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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115화 (115/164)

00115 10. 멈추지 않는 바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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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샤는 이맛살을 구겼다. 지난밤, 뜨거웠던 입맞춤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이었다. 긴장해서인지 늦잠을 잤다. 평소보다 출근이 늦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욕지거리를 뱉을 뻔했다. 부하들은 이에샤의 눈치를 살폈다. 이에샤는 성큼성큼 응접 소파로 다가갔다. 등받이에 모로 기대어 이마를 감싸쥔 귀공녀를 노려보았다.

“네가 왜 여기 있지?”

“언니, 아, 안녕. 오랜만이야.”

밀레나가 실낱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에샤의 눈썹이 꿈틀했다. 밀레나의 낯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복숭아색으로 핏기가 돌던 뺨이 시허옇다 못해, 푸르죽죽하게 바뀌었다. 어딘가 탈이 난 게 틀림없었다. 이에샤는 “꺼져!” 하며 쫓아내 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억눌렀다. 다 죽어 가면서도 인사를 건네는 변죽이 밉살스러웠다.

“웬 아가씨가 쓰러졌다는 전갈을 받고 가 보니, 아, 저 말고 스란 경이요. 알디온 영애더군요.”

“그럼 의료원으로 보내야지 왜 우리 궁으로 데려왔어?”

“마차에 태웠더니 멀미를 심하게 하셔서, 여기서 거리가 멀지 않았던지라 부축으로 모셔 왔습니다.”

“내 사무실에 둔 연유는?”

“가장 넓으니까요. 저랑 페리튼 경 사무실에는 이런 소파도 없고요.”

네세라, 스란, 미엘라가 잇따라 설명했다. 이에샤는 짜증을 느꼈다. 세 사람의 대처는 훌륭했다. 알맞고 합리적이었다. 쓰러진 여자가 밀레나만 아니었어도 크게 칭찬했을 것이었다.

“코르셋을 지나치게 조인 경우인가 했더니 그렇지는 않은 듯하고. 머리랑 옷의 장신구들이라도 떼어 놨어요. 식은땀을 흘리길래 여분 슬립으로 갈아입힐까 했는데 너무 거창한 드레스라 힘들겠더라고요. 속치마만 몇 겹이람.”

“이 날씨에 더위를 먹었을 리는 없으니 괜찮겠지. 얘, 밀레나. 나 좀 보렴. 눈 떠!”

밀레나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였다.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이에샤와는 달리 채도 높은 벽안이 드러났다. 곱다란 미간이 떨렸다. 아픔을 참는 듯했다. 뭇 사내가 본다면 애처로워 발을 구를 자태였으나, 이에샤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모질게 물음을 던졌다.

“왜 에브라힐에 있는 거야? 이런 아침부터.”

“저, 애, 앨저 경. 일단은 안정을 취하시게 둬야 하지 않을까요?”

“뭘 하러 왔는지는 파악해야 하잖아, 올센 경. 얘가 누구랑 만날 약속이라도 잡고 왔다면 알려야 하니까. 의사는 불렀겠지?”

“시더가 의료원으로 갔어요. 알디온 후작가에도 전령을 보내야지 싶은데.”

“자기 마차 타고 왔을 테니 상태 나아지면 태워서 보내지 뭐.”

매몰차게 결정지었다. 백화 기사들은 당황했다. 이에샤가 이복동생을 싫어하는 줄은 알았다. 하지만 시름시름 앓는 모습을 보고도 태연스럽다니. 미워도 핏줄이었다. 이에샤는 조금의 동정도 비치지 않았다. 눈초리에는 혐오감만 그득했다.

찬바람 도는 태도에 네세라가 울컥했다.

“앨저 경. 동생분 상태가 심각해 보이잖아요. 일을 좀 부드럽게 진행할 수는 없나요?”

“……하지만 얜,”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에요! 황궁에 발 들인 이상 우리가 보호해야 할 대상이잖아요. 사감은 접어 두고 제대로 배려해 주세요.”

이에샤는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네세라의 핀잔은 구구절절 옳았다. 다른 여자가 아파했다면 이에샤도 살뜰히 보살폈으리라. 어느 집안 딸인지, 일행은 있는지, 어쩌다가 쓰러졌는지 물어보며. 의사가 올 때까지만 견디라고 얼러 주었을 터였다.

하지만 밀레나는 에이릴리를 능멸한 녀석이었다. 제 부모 때문에 비참한 끝을 맞은 에이릴리가, 저를 사생아로 살게 만든 악당인 양 지껄였다. 그 적반하장은 이에샤의 가슴을 할퀴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무뎌졌다고 해도 옹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남편과 첩실에게 휘둘리기만 한 에이릴리의 삶을 모욕한다면, 그 여파로 귀족다운 삶과 떨어져 버린 이에샤를 자극하는 짓이기도 했다. 이에샤라고 처음부터 좁아터진 침대에서 바지 차림으로 뒹굴고 싶었겠는가.

이에샤가 헛숨을 터뜨렸다. 밑바닥에서부터 끓어넘치는 울분에 네세라마저 흠칫했다. 이에샤는 네세라를 야속하게 흘겨보았다. 외도하는 남자란 최악이라고 비난했으면서, 그 남자의 딸인 저에게 이복동생을 챙기도록 야단치다니. 설움이 북받쳤다.

밀레나가 밭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이에샤 언니. 귀찮게 해서 미안해. 그런데 나 지금 너무 아파서,”

“됐어. 힘들면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렴. 누구랑 약속 잡고 왔어?”

이에샤는 밀레나의 말허리를 잘라 버렸다. 듣기 싫었다.

“아, 아니.”

“새삼스레 관광이야? 데려온 시중꾼은 있어?”

“아냐, 오늘은 나 혼자야.”

“네가 지금 이렇게 비실비실하는 이유로 뭐 짐작 가는 거라도?”

“……아니, 없어.”

밀레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제부터 몸 상태가 이상했다. 죽을 만큼 머리가 아팠다. 욕지기가 치밀었다. 손발이 떨렸다. 드르르, 드르르하는 소리가 귓전을 울려 댔다.

알디온 부부는 병에 걸리더라도 방싯방싯 웃도록 갈고닦은 얼굴에 속아 넘어갔다. 밀레나가 괜찮아진 줄 알고, 에브라힐로 보내 주었다. 밀레나는 마차에 타자마자 무너져 내렸다. 도착해서 문을 연 마부가 질겁했을 정도였다. 왜 이러는지 짚이지가 않았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이 있었다.

“이에샤 언니, 나 사실 언니를 보고 싶어서 궁에 왔어.”

“미쳤구나.”

이에샤는 순수하게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밀레나가 울먹거렸다.

“어쩐지 어젯밤부터 자꾸만 언니한테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느낌이 너무 안 좋았어. 언니를 봐야만 안심이 될 거 같았어.”

“얘가 뭘 잘못 먹었나. 안 어울리게 무슨 쇼야?”

“부탁할게. 나 오늘 하루만 언니 옆에 있으면 안 될까? 내가 정말 너무 불안해서 그래. 이에샤 언니, 우린 자매잖아.”

이에샤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린 이에샤가 자매의 정에라도 매달려 괴롭힘을 면해 보고자 했을 때, 밀레나는 입 다물었었다. 무구한 낯으로 사람들을 부추겼다. 이에샤는 곤경에 빠지기 일쑤였다.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네가 날 언니로 생각씩이나 해 준다니 고마워서 미치겠다.”

“그렇게 꼬아서 받아들이지 말아, 제발. 나 정말 너무 아프고 힘들단 말이야.”

“어쩌면 좋니, 밀레. 나한테 넌 죽든지 살든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남인데.”

“앨저 경! 그만하세요!”

네세라가 들고일어났다. 미엘라와 스란도 불편해 보였다. 이에샤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헤집어 댔다. 또 이렇게 되었다. 정신 나간 이복 언니에게 당하는 가엾은 밀레나! 밀레나가 저에게 물을 먹이고 싶어서 찾아왔다면 대성공이리라.

밀레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혼절하지 않으려고 용썼다. 네세라가 젖은 헝겊으로 밀레나의 이마를 훔쳐 주었다. 걱정스러웠다. 사교계의 꼭대기이니 뭐니 해도, 지금 밀레나는 가냘플 따름이었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약해졌다. 이에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일 터였다.

밀레나가 이에샤를 올려다보았다. 눈빛이 일렁거렸다. 창백한 얼굴에서 부자연스러우리만치 붉은 입술이 벌어졌다.

“난 우리가 자매라고 했지, 가족이라고 하지 않았어.”

“뭐?”

“내 가족은 어머니와 아버지야. 하지만 언니랑도 피가 섞이긴 했잖아. 그런 뜻이었어. 나라고 언니를 우리 집안 울타리에 받아들이려는 거 같아? 난 단지 기분이 묘해서 언니를 보러 왔을 뿐이야. 혈연, 그래, 혈연이라잖아. 언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는 직감이면 어떡할래?”

쉼 없이 늘어놓았다. 사무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백화 기사 모두가, 밀레나가 후처의 딸임을 알았다. 밀려난 전처의 딸에게 보이기에는 무례한 말씨였다. 이에샤만이 밀레나를 꺼리는 게 아닌 성싶었다. 밀레나도 이에샤를 노려보았다. 이에샤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이제 아주 대놓고 저주를 하는구나. 그래도 툭 까놓고 말하니 답답하지는 않네.”

“언니, 제발! 나 머리가 너무 아파. 우리 이런 무의미한 싸움은 그만두자. 조용히 있다가 해가 지면 갈게.”

“그래. 그러렴, 밀레나.”

밀레나가 멈칫했다.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떠올렸다. 자신이 부탁해 놓고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이에샤는 속에서 피어오르는 가학심을 받아들였다. 어여쁜 낯이 일그러지는 꼴을 보아야만 살 것 같았다.

“귀찮게 옥신각신하지 말자고. 내가 오늘 하루 사무실을 안 쓰면 되는 문제니까. 올센 경, 페리튼 경. 내가 꼭 봐야 할 서류만 뽑아서 책상에 올려놓고, 그런 게 아니면 적당히 처리해.”

“언니!”

“앨저 경, 잠깐만요! 어딜 가시려는 거예요?”

“온종일 순찰이나 돌지 뭐.”

싸늘하게 내뱉었다. 뒤로 홱 돌아섰다. 사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몸이 얼어붙었다. 엘테르트가 움찔했다. 이에샤는 알아차렸다. 엘테르트는 갓 도착한 것이 아니라고. 모든 이야기가 새어 나간 성싶었다. 낭패한 티가 뚜렷했다. 엿들을 셈은 없었으리라. 끼어들 겨를을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아랫입술을 씹었다.

‘맙소사. 밖에 누가 온지도 모를 만큼 흥분했었어?’

자기 자신이 바보같았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엘테르트에게 패악 부리는 모습을 들키다니. 엘테르트는 밀레나를 착하고 갸륵한 동생으로만 여겼다. 빈축을 샀을지도 몰랐다. 이에샤는 억울해졌다. 뭐가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가. 눈동자를 굴려 댔다.

엘테르트가 한숨을 쉬었다. 팔을 들었다.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이에샤는 망설임에 빠졌다. 엘테르트의 낌새를 살펴보았다. 노여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조심스럽게 손을 포개었다. 엘테르트는 복잡한 낯빛으로 물었다.

“좀 걸을까요?”

“……좋아요.”

이에샤는 고개를 주억였다. 엘테르트가 손가락을 그러모았다. 깍짓손이 이루어졌다. 잡아당겨서 이끌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복도로 사라졌다. 밀레나는 휘늘어진 채로 망연자실했다. 연모하는 남자가 이복 언니를 이끌고 떠나는 모습이, 망막에 새겨진 듯했다.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시야가 하얗게 깜빡거렸다.

============================ 작품 후기 ============================

예약 등록한 글입니다.

+) 오후 12시, 내용을 조금 가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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