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6 10. 멈추지 않는 바퀴 =========================
밀레나가 의식을 놓쳐 버렸을 때, 이에샤와 엘테르트는 석곡궁 건물을 나섰다. 한기가 밀려들었다. 엘테르트가 작게 재채기를 터뜨렸다. 이에샤는 엘테르트의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반듯한 턱이 바르르 떨렸다. 엘테르트가 입은 재킷은 한겨울에나 어울리리만치 두꺼웠다. 11월이 끝나지도 않았다. 이른 감이 있었다.
둘은 정원을 거닐기 시작했다. 겨울에 피어난 작약화가 기이한 아름다움을 뽐냈다. 마법은 공간이 아니라 식물에 걸렸으므로, 정원의 공기는 평범하게 쌀쌀했다.
“멘델린 경, 추위 타시나요?”
“예. 더위는 별로 안 타는데 추위를 심하게 탑니다. 겨울은 고역이죠.”
“그렇구나. 저도 겨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앨저 경도 추위에 약합니까?”
엘테르트의 목소리에서 반가움이 묻어났다. 이에샤는 피식했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은 브링 덕분에 날을 타지 않았다. 브링어가 되기 전에는 겨울보다 여름에 약했다. 이에샤와의 공통점을 찾았다고 들떴던 엘테르트는 시무룩해졌다.
“그렇지는 않아요. 그냥 옛날부터 겨울이 싫었어요. 칙칙하잖아요.”
“그렇군요. 무채색의 계절이라는 말도 있죠. 나는 겨울 풍경 자체는 좋아합니다.”
“눈 좋아하세요?”
“아뇨.”
빙그레 웃어 보였다. 눈은 싫어했다. 눈이 내리면 빈민굴에 시체가 늘었다. 겨울옷과 담요, 따뜻한 수프를 나눠주어도 빈민은 죽어 나갔다. 어린 엘테르트는 겨울이 지나가고 고요해진 거리에서 엉엉 울기도 했었다. 무슨 수를 써도 가난한 이들의 동사(凍死)는 막을 수 없었다. 여름에도 열사병이 기승을 부렸으나, 중부 지역에서는 겨울 쪽이 고달팠다.
“거리에서 가정집이나 상점이 월동 준비하는 걸 보는 게 좋습니다. 지붕을 덧씌우고 식료품을 훈연하고 태피스트리와 모포를 짜고. 그런 모습들을 지켜보면 여러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번 겨울을 잘 넘길 수 있을지, 내가 무얼 베풀면 추운 나날에 위안이 될지, 이듬해에는 무슨 준비를 더하면 좋을지…….”
이에샤는 귀를 기울였다. 엘테르트의 대답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겨울 풍경을 논하면 눈 덮인 세상을 떠올리게 마련이었다. ‘겨울’이라는 낱말에서 자연보다 사람을 보는 이는 드물었다. 엘테르트 멘델린의 눈길은 언제나 사람을 향했다. 어떻게 하면 그토록 다정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타고난 바탕이 달라서일까.
엘테르트가 이에샤와 같은 처지였다면 동생을 미워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이에샤는 싫증을 느꼈다. 엘테르트가 멀게 느껴졌다.
“무엇이든지 알아야만 도울 수 있습니다. 항상 눈을 크게 뜨고 세상 모든 걸 관찰하라고 아버님께서 가르치셨지요.”
“공작 각하께선 좋은 아버지이신가 봐요. 부럽네요.”
“앨저 경.”
엘테르트는 이에샤의 맞장구를 흘려 넘겼다. 무겁게 이름을 불렀다. 이에샤는 우려하던 이야기가 나오리라, 내다보았다. 엘테르트의 말문이 떨어졌다. 수 초가 수 년 같았다.
“왜 그랬습니까?”
“…….”
“아프다고 애원하는 동생을 그리 모질게 뿌리쳐야만 했던 이유가 분명 있었을 겁니다. 앨저 경은 함부로 자신의 소임을 내팽개칠 사람이 아니니까요.”
이에샤는 입을 다물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밀레나가 옛날부터 이러했다 저러했다, 고해바치는 자신을 상상해 보았다. 궁상스럽기 그지없었다. 엘테르트라면 이에샤를 믿어 줄 터였다. 그렇다고 밀레나에게 저지른 폭거마저 이해해 줄까? “아무리 미워도 그러면 안 됐습니다.” 따위의 입바른 소리나 할 것이었다. 이에샤는 엘테르트의 올곧은 성정을 좋아했지만, 지금만큼은 불편했다.
“걘 알디온 부부의 딸이에요. 제가 할 말은 이뿐이네요.”
“알디온 후작은 앨저 경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방금 장갑을 집어 던지지 않은 건 제가 멘델린 경을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걸 명심하시기 바라요.”
야멸차게 비꼬았다. 짜증이 났다. 핏줄이라는 놈이 이에샤의 발목을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에샤가 밀레나에게 친절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오스터 알디온은 자신이 이에샤를 내키는 대로 다루어도 된다고 여겼다. 어머니가 죽었을 때, 이에샤는 당연하다는 듯이 알디온 저택으로 보내졌다. 지긋지긋했다.
피가 이어졌기에 증오하더라도 가족이라면, 피가 이어지지 않은 이에샤와 셈브리온은 무슨 수를 써도 가족이 못 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자 화가 치밀었다. 혈연. 태생. 천륜. 그깟 낱말들이 무어라고.
“저는 지금까지 아버지 같은 건 없다 생각하고 살아왔어요. 밀레나도 마찬가지예요. 그 앤 제 어머니를 거꾸러뜨린 원수의 딸이지, 동생이 아니에요.”
“그들이 앨저 경의 인생에 조금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까?”
“단언컨대, 그래요.”
“그렇군요.”
엘테르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반응 한 번 산뜻했다. 이에샤는 놀란 낯빛을 지었다. 악에 받쳐서 내뱉기는 했지만, 꾸중당하리라 예상했다. 뜻밖이었다. 엘테르트는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앨저 경이 그렇다면야. 실제 호적상으로도 남남이고요.”
“아까는 알디온이 내 아버지라고 반박했잖아요?”
“반박으로 들렸다면 미안합니다. 앨저 경의 생각을 확실히 알아 두려고 물꼬를 텄을 뿐이었습니다. 이제 앨저 경이 후작을 아버지로 여기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습니다.”
이에샤는 멍해졌다. ‘오스터 알디온은 이에샤 앨저의 아버지일 수 없다.’ 하는 뜻을 인정받다니. 두 번째였다. 처음은―말할 것도 없이―셈브리온에게서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셈브리온 또한 부모에게 버림받았으므로. 화목한 집안에서 자란 엘테르트가 받아들여 줄 줄은 몰랐다.
엘테르트가 또다시 재채기했다. 추운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제 코트라도 벗어 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엘테르트는 체격이 좋았다. 이에샤의 치수로는 어깨에 걸치는 것이 고작일 터였다.
“멘델린 경이라면 그래도 아버지랑 동생인데 도리가 아니라고 말하실 줄 알았어요.”
“나도 이젠 앨저 경과 알디온 영애 사이에 골이 깊다는 걸 압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앨저 경한테 너무하지 않습니까.”
“제가 밀레나한테 퍼부은 말들은요? 걔한테는 너무하지 않나요? 다들 그러던데.”
“알디온 영애라면 위해 줄 사람이 어디에나 잔뜩 있을 테니 나는 앨저 경을 편들랍니다.”
엘테르트의 발걸음이 멎었다. 이에샤도 따라 멈추었다. 엘테르트는 화단으로 팔을 뻗었다. 진분홍색 작약의 꽃잎을 어루만졌다. 마법으로 만들어 낸 생명력이 느껴졌다. 필사적으로 벼리고 닦은 자태. 요즈음 파티에서 보이는 밀레나와 비슷했다.
갓 데뷔한 밀레나 알디온은 지금과 달랐다. 재치 있고 사교술도 좋았지만, 자신감이 모자라 보였다. 안쓰러우리만큼 주위를 살폈다. 험담을 들으면 의연한 체해도, 상처받은 티가 났다. 화려하게 꾸몄으나 오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높은 자리에 앉아서 추종자들을 굽어보는 여인과는 딴판이었다.
무슨 계기 때문인지는 몰랐다. 엘테르트는 밀레나의 변화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바뀌어서 자신이 편하다면 그만이었다. 밀레나가 살아가는 방식에 남이 왈가왈부할 수는 없었다.
“알디온 영애도 고충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녀가 앨저 경한테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몰라도 내가 보아 온 모습은 영리하고 배려심 많은 여인이었고.”
“…….”
“하지만 앨저 경이 꺼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요. 나는 당신을 좋아하니까 알려진 평판보다, 내 얄팍한 안목보다, 당신이 하는 말을 믿을 겁니다.”
“제가 질투에 눈이 멀어 덮어놓고 밀레나를 괴롭히는 거면 어쩌려고요?”
이에샤는 스스로에게 비웃음을 보냈다. 바라 마지않던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조건을 달아서 참되었느냐 시험하는 제가 한심스러웠다. 어찌할 수 없었다. 살면서 밀레나보다 이에샤를 지지해 준 사람은 셈브리온뿐이었다. 엘테르트라도 쉽게 믿기는 어려웠다.
“구태여 물어보는 게 아니라는 반증이겠지만, 만에 하나 그렇다면.”
“그렇다면요? 실망할 건가요?”
“내가 좋아하는 여인이 누군가에게 질투할 필요가 없어지도록 더 열심히 아껴 줘야겠죠.”
이에샤의 손이 휙 움직였다. 엘테르트의 멱살을 쥐었다. 엘테르트는 흠칫했으나 뿌리치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에샤가 끌어당기는 대로 고개를 낮추었다. 눈길이 똑바로 맞았다. 숨결과 숨결이 뒤엉켰다.
“제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기막히게 찾아서 해 주는 사람은 멘델린 경이 두 번째예요.”
“첫 번째는 누구입니까?”
“이제는 없는 사람.”
엘테르트는 한숨을 삼켰다. 이에샤가 하나뿐인 가족이라 일컬었던 사람을 떠올렸다. 루시온은 이에샤의 스승을 안다고 했었다. 우울해하지 말라던 인사는, 이에샤의 곁에 ‘가족’이 남지 않았음을 가리키리라. 낯서리만큼 침착해진 모습은 공허감과 상실감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앨저…….”
말을 끝맺기도 전이었다. 이에샤가 발뒤꿈치를 들었다. 엘테르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식은 입술에서는 얼음물 같은 침이 묻어났다. 치솟아 올라온 숨덩이가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가로막혀, 입안을 덥혔다. 어제처럼 긴 입맞춤은 아니었다. 이에샤는 금세 엘테르트를 놓아주었다.
“믿어 줘서 고마워요. 내 편이 돼 주겠다고 해서.”
“나야말로 고맙습니다. 석곡궁에 온 목적은 이룬 셈이군요.”
“네?”
엘테르트가 엄지손과 검지로 턱을 쥐었다. 혀로 입술을 한 바퀴 훑었다. 홀릴 듯이 요염한 모습이었다. 이에샤는 멈칫했다. 자신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서서히 되살아났다. 환한 아침에, 야외에서. 뺨이 새빨개졌다. 엘테르트가 눈매를 휘어 웃었다.
“어제 일이 계속 생각나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 하고 싶었습니다.”
“당신, 그렇게 고상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서는.”
“얼굴이랑은 상관없지 않습니까. 앨저 경이 좋은데.”
안 어울리게 유들유들하기는! 이에샤는 엘테르트를 흘겨보았다. 얄미웠으나 싫지는 않았다. 드러내 놓고 사랑받는데 싫을 턱이 없었다. 엘테르트가 이에샤의 이마로 내려온 잔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이제 앨저 경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겠지요.”
“알았어요. 부하들이랑 잘 얘기해 볼게요. 자신은 없지만, 밀레나랑도.”
이에샤는 웃고 말았다. 부하들에게 제멋대로 군 까닭을 밝히고 사과하기로 했다. 밀레나의 사정도 들어 볼 셈이었다. 밀레나가 에브라힐 궁전에 들어왔다면, 이에샤는 응대해 주어야만 했다. 이복 언니로서가 아니라 백화 기사단장으로서.
“시간이 지체됐군요.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엘테르트가 회중시계를 꺼내 들여다보았다. 이에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테르트의 보좌진이 말라비틀어지는 중일 터였다. “들어가세요.” 하고 대답했다. 엘테르트는 이에샤의 손을 한 번 잡았다가 놓고, 정원 어귀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사랑에 빠지면 바보 되는 남자 좋아합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