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7 10. 멈추지 않는 바퀴 =========================
사무실에는 중년 남자가 도착한 채였다. 바닥에 아타셰케이스가 펼쳐졌다. 나무나 은으로 만든 의료 도구와 자그마한 약병들이 들어찼다. 의사는 혀를 끌끌 찼다. 약병 세 개를 꺼냈다. 물약과 알약과 말린 약초를 막자사발에 붓고, 짓이겨 개었다. 걸쭉하게 만들어진 약을 밀레나의 입안에 흘려 넣었다. 미엘라와 시더가 도왔다. 조금 떨어진 곳에 스란과 네세라가 섰다. 네세라는 깐깐한 눈초리로 의사를 지켜보았다.
이에샤는 네세라 쪽으로 다가갔다. 네세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반색했다.
“앨저 경! 진짜 오늘 안 돌아오실 줄 알고 걱정했어요. 멘델린 경은 가셨나요?”
“응. 미안.”
이에샤는 멋쩍게 사과했다. 어떤 낯으로 네세라를 대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네세라는 태연스러웠다. 다툼 따위 잊었다는 양. 이에샤는 생경해졌다. 화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누그러들다니. 네세라가 신기하고 대단했다.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말문을 텄다.
“밀레나는 어때?”
“앨저 경이 나가자마자 기절했어요. 의사 말로는 병은 아니라네요. 기력이 크게 상했다는데, 아무래도 마력 중독 같다고.”
“마력 중독?”
이에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뜻밖의 이야기였다.
마력이란 자연물이 품는 힘이었다. 그를 뽑아내서 규칙과 식을 세워, 마법으로 바꾸어 내는 이들이 마법사였다. 브링과 다르게 마력은 인체에 쌓이면 위험했다. 체력을 좀먹고 속병을 불러일으켰다. 포션도 지나치게 쓰면 독이었다. 근력 강화 마법을 오래 쓰면 몸이 축났다. 그러한 식이었다.
밀레나가 마력에 중독될 정도로 마법 시술을 받았다니 금시초문이었다. 이에샤는 밀레나가 갑작스럽게 아름다워진 일을 떠올렸다. 하지만 입술을 붉게 하고, 살결을 가꾸고, 자세를 펴고, 자신감을 심어 주는 마법 같은 것은 듣도 보도 못했다. 그런 게 있었다면 유명세는 둘째 치고 값이 만만치 않았을 터였다. 알디온 후작가라도 휘청했으리라.
“쟤가 마법이나 마법사랑은 별 인연이 없을 텐데. 아니다. 내가 잘 아는 것도 아니니 또 모르지.”
“연초까지는 같이 살았잖습니까?”
스란이 물어 왔다. 이에샤는 한숨을 쉬었다.
“한집에 살았다뿐이지 남만도 못한 사이였는걸. 난 밀레나 쟤가 정말 싫었어. 어쩌다 마주치면 욕하고 돌아서는 게 다였다고.”
“그래서 영애를 보고 그렇게 화내셨던 건가요?”
“……아까는 내가 실수했다고 생각해. 흥분해서 눈에 뵈는 게 없었어. 미안.”
네세라와 스란으로부터 고개를 비꼈다. 뺨이 달아올랐다. 억울한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사정 모르는 사람에게는 해야 할 일을 팽개치고, 도움이 필요한 여자를 닦아세운 꼴로밖에 안 보였을 터였다. 엘테르트에게조차 밀레나의 약아빠진 면을 밝히지 못했다. 부하들에게 미주알고주알 늘어놓느니 사과하고 넘어가는 편이 나았다.
네세라는 이에샤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날카로운 이목구비에서 애티는 나지 않았으나, 뾰로통한 표정은 어린아이 같았다. 네세라의 막냇동생이 토라졌을 때와 비슷했다. 쓴웃음이 나왔다.
“앨저 경의 마음도 모르지 않아요. 알디온 후작가의 스캔들을 생각하면 영애를 좋아하는 쪽이 이상하겠죠. 하지만 경.”
“응?”
“의사 말이, 조금만 운이 나빴어도 알디온 영애는 실명했을 거라 하더군요. 아니, 영애가 깨어나지 않았으니 아직도 안심할 단계는 아니죠.”
“뭐라고? 실명?”
“마력 중독의 초기 증세가 시력 감퇴래요. 극도로 쇠약해진 몸에 계속 심한 자극을 가해서 의사가 도착했을 땐 굉장히 위험한 상태였다고 해요. 만약 영애가 잘못됐다면 앨저 경 기분은 어떠셨을 거 같아요?”
이에샤는 대답하지 못했다. ‘심한 자극’이란 이에샤의 닦달을 가리킬 것이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밀레나의 눈이 멀게 된다? 상상해 보았다. 연민이나 미안은 들지 않았다. 밀레나가 남은 삶을 저택에 갇혀 살게 되더라도 이에샤는 기뻐할 자신이 있었다. 제 잔악함에 섬뜩했으나, 그만큼 밀레나를 향한 증오가 컸다.
입 밖으로 낸다면 경멸당할 내심이었다. 솔직하게 답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불편했겠지. 후회도 좀 했을지 모르고.”
“그뿐인가요?”
“그뿐이야. 내가 밀레나한테 마법을 건 것도 아니고, 우리 사이에 굳이 찾아와서 뻗댄 건 저잖아. 잠깐 불편하기는 해도 금방 털어냈을 거야.”
“앨저 경은 정말로 알디온 영애를 미워하시는군요…….”
해도 너무하지 않느냐. 네세라와 스란의 힐난이 느껴졌다. 신물이 났다. 나쁜 년 취급이라면 익숙했다. 하나 정들기 시작한 동료들에게―그것도 밀레나 때문에―눈총을 받으니 거북살스러웠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뭇사람이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믿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양심을 지녔다면 남의 비극에 슬퍼해 주게 마련이었다. 이에샤는 자신이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지막으로 밀레나의 상태를 살핀 의사가 뒤돌아섰다.
“할 수 있는 치료는 다 했습니다. 의료원으로 모셔도 이 이상의 처치는 없을 겁니다. 이대로 의식을 찾으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가로 돌려보내시지요.”
“아, 고생했어.”
“후작가에 꼭 꼼꼼하게 다시 진찰받으라고 전해 주십시오. 마법 병리에 밝은 의사를 불러서 말입니다.”
마법까지 공부하는 의사는 흔치 않았다. 알디온 후작가가 뒤집힐 성싶었다. 이에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나중에 진료 일람표를 좀 보내 줘. 보고서에 첨부해야 하니까.”
의사가 왕진 가방을 추슬렀다. 달칵! 쇠로 된 잠금장치가 채워졌다. 이에샤를 향해서만 꾸벅 인사했다.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이에샤는 한숨을 쉬었다. 백화 기사단장으로서 알디온에 전갈을 보내야 한다 생각하니, 골치가 아팠다. 마음 같아서는 네세라나 미엘라에게 떠맡겨 버리고 싶었다.
시더를 뺀 나머지의 시선이 이에샤에게 쏠렸다. 시더는 이에샤가 밀레나에게 화내는 꼴을 보지 못했으므로, 의아한 낯빛만 띠었다. 이에샤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렇게 노려보지 좀 마. 깨어나도 곱게 내버려 둘 테니까. 아까는 내가 잘못했어.”
우울했다. 너희가 내 무얼 아느냐, 고래고래 소리라도 질렀으면 했다. 셈브리온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울고 날뛰기만 해서는 안 되었다. 셈브리온은 끝까지 이에샤를 걱정하다가 떠났다. 실망시키지 않도록 잘해 내야 했다. 한 달 뒤면 성년에 접어들었다. 어연번듯한 어른이 되어서 셈브리온을 맞이하고 싶었다.
이에샤는 책상을 등졌다. 까치발을 들었다. 탁상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백화 기사들과 시더를 둘러보았다. 흐릿하게 웃었다.
“밀레나가 일어날 때까지 시간도 걸릴 텐데 다들, 나랑 얘기나 할래?”
“얘기라뇨?”
“가족에 관해서.”
모두가 놀랐다. 이에샤 쪽에서 사사로운 화제를 꺼내기는 처음이었다. 먼저 움직인 사람은 스란이었다. 스란은 미엘라와 네세라를 부추겼다. 밀레나가 차지하지 않은 응접 소파에 앉도록 했다. 자신은 팔걸이에 기대섰다. 미엘라는 미안해했으나, 소파는 2인용이었다. 시더가 잽싸게 “저는 할 일이 밀려서요!” 하며 밖으로 나갔다. 미엘라가 눈짓을 보냈다. ‘나중에 다 얘기해 줄게.’ 하는 뜻을 담아서.
이에샤는 옹기종기한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낯에서 씁쓸함이 묻어났다. 네세라는 기시감을 맛보았다. 남편이나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는 여자들이 사정을 털어놓을 때, 이에샤와 같은 표정을 짓고는 했었다.
이에샤는 다짐을 굳혔다. 제 삶을 고한다면 엘테르트나 루시온이 상대일 줄로 예상했다. 백화 기사단에 밝히게 될 줄은 몰랐다. 금이 간 신뢰를 되돌릴 방법은 이뿐이었다.
“누구한테나 그렇듯 나한테도 가족이 있어. 두 명.”
백화 기사들은 어리둥절했다. 이에샤의 두 가족이라면 어머니 앨저 영애와 아버지 알디온 후작일 터였다. 이에샤는 한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흥분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한 사람은 죽은 우리 어머니. 나머지 한 사람은 스승님.”
“스승……?”
“외국인이야. 평민이고. 직업은 용병이지.”
고요가 내려앉았다. 세 사람은 이에샤의 말속을 헤아리려 했다. 파격적이었다. 델페레타의 백작이 용병을 스승으로 섬겼다니. 가족으로까지 여긴다니. 자작 영애인 네세라에게는 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귀족 사회에서, 좁쌀만 한 오점이라도 있는 여자는 짓밟힐 수밖에 없었으니까.
“알디온 후작의 외도로 선대 앨저 백작이었던 외할아버지는 충격받고 쓰러지셨어. 알디온에서는 어머니한테 이혼을 강요하려고, 계속해서 앨저 백작가의 사업을 무너뜨리거나 재산을 빼돌렸고. 어머니는 제법 큰 돈을 위자료로 받고 이혼하셨지만 앨저 백작가는 이미 뼈만 남은 뒤였지. 사병은커녕 힘 좀 쓰는 하인 하나 안 남았어.”
고백이 이어졌다. 이에샤는 한숨을 삼켰다. 에이릴리를 떠올리자 뱃속이 답답해졌다. 어찌하여 당하고만 살았을까? 한 여자를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알디온 부부는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어머니는 당신과 나의 안전을 위해 용병을 고용할 수밖에 없었어. 그게 내 스승님이야. 내 재능을 발견하고, 검술을 가르쳐 준.”
“기사나 귀족 스승을 둔 게 아니라 용병에게 검술을 배우신 거였어요?”
“알디온이 내 삶을 그렇게 만들었어.”
셈브리온은 최고의 스승이었다. 친우였다. 가족이었다. 만난 덕분에 행복했다. 하지만 이에샤에게 ‘귀공녀’라는 정체성이 굳건했더라면, 셈브리온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리라. 용병에게
보호받았다는 사실조차 숨기고 싶은 오점이 되었을 터였다. 알디온 후작 부부는 앨저 백작으로부터 귀족적인 삶을 앗아 갔다.
이에샤는 알디온에서 겪었던 수모까지 말할 셈은 없었다. 자기 속을 시시콜콜 떠들기는 껄끄러웠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필요한 말만 할 생각이었다. 인형처럼 눈 감고 누운 밀레나를 힐끗했다.
“그리고 밀레나 알디온, 저 뻔뻔스러운 계집애는 내 어머니 때문에 자기가 불행했고, 내 어머니가 지독한 사람이었다고 헐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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