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1 10. 멈추지 않는 바퀴 =========================
(연참 2/3)
“내가 한 입으로 두 말 할 사람으로 보이나? 아니면 시시한 농담을 걸 사람으로?”
두 번째 물음에서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아뇨, 아닙니다.” 하고 얼버무렸다. 루시온의 눈에 의심이 서렸다. 시치미를 뚝 떼었다.
체사로의 마음은 알 것 같았다. 셈브리온을 생각해, 이에샤에게 득이 될 일을 밀어주려는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자신이 끼어들면 시험이 어그러지리라 예상했다. 이에샤에게 좋은 점수를 받았다는 까닭으로, 능력 있는 수험자를 다른 기사단장이 떨어뜨릴지도 몰랐다. 궁전 생활도 오래되었다. 주제 파악쯤은 할 수 있었다.
글렘 모드리스도 나올 터였다. 이에샤에게 진 뒤 자택에 틀어박혔다지만, 기사단 입단 시험은 유서 깊은 행사였다. 황실에 자부심을 품은 루시온이 가만둘 리 없었다. 얼굴을 비쳐야만 했다. 만나면 무슨 말을 들을지 몰랐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제국 기사를 선발했다.’라는 경력보다 평온이 끌렸다.
엘테르트는 이에샤가 고민하는 것을 눈치챘다.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 가기 뭣하다면 내가 함께 갈까요, 앨저 경.”
“……남자들이란.”
“예?”
“아닙니다. 제가 멘델린 경한테 브링어 일곱이 모인 자리를 권할 정도로 나쁜 여자 같아요?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요.”
이에샤는 한숨을 삼켰다. 엘테르트와 루시온. 체사로도. 똑똑하고 노련한 남자들이 이에샤의 처지에만은 낙관적일 때가 있었다. 엘테르트는 이에샤가 살얼음판 위에 섰음을 이해했지만, ‘내가 도와주면 괜찮겠지.’ 하고 여겼다. 오십보백보였다. 이러한 생각을 털어놓자 네세라가―분통을 터뜨리며―가르쳐 주었었다.
「살면서 크게 곤란해 본 적이 없어서 그래요. 배려도 아는 만큼만 할 수 있는 법이니까.」
쓴웃음을 머금었다. 루시온 쪽으로 머리를 수그렸다.
“분에 넘치는 기회지만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심사에 참여하면 공정성을 해칠 거 같습니다. 저쪽은 다섯이고 이쪽은 둘이니까요.”
두 남자는 이해력이 좋았다. 이에샤의 거절을 듣고 깨달은 낯빛을 지었다. 제국 평기사들이 이에샤를 두려워하니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체사로 외의 기사단장들이 발맞추어, 결투가 아닌 수로 이에샤를 따돌릴 것이라고는 떠올리지 못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어?’ 하는 의식이 깔렸기도 했다. 루시온이 턱을 어루만졌다.
“내가 미처 생각을 못 했군. 아니, 존엄한 황실 행사에서 장난질을 할 놈들이라고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하긴 그 꼴통들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미만을 보여 주니까.”
“오히려 평기사보다 더 이성을 잃었을지도. 여자라서 무시하던 앨저 경이 자기네보다 소질이 좋다는 게 자존심을 해쳤겠지.”
“그런 면에서 보면 에버렛 경은 비범하지.”
“꼭대기가 그런 사람인데 그 모양인 기사들도 비범하고.”
모두가 체사로의 됨됨이에 감탄했다. 그토록 선하고, 순하기에 동료를 믿었으리라. 공식 행사에서까지 브링어인 이에샤를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이에샤는 한숨을 터뜨리고 말았다.
“전하의 말씀대로 중요한 연례행사인걸요. 외부인인 저 때문에 망쳐서는 안 되죠.”
“이것참. 내가 권해 놓고 이런 말 하기도 쪽팔리지만 무르는 게 낫겠군. 에버렛 경한테는 내가 알아듣게 설명하지.”
“에버렛 경이 앨저 경한테 호의적이니까 근위 기사단 내에서도 불만이 쌓이고 있을지 몰라. 언제 한 번 대대적으로 기강을 잡아야지 않겠어?”
“솔직히 말해 봐, 에르디. 너 소문 때문에 열받았지?”
엘테르트는 대답을 삼갔다. 체사로와 이에샤 사이의 염문은 이에샤가 기사단 입단 시험을 치기도 전부터 돌았다. 황태자의 정부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고위 관료에게 몸을 주고 지원받는다는 뜬소문은 다섯 손가락을 넘어갔다. 한심하게만 여기고 무시했다가, 이제 와서 화를 내려니 머쓱했다. 우리가 연인이 될 줄 알았나.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관계에 상관없이 나섰어야만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이에샤는 말간 얼굴로 엘테르트와 루시온의 중간쯤을 쳐다보았다. 저를 둘러싼 쑥덕질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개짓거리가 1년 가까이 이어지면, 초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연초에 비하면 수그러든 편이었다. 체사로와 엘테르트를 상대로 한 소문만 남았으니. 후자는 정말이기도 했다.
“모처럼 그대에게 도움될 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리 되니 씁쓸하군.”
“생각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래도 신년맞이 무도회에 에르디의 파트너로 나가면 단숨에 인지도가 높아질 거야. 한 달만 더 기다리자고.”
눈이 동그래졌다. 루시온의 말속을 알아듣지 못했다. 차근차근히 따져 보았다. 신년맞이 무도회. 엘테르트의 파트너. 자신이. 이에샤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엘테르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제가 에스코트하려고 마음먹었던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곤혹했다. 무도회, 연회 따위는 저와 동떨어진 줄로만 생각했다.
“저, 전혀 생각 못 했는데요. 작년에는 렌―반데스 영애 때문에 참석한 거였고 올해는 그냥 집에서 쉴 셈이었습니다만.”
“음. 에르디.”
“그 불쌍하다는 목소리 집어치워.”
엘테르트는 평상심을 지켰다. 뜻밖에 멀쩡했다. 이번이 두 번째였다. 무도회 파트너쯤이야, 결혼하지 않겠다는 선언에 견주면 간지러웠다. 이에샤가 참석하기 싫다면 그리해도 좋았다. 어차피 올해를 빼면 홀로 참석해 왔다. 올해에도 렌디드 자작 사건 탓으로 밀레나와는 춤 한 번 춘 것이 다였다. 이에샤를 대동할 필요는 없었다.
부모님이 둘의 사이를 아는 게 두렵기도 했다. 애버토스는 엘테르트를 존중했고 엘로나는 사랑했지만, 권위주의적인 이들이었다. 태생의 한계가 있었다. 멘델린 소공작과 황녀의 결합은 고매했었다. 엘테르트와 이에샤하고는 달랐다. 엘테르트가 이에샤를 연인으로 내세우면, 부부는 멘델린의 이름에 흠이 된다고 여길 터였다. 백화 기사단장을 응원하더라도 며느릿감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때가 일렀다.
“앨저 경은 평소에 휴가도 없이 일하니까 쉬는 편이 낫겠지요. 괜찮습니다.”
“정말요? 아니, 멘델린 경이 원하신다면 나갈 수 있어요. 이제 드레스 정도는 살 만큼 돈도 모았고.”
이에샤가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샤는 ‘결혼 사건’ 뒤로 엘테르트의 눈치를 살폈다. 제 행동거지가 엘테르트에게 불쾌감을 줄까 봐 저어했다. 연인으로서 마땅한 태도이기는 했으나―엘테르트는 처음부터 그러한 태도를 취했고―애처로웠다. 천방지축인 모습을 벗어던지니 낯설기도 했다.
“아닙니다. 이번 일은 정말로 괜찮습니다. 경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아니면 혼자 나와서 파티만 즐기고 돌아가는 건 어떻습니까? 지난 무도회가 무산된 만큼 내년은 더 성대하게 치를 계획입니다만.”
“사람이 그렇게 우글거리는 곳은 좀 그렇긴 해요.”
“그럼 집에 계십시오. 굳이 싫은 일을 무릅쓸 건 없다고 그리 말했는데도.”
이에샤는 망설인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온은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본궁 앞에서 울음을 참던 이에샤는 아슬아슬해 보였다. 꼼꼼하고 상냥한 손길이 필요한 상태가 아닐까. 하지만 엘테르트는 이에샤가 스승과 헤어졌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좀 자세히 설명을 붙여라. 앨저 경, 어차피 에르디는 매년 멘델린 공의 대리인 노릇 하느라 바쁘다고. 파트너랑 오붓한 시간은커녕 노친네들한테 붙들려 있다가 끝나기 일쑤니까, 정말로 경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저, 그럼 아까는 왜 제가 무도회에 나갈 것처럼 말씀하셨나요?”
루시온은 말을 잊었다. 이에샤의 물음은 날카로웠다. 이에샤가 무도회에 나가는 것이 기정사실인 양 말해 놓고 “사실 넌 오지 않는 편이 나았다!” 하고 뒤집으려니 께름했다.
엘테르트는 한숨을 쉬었다. 털어놓지 않고 넘어가기를 바랐는데, 이에샤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자그마하게 중얼거렸다. 태도에서 계면함이 묻어났다.
“그냥, 제가 한 번쯤 앨저 경을 에스코트해 보고 싶었습니다.”
“…….”
“춤도 출 수 있으면, 더 좋고.”
이에샤의 뺨이 붉어졌다. 루시온은 두 남녀를 번갈아 보았다. 재미 없었다. 싫증이 났다. 속에서부터 무언가―한 쌍의 짚신벌레를 보는 듯한 기분이 올라왔다.
“내가 잠시 피해 줄 테니 둘이 얘기할래?”
“아, 아닙니다! 전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루시온. 일하자.”
엘테르트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말끝의 떨림은 어쩔 수 없었지만. 루시온의 존재도 잊어버리고 밀어를 속삭인 일이 창피했다. 루시온은 따분해졌다. 저보다 늦으면 늦었지, 빠르게 여자를 사귈 줄은 몰랐던 엘테르트가 배신자로 보였다. 상대는 자기가 먼저 좋아한 여자이기도 했다. 루시온은 책상에 놓인 서류를 뭉텅이로 집었다. 엘테르트에게 밀어 버렸다.
“일. 그래, 일 좋지. 걔네 전부 내 직인 필요없는 것들이니까 네가 해 주라, 에르디.”
“루시온, 너.”
“왜, 뭐, 왜.”
툴툴 말대꾸했다. 이에샤는 둘의 낌새를 살폈다. 의자에서 일어났다. 자리를 뜨고 싶었다. 엘테르트와 한곳에 있으면 설렜지만, 곤란하기도 했다. 두 사람에게 인사를 꾸벅했다.
“저는 가 보겠습니다, 전하. 멘델린 경.”
“아, 그래. 너무 우울해하지 말라고.”
“응? 조심히 가십시오, 앨저 경. 여유가 생기면 찾아가겠습니다.”
엘테르트는 고개를 기웃했다. 루시온의 인사말이 예사롭지 않았으므로. 이에샤는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몸을 돌렸다. 황태자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시름이 들었다. 셈브리온이 없는데도 웃고, 떠들고, 사랑하다니. 스스로가 기이했다. 셈브리온의 존재감이 흐릿해질까 봐 겁났다. 공허감을 채우더라도 셈브리온 데힐이라는 사람만은 뚜렷하게 기억해야 했다. 평화를 누리는 일이 죄처럼 느껴졌다.
“내가 이렇게 멀쩡하면 안 되는데.”
쓸쓸한 혼잣말이 호랑가시궁 복도에 흩어졌다.
늦가을이 되자 스란은 살판났다. 이에샤가 연무장에 나가니, 셔츠 자락을 묶어 배꼽을 드러낸 채로 쉬는 중이었다. 충격적인 꼴이었다. 이에샤조차 맨살을 내보이기는 조심스러웠다. 석곡궁에 올 사람이 없더라도 위험했다. 여자가 그렇게 배를 까 놓으면 안 되지. 말하려다가 주춤했다. 네세라에게 알려지면 잔소리가 쏟아질 터였다. 네세라의 지치지 않는 닦달로, 백화 기사들의 머릿속에는 ‘여자가 좀 그래도 될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파고들었다.
“벌써 한바탕했나 보네? 대련이나 할까 했더니.”
“전 평소랑 똑같이 나왔습니다. 앨저 경이 늦으셨죠.”
“아, 오다가 일이 좀 있어서.”
백화 기사의 출근 시각은 정해지지 않았다. 오전 8시까지만 나오면 되었다. 이에샤는 호랑가시궁에 들르느라, 9시 하고도 30분을 더하여 석곡궁에 도착했다. 미엘라와 네세라가 쌓아 둔 서류들을 처리하고 나온 참이었다.
“여름에는 수련도 맨날 빼먹더니 요즘 날아다녀, 스란 경. 경도 참 독특하다니까.”
“전 그 끔찍한 더위에 멀쩡한 제국인들이 더 이상하게 보입니다.”
검을 끌르다가 멈칫했다. 스란은 이국적인 용모를 지녔어도, 델페레타에서 나고 자랐다. 제국인이 아닌 양 말하니 위화감이 들었다.
“그러는 스란 경도 제국인이잖아.”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