 하고 쏘아붙여야 할 성싶었다.
* * *
“돌아온 걸 환영해, 이브론!”
아고르는 변함없었다. 셈브리온도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축이었다. 하지만 아고르는 스물여덟 살 적과 똑같았다. 젊어진 듯도 했다. 무언가 마법을 쓴 걸까? 마법에 까막눈인 셈브리온으로서는 모를 일이었다. 델페레타 국경을 지나자마자 기다리던 이동 마법진으로, 단숨에 벨체터까지 넘어왔다. 마법 솜씨가 일취월장하기는 한 것 같았다.
아고르는 콧노래까지 불렀다. 양철 컵에 갈색 자갈을 집어넣었다. 셈브리온에게 내밀었다. 컵 안에서 자갈이 녹아내려, 투명한 물로 바뀌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제국에서 오래 살았는데 춥지는 않아?”
“아니, 딱 좋아.”
“하긴 넌 유난히 날씨에 강했지.”
셈브리온은 컵을 받아 들기만 했다. 내용물을 마시지는 않았다. 12년. 긴 시간이었다. 아고르는 가족 같은 동료였으나, 옛날의 인연이었다. 지금 셈브리온이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델페레타의 회색 머리카락 아가씨뿐이었다.
아고르는 기다란 탁자를 둘러싼 의자 중 하나에 셈브리온을 앉혔다. 자신도 옆자리에 앉았다.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셈브리온을 보았다. 셈브리온은 슬그머니 고개를 비꼈다.
“뭐냐, 징그럽게.”
“아니. 널 다시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거든. 죽은 줄 알았던 네가 제국에 살아 있는 걸 보고 내가 얼마나, 얼마나 흥분했는지. 아, 정말! 킬타로스도 같이 돌아올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킬타로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제 돌아왔으니 말해 줘도 되잖아.”
아고르가 낯빛을 굳혔다. 킬타로스의 죽음을 돌이키는 모양이었다. 아고르는 옛날부터 기분파였다. 지금도 언제 기뻐했냐는 양 매서운 기세를 풍겼다.
“아, 그래. 킬타로스 말이지. 킬타로스.”
“네놈들 제국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내 생각엔 제국 기사단장 중 하나가 죽인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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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