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0 10. 멈추지 않는 바퀴 =========================
(연참 1/3)
“백작님, 안녕하세요.”
코트를 여미는 참이었다. 밖에서 현관문을 따는 소리가 들렸다. 밝은 갈색 머리카락의 여인이 들어왔다. 이에샤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이는 여인은, 셈브리온이 부른 출장 가정부였다. 일 년치 삯을 치렀다고 했다. 이에샤는 “어서 와.” 하고 맞아들였다. 알리사가 몸을 꾸벅했다. 알리사의 품행은 조용하고 차분했다. 이에샤를 거슬리게 하지 않았다. 셈브리온이 꼼꼼하게 뽑은 모양이었다.
알리사는 주방부터 향했다. 아침 식사를 차렸다. 만들어 둔 스튜를 데웠다. 빵을 얇게 잘랐다. 그만큼으로도 흡족하리만큼, 알리사의 손맛은 뛰어났다.
“내일은 코트 세탁 좀 해야겠어요. 퇴궐하시고 바구니에 내놓으셔요.”
“응. 고마워.”
이에샤는 습관적으로 감사했다. 얼마 전까지 아랫사람이 무언가를 해 주면 당연하게 받아들였었다. 셈브리온에게 꾸지람 들었다. 누구에게나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말라고. 셈브리온이 떠나고 보름. 이에샤는 가르침을 지켰다. 평민 지구에 사는 백작을 기이하게 보던 알리사와도 가까워졌다. 셈브리온의 요리보다 채소가 많고, 풍부한 맛이 나는 음식을 먹어 치웠다. 텅 빈 가슴을 애써 모르는 체했다.
이에샤가 출근하면 알리사는 집 안을 치웠다. 저장고를 살피고, 식료품이 모자라면 시장을 보았다. 넉넉하다 싶으면 퇴근했다. 빨래는 이틀이나 사흘을 걸러 했다. 알리사는 글을 곧잘 읽고 썼다. 퇴궐한 이에샤에게 야식을 만들어 두었다든가, 빨랫감을 내놓으라든가 하는 쪽지를 남기기도 했다.
알리사는 이에샤를 정성껏 모셨다. 남편이 사고로 다리를 못 쓰게 된 차에, 봉급을 당겨 준 고용주가 고맙지 않을 턱이 없었다. 이에샤는 별일이 없으면 내년에도 돈을 한꺼번에 내겠노라 말했다. 기분이 좋은 날에는 팁을 주기도 했다. 잔잔한 나날이 이어졌다.
“출근할게. 수고해.”
“다녀오세요. 혹시 내일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신가요?”
“딱히. 알리사가 해 주는 음식은 뭐든 맛있어.”
알리사가 “백작님은 참, 빈말도 멋있게 하시네요.” 하고 웃었다. 이에샤는 고개를 갸웃했다. 진심으로 건넨 칭찬이었다. 셈브리온이 요리를 공부했다고 해도 몇 달 익힌 것이 다였다. 맛이 없지는 않았으나, 훌륭하지도 않았다. 식생활은 지금이 풍요했다.
이에샤는 더 말하지 않고 집을 나섰다. 11월이 일주일 남짓 남았다. 공기가 서늘해졌다. 셈브리온이 있었다면 행복해했을 터였다. 이에샤는 겨울을 반기지 않았다. 올겨울은 쓸쓸하기까지 했다. 엘테르트가 보고 싶었다. 연말이 코앞이었다. 엘테르트는 일에 짓눌려 살았다. 신년맞이 무도회를 벌써 준비한다고 들었다. 루시온도 겨울철 기사단 입단 시험 때문에 눈코 뜰 사이 없는 듯했다.
이에샤는 역마차에 몸을 실었다. 허리에 찬 검을 만지작거렸다. 마음이 가라앉아 갔다. 소리 내어 중얼거려 보았다.
“잘해야지, 오늘도.”
말들이 투레질했다. 마차가 구르기 시작했다. 마부의 낯도, 흘러가는 풍경도, 덜커덩덜커덩 흔들리는 느낌도 익숙했다. 이에샤는 의식적으로 새로운 것을 찾으려고 했다. 셈브리온은 이에샤 일상의 축이었다. 무엇을 보아도 셈브리온이 떠올랐다. 하잘것없더라도 좋았다. 청과전의 좌판에 어제는 사과가 굴러다녔는데 오늘은 석류라든가, 어린애가 바닥에 그어 놓은 낙서라든가, 행인의 두꺼운 옷차림이라든가……. 셈브리온의 공백을 메워 줄 신선함이 필요했다.
마차가 멎었다. 이에샤는 힘없이 발받침을 디뎠다. 땅으로 내려섰다. 황궁은 좋았다. 셈브리온이 밟은 적 없는 장소였기에, 딴생각하기가 쉬웠다. 석곡궁으로 터덜터덜 걸어갈 때였다.
“앨저 경!”
누군가가 이에샤를 불렀다. 이에샤는 놀라지 않았다. 돌아서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본궁에서 달려 나온 루시온이 곁에 섰다. 전하를 뵙습니다. 인사를 올리자, 루시온은 "됐어, 됐어!" 하며 이에샤의 어깨를 잡았다. 일으켜 세우려다가 멈칫했다.
“이런. 함부로 닿으면 안 되는데.”
“예?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만.”
“종형의 정인한테 예의를 차리지 않아서야 쓰나. 아, 이제 또 동복을 입는 건가? 하복이 훨씬 내 취향이었는데 아쉽군.”
이에샤는 의아해졌다. 루시온이 백화 기사단 정복을 입을 리야 없었다. 여자의 옷차림을 눈요깃감으로 삼는 치도 아니었다. 취향 운운은 뜻밖이었다. 이에샤의 속을 읽고 루시온이 설명했다.
“둘이 엄연히 달라. 동복은 황실 디자이너가 디자인했고, 하복은 침궁(針宮) 하녀가 끼적인 낙서를 우연히 보고 내가 통과시켰지. 백화 기사단 옷은 여자가 만드는 편이 낫겠단 생각도 있었지만 실제로도 하복이 훨씬 세련되지 않았나?”
“아하. 확실히 이 옷은 남성복을 여성복으로 뜯어고쳤다는 느낌이죠. 남장한 기분이 듭니다.”
“그렇지? 어울리면 그만이래도, 그 하녀한테 새로운 동복 디자인을 맡겨 볼까 해. 백화 기사단의 팬인 것 같더라고.”
이에샤는 피식했다. 황실 디자이너의 옷을 밀어내고 하녀의 디자인을 고르겠다니. 루시온다웠다. 루시온은 들뜬 듯이 보였다.
“남자 작품에는 다짜고짜 내 예술 세계를 보라는 자의식이 철철 넘치는데, 여자들은 뭘 만들어 보라고 시키면 보다 세밀하게 고심한단 말이지. 여자 장인이 늘면 지금보다 다채로운 물건들이 생길지도 몰라.”
“예, 그런 쪽으로 전하의 감은 확실하시죠.”
“뭐야, 은근슬쩍 자기 자랑인가?”
이에샤는 부정하지 않았다. 루시온이 아니었더라면 ‘앨저 경’도 없었다. 셈브리온 다음으로 제 가치를 알아준 사람이었다.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전하,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요?”
“출근하는 길이지? 간단하게 전하지. 그대가 이번 기사단 입단 시험에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관해 줬으면 하는데.”
“예?”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백화 기사와 제국 기사는 무관계했다. 황실 기사로 묶인다 하여도 제국 기사단은 군사력이었고, 백화 기사단은 여성 문제 전반을 책임졌다. 경비대에 가까웠다. 여름철 시험도 지나쳐 보냈다. 겨울철 시험이라고 이에샤가 지켜볼 필요는 없었다.
“꼭 제국 기사단장만 심사를 맡는 건 아니야. 에버렛 경이 브링어인 앨저 경의 안목 역시 빌려야만 한다고 주장하더군.”
“에버렛 경이요? 왜죠?”
루시온이 입을 다물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본궁이 멀지 않았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이에샤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대, 용병 스승이 돌아갔다며? 에버렛 경한테 그대를 봐달라고 부탁한 모양이야. 외부인이 기사를 뽑는다면 영예로운 경력이 되거든. 대귀족이나 공신이 아니면……, 앨저?”
“아, 죄, 죄송합니다, 전하.”
이에샤는 눈가를 가렸다. 황궁에서 셈브리온의 자취를 맞닥뜨릴 줄은 몰랐다. 눈물은 흐르지는 않았으나, 차올라서 넘치려고 했다. 손등으로 훔쳐 냈다. 얼굴을 치켜들었다. 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안정이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스승님이 떠난 지 아직 며칠 안 돼서 이럽니다. 황태자 전하 앞에서 추태를 보였군요.”
“음, 앨저 경.”
“예?”
루시온이 손을 뻗었다. 이에샤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려고 했다. ‘아차.’ 싶었다. 팔을 거두었다. 객쩍게 동쪽과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시험 얘기, 내 궁으로 가서 마저 하지.”
“번거롭게 그러실 것 없습니다. 여기서 들어도 괜찮은데요.”
“지금 그대한테 필요한 사람도 거기 있으니까 가자. 명령이야.”
이에샤의 눈이 커졌다. 루시온은 빙그레 웃었다. 손짓을 까딱했다. 이에샤는 무례하게도 고개만 끄덕거렸다. 루시온이라면 문제 삼지 않을 줄 알았다. 루시온을 지키듯이 섰다. 걷기 시작했다. 엘테르트와 만나기는 나흘 만이었다.
황태자의 거처는 본궁과 가까웠다. 두 사람은 빠르게 호랑가시궁에 다다랐다. 하인이 다가왔다. 루시온의 외투를 받아 들었다.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물러갔다. 다른 별궁의 하인들보다 절도가 있었다. 복도로 접어들자, 시종 한 명이 지나갔다. 젊은 시종―라가니아 자작이 루시온에게 예를 갖추었다. 이에샤에게도 거리낌 없이 묵례했다. 이에샤는 자작을 꽤 좋아했다. 죄인의 아들로서 노륙당할 뻔했던 청년과 몰락 귀족은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올랐다. 집무실 앞에 섰다. 루시온은 노크하지 않았다. 문을 열어젖혔다. 자기 방이니 당연한 행동이었다. 서류에 코를 박은 엘테르트가 내뱉었다.
“늦었잖아. 네가 1분 꾸물거릴 때마다 내 할 일이 얼마나 불어나는지 몰라서 그래?”
“친애하는 형님? 지금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해도 될까?”
“뭘 새삼스럽게…….”
엘테르트는 얼굴을 들었다가, 얼어붙었다. 이에샤와 눈이 마주쳤다.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가로 다가들었다. 이에샤의 팔을 잡아당겼다. 제 몸 뒤로 감추었다. 루시온이 “내가 어디 데려다 가두기라도 한대?” 하고 투덜거렸다.
“앨저 경, 여긴 웬일입니까? 어쩌다 전하와 같이 들어온 겁니까?”
“출근길에 전하를 뵈어서요. 그보다 멘델린 경.”
“예, 예?”
“원래 그런 식으로 말해요?”
엘테르트는 시선을 여기저기로 돌렸다. 이에샤 앞에서는 루시온에게 깍듯한 태도를 지켜 왔다. 루시온이 ‘에르디’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자신은 극존칭을 썼다. 품위 없이 시시덕거리는 꼴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발개진 얼굴로 우물쭈물했다.
“저, 그러니까 루시온, 이 아니라 전하랑은 아주 어릴 적부터 같이 자랐고, 사촌이다 보니. 그냥 가끔 말을 편하게 할 때도 있달까. 어린 시절의 버릇이 남아서 그렇습니다.”
“쟤가 어제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회의할 때마다 그 실실거리는 웃음 좀 거두라고, 차라리 란델이 나보다 위엄 있겠다고 했다?”
엘테르트는 아니라고 하지 못했다. 사실인 성싶었다. 이에샤는 생경한 눈초리로 엘테르트를 보았다. 성직자보다 선량하고 온순하다는 멘델린 소공작이 황태자를 상대로 쏘아붙인다니. 상상이 가지 않았다. 눈으로 보고도 그러했다. 엘테르트는 뺨을 긁적였다. 들켜 버린 일, 말이라도 편하게 하자 마음먹었다.
“본인이 문제 삼지 않으니 괜찮습니다. 루시온이 저래 봬도 군주의 덕목을 갖춰서 너그럽거든요. 하지만 앨저 경은 되도록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위험합니다.”
“야, 말이 앞뒤가 안 맞잖아?”
루시온이 항의해 왔다. 이에샤는 웃어 버렸다. 셈브리온의 빈자리를 채우고자 신선한 풍경을 찾기는 했지만, 이는 지나치게 신선했다. 뜻밖의 일로 기분이 가벼워졌다.
루시온과 엘테르트가 책상으로 돌아갔다. 이에샤는 간이 의자에 앉았다―간이라고는 해도 벨벳까지 씌워진 물건이었다. 둘을 쳐다보았다.
“이벨리오노 전하.”
“응?”
“정말로 제가 겨울철 시험을 참관해도 되는 건가요?”